살다 보면 간혹 꿈같은 일이 실제로 벌어지기도 한다. 그날 선화동 집에서 그랬다. 여느 때처럼 우리 집을 한번 둘러보고 한 달 동안 별일이 없었는지 체크한 후 정원을 나서는 중이었다. 몇 년 동안 돌보지 못해 점점 황폐해지는 정원수와 꽃나무들을 슬픈 마음으로 바라보다가 잠시 옛 추억에 젖었다. 온갖 종류의 꽃이 만발해서 자랑스레 친구들을 초대했던 초등 5학년의 봄날. 친구의 친구였던 샤프한 미소년 남자애가 오기로 해서 마음 설렜던 날. 그 아이가 못 와서 실망했던 마음. 뒤늦게 수줍은 듯 대문을 기웃거리던 그 아이. 표정을 감추며 그 남자애를 맞이하던 대문 철창. 그 무늬를 멍하게 쳐다보다가 놀라 자빠질 뻔했다. 그때 그 아이가 키가 훌쩍 큰 채로 점점 다가오고 있지 않은가? 숨이 막혀서 일단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그 사람은 몇 분간 우리 집 정원을 살피더니 이내 총총 사라졌다. 내가 추억에 젖어 헛거를 본 건가? 부동산에서 집을 내놨다고 잘못 알려 줬나?
그때 그 아이.
생각해 보니 허깨비가 아닐 가능성이 더 컸다.
그 남자애가 커서 이십여 년 만에 선화동에 왔다면? 아주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몇 년 전 친구에게 얼핏 그 사람이 대전에 내려와 직장 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으니까.
-----
초등 시절 그 남자애를 보러 엄마를 졸라 대훈서적에 자주 갔다. 엄마는 내가 책을 좋아해서 그런 줄 안다. 동네의 가장 부잣집 딸에 상위권 성적인 나는 그 애와 도통 부대낄 찬스가 없었다. 엄마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엄마들끼리 친해야 우리들끼리도 자주 만나는데…. 그 아인 공부를 잘하지 않는데도 그 책방에 자주 왔다. 책들이 가득 꽂혀 있는 높다란 서가를 꿈꾸듯 쳐다보는 그 얼굴을 훔쳐보았다. 영리해 보이는 그 아이가 공부를 잘하지 않은 이유도 알았다. 엄마랑 대화하는 것을 들어보니 우리 집과는 딴판이었다. 성적 같은 것에는 별 관심이 없는지 공부와는 상관없는 엉뚱한 이야기만 나누고 있었다.
중학교 때 몇 번 그 서점에서 그 애를 봤다. 둘 다 어머니가 딸리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는 인사를 나누기에는 어정쩡한 사이라 대강 눈인사를 나누거나 못 본 체하고 지나갔다.
고등학교 때 교보문고 음반가게에 그 아이가 몇 번 나타났다. J POP 음반을 묻고 있는 것 같았다. 눈이 마주칠 엄두가 안 나서 먼 데서 보면 가능한 한 피했다.
나는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여 SKYE 대학에 들어갔다. 그중에서 가장 쉬운 여학교에. 그 아이도 서울로 올라갔다는 소문을 들었다.
대전역에서 기차를 탈 때 가끔 떠올랐지만 넓고 넓은 서울서 그 사람을 만날 것이라곤 꿈도 꾸지 않았다. 인생사와 가족사로 바쁘기도 해서 그를 잊고 지내다가 딱 한번 마주쳤다. 이대 앞 추리소설 가게에서. 주인과 담소를 나누는 허술한 차림새의 청년은 그때 그 아이였다. 하필 남자 친구를 달고 있었을 때…. 나를 못 알아본 건지, 남자가 옆에 있어서였는지, 우리 차림새가 자신과는 많이 차이 나서 그랬는지, 그 사람은 나를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지나쳤다. 이미 우리 집 가세가 심히 기울었건만 그날따라 나는 왜 명품으로 치장했을까.
-----
그날 이후 선화동 가는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돈 벌러 일주일에 한 번 과외 교습 가르치러 가는 일도 한 달에 한번 집을 체크하는 일도 일종의 설렘 속에 가게 되었다. 그 사람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 속에.
마주친다 한들 제대로 인사도 나누지 못할 거면서…. 집안이 쫄딱 망해 자기 집에서 살지도 못하고 변변한 직장도 없이 과외를 하는 마당에. 혹시나 그 사람이 그날의 우리 집 정원을 기억하고 집에 대해서 묻는 다면, 얼마나 쪽 팔릴 것인가? 겨우 마지막 남은 우리 집 재산, 아버지의 자랑, 그 집이 있어 그나마 안도하고 돌아가신 아버지, 어머니와 오빠네 (자세히는 새언니) 와의 상속 분쟁으로 법정다툼 속에 5년째 아무도 살지 못하게 될 걸 까마득히 모르신 채.
아, 고만 생각하자.
앗, 그 사람이다.
대훈 손칼국수집 앞을 지나치다 언뜻 그 안에서 점심을 들고 있는 그를 보았다. 추억을 소환하러 가끔 이 동네에 오는 모양이다. 과외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도 그를 보았다. 소상히 선화동을 관찰하는 모습이다. 공방과 선술집 앞을 기웃거리더니 목욕탕, 방앗간, 구멍가게를 하나하나 스마트폰에 담는다. 톡톡히 향수병을 앓고 있나?
동네 한 복판 J 카페는 과외가 끝나고 내가 한숨 돌리는 곳이다. 이층 양옥을 개조한 그곳 이층에 커다란 통창이 있다. 그 창으로 정겨운 동네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현대적인 인테리어에 여러 가지 계절 꽃을 늘 생화로 장식해서 특히 맘에 든다. 커피 맛도 좋다. 크로플은 그저 그렇지만. 카페 주인에게 얀 티에르상(Yann Tiersen)의 앨범 ‘Eusa’ 도 소개했다. 이곳 분위기와 어울리니 가끔 틀어달라고.
지난주 내 단골 자리를 찾아 카페 이층에 올라갔을 때 깜짝 놀랐다. 그 사람이 내 자리를 차지하고 책을 읽고 있지 않은가? 쿵쿵 뛰는 가슴. 너무 놀라서 일단 좀 먼 구석에 자리 잡았다. 그쪽에서는 안 보이고 나는 그를 관찰할 수 있는. 그는 이어폰의 음악에 몰두하는 것 같고 가끔 메모지에 무언가를 적는다. 내가 늘 불만인 크로플을 얼마나 맛나게 먹는지. 가끔 창밖으로 눈을 돌려 주변 풍경도 한번 바라본다. 여유롭고 평화로운 표정이다.
다음 날부터 나도 크로플을 먹는다. 이상하게도 맛이 있다. 이제는 그 커다란 창가에 자리잡지 못한다. 그 사람이 나를 발견하게 될까 두려워서다.
오늘 마지막으로 그의 모습을 보았다. 이제 그 카페에 가지 않을 것이므로 마지막이라는 단어를 쓴다. 이층 통창 옆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노출된 일층 한가운데 좌석에서. 아내와 유치원 아이를 동반한 한 가족의 일원으로…. 아내와의 대화가 들렸다.
“힙하게 단장은 했지만 좀 어정쩡하네.”
“그래도 이곳이 옛 부촌이라. 가게들이 튀지 않은 모습이야.”
사랑하는 아내에게 자신의 고향 동네를 소개해 주고 싶었던 것 같다. 아름다운 아내와 귀염둥이 꼬마 녀석을 거느린 행복한 가장! 한 가족의 단란한 모습이 이토록 싸하게 아픔으로 다가오다니…. 아이가 진득이 참지 못하고 아이스크림을 비우자마자 나가자고 조른다. 온 식구가 떠날 채비를 한다. 왁자지껄 돌아가는 그 가족의 뒷모습을 멍하니 좇고 있다.
그때 갑자기 터져 나온 “에치~”
이 망할 놈의 재채기. 환절기의 불청객이 찾아왔다.
숙녀의 재채기 치고는 너무 우렁차서 그만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다. 그 순간 하필 로맨틱한 티에르상의 ‘Porz Goret’ 이 흘러나온다.
그 사람이 뒤돌아서 잠시 내 쪽을 본다. 약 2초간 시선이 마주친다. 묘한 표정이다. 피아노 선율 때문인지 내 얼굴을 알아봐서인지 알 수 없다.
가족이 떠났다. 갑자기 허망한 마음이 든다. 나도 이곳을 떠나고 싶다.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으리라.
곧장 나갈 수는 없으니 (또 눈에 띌 수는 없으니까) 다시 이어폰을 끼고 앨범 ‘Eusa’의 수록 곡을 차근차근 듣는다.
난 뭘 기대했던 것일까? 이성이 감정에게 혹독한 훈계를 한다.
그 사람이 결혼했을 확률이 60% 이상은 될 거라고 누누이 얘기했잖아? 감정은 말을 듣지 않는다. 알아 알아 나도 알아. 그렇지만 무심할 수 없는 걸. 안타까운 걸.
다시 이성이 말한다. 네가 사랑한 것은 이십여 년 전의 그 소년이야. 그러니 쓸데없는 감정 낭비 말아. 그렇지 내가 그리운 건 옛 선화동의 그 아이지.
예스러움과 현대미를 어중간히 간직한 선화동에서,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젊은 가장은 아닌 거지.
이어폰 속 곡의 트랙에서 ‘Porz Goret’이 다시 나온다. 멍하게 창밖을 바라보며 감미로운 선율에 젖는다.
우울함을 떨치러 더 밝고 편안한 나의 아지트, 어린 시절로 퇴각한다. 나도 모르게 그 봄날로 가 있다. 분홍색 원피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대문 밖의 소년을 맞이한다. 향긋한 장미 정원으로 다정하게 인도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