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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램즈이어 Jul 08. 2023

한 번만 더

<마곡사의 바람> twin fiction

 남편이 출장을 가고 주말을 맞이하는 금요일 저녁이면 꿈같은 나만의 시간이다. 윤슬이를 재우고 리슬링 한잔에 라메르 폴라르 쿠키를 담은 쟁반과 함께 음악방으로 잠적한다. 혼자 있으니 잠적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지만 비밀리 만나는 사람이 있으므로 그 단어를 써야겠다. 남편에게 보복이라도 하듯 그 방에서 가끔 몰래 만나는 사람이 있다. 고급 사양의 음향기기로 베토벤과 드보르작, 쇼팽을 시작으로 가을 방학 Porz Goret 공일오비의 곡을 듣다 결국 나얼의 <한 번만 더>로 끝이 난다. 그 곡은 정확히 우리의 마지막 모습이니까.

     

멀어지는 내 뒷모습을 보면 떨어지는 눈물 참을 수가 없다고

그냥 돌아서서 외면했던 바보. 그 초라한 어깨가 너무 슬펐다.

이젠 다시 볼 수 없을 거란 인사에

내 눈에 하염없이 흐르던 눈물방울

그는 돌아서서 외면하고 있지만

소리 없는 흐느낌 나는 보았네

    

 재방영 영화를 보듯 그 장면으로 돌아가고 결국 그 상황이 참을 수 없어 허공의 그를 향해 바보 바보를 연발한다. 그는 정말 바보였다. 그리고 하염없이 그 바보 이야기가 하고 싶어 진다. 재미가 없어도, 조금 유치하더라도 나의 바보 이야기를 좀 들어주시기를.  

   

 그 바보는 내게 별이었다. 어느 날 내 품 안에 뚝 떨어진 별똥별. 지구의 때가 묻지 않은 최 순수 외계의 광채를 지닌.

 우리는 대학원 동아리에서 만났다. 그 사람은 취업준비 대학원생, 나는 집안의 미술관을 관리하기 위한 미술사 석사 과정이었다. 대학원 동아리가 몇 안되기 때문에 어울릴 사람이 필요한 많은 이 들이 그 동아리에 속해서 느슨하게 들어왔다 나갔다 했다. 사회 봉사 활동도 하며, 어린 대학생들에게 멘토 역할도 하고, 취업 정보도 공유하는 다양한 목적의 특색 없는 동아리였다.

 여학생들에게 그곳이 매력 있었다면 괜찮은 남학생이 몇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도 그들 중 하나였다.

 잘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어떤 매력이 있었고 얼핏 자유로운 영혼처럼 보이지만 술 담배는 멀리 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늘 때거지로 그 사람과 함께 이야기했다. 평소 말이 없는 그가 가끔 자신은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오히려 아주 무심한 듯) 고단수 위트와 농담을 던질 때 좌중은 폭소로 자지러졌다. 그는 무척 영리한 사람 같았다. 그래서 고독해 보이는 그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그 주변에는 늘 아이들이 모였다. 그 미소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가 아주 드물게 한 번씩 웃을 때, 그 순수하고 천진한 표정을 한번 보았다면 남자든 여자든 마음이 움직이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리라.

 우리는 가끔 눈이 마주쳤지만 그 사람은 모든 여학생들에게 동일한 관심과 예의를 보이는 것 같았다.

 어느 날 회식 후 2차에서 그가 이상하게도 술을 계속 마셨다. 모두들 의아해하며 다소 걱정하기도 했다. 그날따라 여학생들이 하나 둘 무슨 일로 자리를 비우고 우연히 남학생 몇과 그 사람과 나만 남게 되었다. 그는 친구들에게 자리를 잠시 비켜 달라고 부탁하더니 둘만 남게 되자 중요한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그는 많은 말을 지껄였다. 그 답지 않게 농담은 한마디도 안 했다. 취해서 횡설수설하는 가운데 한 가지로 요약되는 사실은 그는 나를 만나기 위해 동아리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내 얼굴을 볼 수 없다면 이 동아리에서 웬 시간낭비를 하고 있겠느냐는, 일종의 고백이었다.

 그의 친구들과 함께 점점 꼬꾸라지는 그를 부축해서 택시를 태웠다. 취하지 않은 채 집에 돌아온 나는 엎치락뒤치락 그날 밤을 지새웠다.

'취기가 올라, 앞에 앉은 여학생에게 뭐라고 한 거겠지.'

'취중에 진담이 나온다는데….'

다음날 마지막 강의가 끝나고 인문관을 나서자 근처에서 그가 불쑥 나타났다. 나를 보더니 평소의 그 답지 않게 얼굴이 붉어졌다. 정식으로 두 사람이 식사를 한번 하자는 거였다. 할 말이 있다면서. 어제 주정을 부려 미안하다고 덧붙이며.

'제대로 사과를 하려는 모양이군. 취중에 헛말 했다고.'

 그날 저녁의 레스토랑은 비싼 곳이었다. 그리 넉넉해 보이지 않는 그 사람에겐 어울리지 않는. 그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다소 떨리는 음성으로 정식 고백을 했다. 취하지 않고 온전한 정신이라면서.

그렇게 우리의 1일이 시작되었다.

그는 첫날부터 외계인에 걸맞게,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했던 이야기를 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건 기적이야.”

 하도 자주 말해서 어느 날 부탁해야 했다. 그 여우 멘트 고만 좀 하라고.

 우리는 많이 걷고 많이 웃었다. 아마도 쉴 새 없이 웃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마음이 기가 막히게 통해서 웃고, 행복감에 웃음 짓고, 그의 고 단수 위트에 깔깔거렸다.

 그렇게 화창한 나날이 마냥 계속되었다니….

 분명 흐린 날도 있었겠지만 우리가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비 오는 날은 빗소리에 충만했고, 흐린 날에도 회색 구름에서 빛나는 뭔가가 내려왔고 달빛은 달빛대로 찬연했으니까.

 그림과 음악은 예술의 모든 비밀을 우리 두 사람에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는 유명한 그림의 화가 이름이 나 명화의 제목을 잘 알지 못했다. 음악도 마찬가지로 기본적인 명곡의 제목도 몰랐다. 그렇지만 이해하고 즐기는 수준은 그 모든 이론에 빠삭한 나를 능가했다. 요즈음 곡은 그 사람이 더 많이 알아서 이어폰을 한 줄씩 나눠 끼고 함께 들었다.

 여자를 사귀어 본 적이 없는 그는 데이트 방법이나 장소를 잘 몰랐다. 우리는 그저 덕수궁 돌담길이나 인사동 삼청동 주변을 맴돌았다. 그는 몹시 미안해했지만 사실 그것이 내 취향이었다. 친구들에게 늘 너무 고지식한 애어른이라고 놀림받았던.

우리의 만남, 우리의 사랑은 그렇게 완벽하고 거침이 없었는데….

에드거 앨런 포와 에나벨리처럼, 천상에서 반밖에 행복하지 못한 천사의 시샘을 유발했던 것일까?

 

 어느 날 그 사람이 뭔가 들뜬 기분으로 내게 소식을 가져왔다. 유수 대기업에서 합격 통보를 받았다며. 그날 그의 지구인 같은 모습을 모고 내 장래가 조금 안심되어 내 마음도 덩달아 업 되었다. 저녁에 내친김에 부랴 부랴 엄마에게 내 남친 소개를 했다. 자랑 스러이 경쟁이 치열한 회사에 취직도 되었다고 덧붙이며.

 엄마의 실망 어린 표정을 잊을 수 없다. 아버지의 부(富)가, 이름 있는 중견기업의 CEO라는 직함이 우리 사랑에 방해가 될 줄을, 내 인생에 장벽이 될 줄을 꿈엔들 알았으랴.

 엄마는 연애와 결혼은 별개라는 말만 하고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았다. 마음이 좀 불안해졌지만 앞으로 남은 날이 많으니 차차 설득해 보자는 생각을 했다. 또 나의 든든한 아군, 딸바보 아빠가 계시니까. 남은 날이 많지 않다는 것을 그때는 잘 몰랐다. 마음 한구석에 근심의 구름이 한 조각 얹혔다.

 나의 가장 깊은 구석까지 꿰뚫고 있는 그가 어느 날 내게 무슨 일이 있는지 물었다. 모든 일에 백 프로 투명했던 나는 엄마의 뉘앙스를 전했다.

 "확실한 네 편 내가 있잖아. 걱정 마~" 그는 쿨하게 넘어갔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그런데 그의 마음이 괜찮지 않다는 것을 그때 감지했어야 했는데….

  그가 이런 이야기를 할 때부터 눈치챘어야 했다.   

“남아프리카에 나미브라는 바다와 맞닿은 사막이 있어. 사막이 점점 커져서 결국 바다에 이르렀대. 꼭 너와 내 이야기 같아.”

“사막과 바다가 결국 만났잖아? 무슨 걱정?”  철없이 천하태평했던 대답.

 나보다 어린 사촌 여동생 결혼식 날이었다. 우리 테이블에서 오랜 아버지 지인 가족을 만나 오랜만에 즐겁게 인사를 나누었다. 유수 법조계 가문의 그 집 오빠는 고등학교 때 내 수학과외 선생으로 우리 집을 드나들었다. 성격 좋은 명문대 대학생 오빠라 고등학교 때는 따랐지만 대학 입학 후에는 거의 잊고 지냈다. 미남 얼굴이었으나 내 타입은 아니었다.

 저녁 식사 때 엄마가 그 오빠 이야기를 꺼냈다.

"이번에 사법 연수원 수석 졸업하고 판사 발령받을 거란다."

 인물 좋고 사람 좋아 인기가 많은데 막상 데이트는 잘 안 하며 일만 열심히 하는 타입이라고 칭찬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그 집에서는 네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야. 현석이도 너 이야기만 한대."

 엄마의 들뜬 표정을 보며 회춘하는 약이 있다면 엄마께 드려 오빠와 맺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날 식장에서 나의 옷맵시를 과도히 칭찬하는 현석 오빠 어머님의 멘트가 어떤 의미를 지녔을 줄이야.

 큰일 났다.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한담.

 그에게 차마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감출 수 없는 내 표정 때문이었다.

 아버지께 호소하자는 계획을 세웠다. 늘 내 이야기를 존중해 주셨던 아빠께 말씀드려 그 사람을 한 번만 보여드려 보자. 같은 남자니까 독특하면서도 반듯한 그 사람을 알아보리라.

 그날 점심을 들면서 아버지 기분을 살펴가며 운을 떼었다.

"아버지, 저 사귀는 사람 있어요."

"어? 그래? 한번 이야기 들어보자."

 대기업 입사 합격이 된 상태예요.

 대기업? 부모님 뭘 하시니? 어디서 살고?

 정확히는 모르는데 무슨 건축 사무실을 운영하시는 것 같아요. 홍은동 살구요.

 응, 그래?

 아버지는 더 이상의 호구 조사를 하지 않았다.

 그 사람 많이 사랑해요.

 아빠는 천천히 담배를 한대 피워 물더니 한마디만 덧붙였다.

 그런데 사랑은, 마음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야.

 예?

 그 사람을 한번 만나 달라는 말은 목 근처에도 올라오지 못했다.

 무슨 살 집이 있어야 했을까? 신혼의 어떤 주거 계획이 있었을지라도 아버지 마음에 차지는 않았으리라.

 아무리 생각해도 객관적으로 대한민국 일등 신랑감의 조건을 갖춘(내가 알고 있는 기막힌 매력을 모두 뺀다 해도) 그 사람을 단 칼에 거부하는 것은 이상해도 한참 이상한 일이었다.

 

르누아르의 <점심 후: after the luncheon>

 알고 보니 집안끼리는 오랫동안 이야기가 오간 모양이었다. 특히나 오빠가 나를 점찍었다고 한다.

 부모님은 기업을 가진 집안은 사돈으로 법조계 가족이 최고라 패러다임에 갖혀 있는거 같았다. 이 모든 일의 선봉인 엄마가 미웠고, 얼굴을 보면 속이 메슥거려지기 시작했다.


 마곡사의 데이트를 잊을 수 없다. 숲과 시내와 새들이 우리 둘레에서 온통 사랑 노래를 들려주었으니까. 그들의 축복과는 반대로 그 후 우리는 이별을 향해 가속도로 치달았으니까.

 아담한 호수는 어느 작곡가의 정경 선율을, 숲 속 나무들은 바흐의 화음을, 산寺 곁의 개울은 명랑한 멜로디를 들려주고 있었다.

 징검다리 위를 흐르는 시내의 잔물결이 빛에 일렁이며 반짝였다. 갑자기 이 세상 나라가 아닌 새로운 세계로 그와 내가 순간 이동을 한 기분이었다. 찬란하지만 은은한 빛 속에 우리의 일치된 마음만이 흐르는 나라, 사랑만이 존중받는 나라. 영원히 그곳에 머물고 싶었다.

 다시 차가운 시냇물 촉감을 느꼈을 때 나는 벙벙해져서 이렇게 예쁜 게 순우리말로 윤슬이라고 알려줬다.

 그는 처음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대강 웃으면서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서쪽으로 기우는 햇빛 속에서 그의 눈동자가 기묘한 색채를 띠고 멍하니 꿈꾸는 것 같았다. 몇 초간 말없이 서로의 눈만 바라보았다. 까마득한 대학 초년시절, 유럽 어느 유스호스텔에서 여자아이들이 하던 수다가 떠올랐다. 독일남자의 푸른 눈동자가 멋지다느니, 스페인 남성의 에메랄드빛이 최고라느니. 그 애들에게, 아니 할리우드 유명 감독님들께 갑자기 소리치고 싶어졌다. 한국 남자의 흑갈색 눈동자를 제대로 본 적이 있느냐고. 그 신비함과 깊음을 아느냐고.

  그날 데이트는 실망으로 끝났다. 나는 어떤 담판을 기대했었으니까. 우리 한마음으로, 사랑 하나로 그 모든 것을 뛰어넘자고, 헤쳐 가자고, 어떤 맹세를 하고 헤어질 줄 알았다. 그는 시종일관 내손을 굳게 잡았건만 말이 점점 없어지더니 나중엔 조용했다.

 답답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오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바보야. 바보.

 듬성한 첫 눈발 속에 헤어지던 날도 그의 등을 향해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바보야 바보.

 이렇게 내 손을 놓다니. 나를 포기하다니. 날 사랑하면서.

 그날 그를 보내고 나는 직감적으로 확신했다. 되돌릴 수 없는 최악의 결정을 했다는 사실을. 반대로 부모님은 몹시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그 후 일사천리로 진행된 약혼과 결혼식은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다.  비틀스의 <예스터 데이>가 내게 새롭게 다가왔다. 사랑은 더 이상 할 수 없는 게임이 되었고 지난날이라는 것이 갑자기 찾아왔으므로. (Yesterday, love was such an easy game to play. Yesterday came suddenly.)

 눈 오는 날이면 낮엔 이치현과 벗님들의 <사랑의 슬픔>을, 밤엔 짙은의 <첫눈>을 들었다. 이 노래도 딱 우리가 헤어지던 날의 모습이다. 눈 오던 날의 이별을 노래하는. 나도 안다. 사랑을 잃은 사람들은 모든 유행가 가사가 자신의 이야기처럼 들린다는 것을. 친구들이 너는 하루 한날 노땅들 노래만 듣냐고 놀리는 것을.

 오빠와 함께하는 미술관, 음악회 데이트는 참 특이했다. 나보다도 훨씬 더 미술과 음악에 조예가 있어서 그 많은 화가들과 작곡가들 이름을 알았으나…. (심지어 FM에서 클래식이 흐를 때 누가 연주하는 어느 작곡자의 몇 악장까지 정확히 맞추었다.) 진정으로 예술을 사랑하며 향유하는지 의심이 갔다. 예술도 그에게는 삶에서 하나의 자랑, 치장거리처럼 보였다.

 우정으로 시작했더라도 사랑을 쌓을 수 있을 줄 알았다. 남편의 마음이 문제인지, 그의 지위와 훈남 스타일이 문제인지 신혼 때부터 다른 여자가 있다는 걸 알았다. 그의 잦은 외유와 출장은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알 수 없다.

 이 세상의 숨겨진 진실을 깨닫기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먹고살만한 정도밖에 가진 것이 없으나 자연과 예술의 친구인 나의 바보가 진정 부자고, 고귀하며, 고상한 클래스였다는 것을. 아버지는 종이(지폐) 부자였을 뿐이고 남편은 하급 족속이었다.

 날씨가 부쩍 더워진 지난 주말, 계곡 물을 생각하다 불현듯 태화산 마곡사에 윤슬이와 나들이를 갔다.

주말에도 비교적 한산한 그곳, 푸르름도, 여름날 청량제가 되는 한줄기 바람도 예전과 비슷하다. 그 부드러운 감촉에 옛 추억이 고스란히 실려오며.

 냇가에 발을 담그고 얕은 물살 위의 징검다리를 건너며 윤슬이 와 장난을 쳤다. 윤슬이의 이름이 태어난 곳. 아이에게 그 스토리를 영원히 들려줄 수 없을 것이다. 햇빛에 반짝이는 물살을 바라보며 그 단어를 생각하다가 갑자기 그의 눈빛이 그리워졌다. 별 빛 같던 눈동자. 가물가물하며 생각이 잘 안 난다. 슬퍼지려 한다. 석양을 받아 빛나던 그 얼굴을 그려 보려 고개를 들었을 때, 시야에 한 사람이 들어왔다. 조금 멀리서 대웅전을 서성거리고 있는 그와 무척이나 흡사한 모습의.

 쿵쾅쿵쾅 뛰는 가슴. 그 남자가 뒤 돌아보기를, 이쪽으로 오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꿈쩍을 안 한다. 마음속으로 내기를 한다. 10초 안에 그 사람이 고개를 돌리고 우리 쪽으로 온다면, 온다면, 이번에야 말로 기필코 그를 붙들리라. 그의 손을 놓지 않으리라.

 하나, 둘, 셋 ---- 열.

 미지의 사람이 다른 방향으로 발걸음을 뗀다.

 눈물이 앞을 가린다. 큰 소리로 그 사람을 부를 뻔했다.   


헤이!

한 번만 나의 눈을 바라봐

그대의 눈빛 기억이 안 나

이렇게 애원하잖아

헤이!

조금만 내게 가까이 와 봐     


풍덩.

"앙~ 엄마! 나, 빠졌어~"

 아이의 발이 미끄러진 것도 몰랐다.

 돌아오는 길에는 진이 모두 빠져 운전이 몹시 힘들었다. 그러기에 그곳엔 가는 것이 아니었는데. 골방에서 만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는데. 헛게 보이니 큰일이다. 정신을 차리자.

 저의 바보 이야기를 이만 끝내련다. 여기까지 들으셨으니, 이 모든 일을 다 아셨으니 모두들 눈치채셨으리라. 진짜 바보는 저라는 사실을.


---

작가 노트:     

7월 7일 존경하는 두 분 작가, 배대웅 님과 일상 다반사님이 각각 픽션 <마곡사의 바람>과 에세이 <한 번만 더를 한 번만 더 듣고 싶다>를 올렸습니다. <한 번만 더> 곡을 이승기, 나얼 버전으로 들으니 저 또한 작가님처럼 무어라 정의하기 어려운 요동치는 감정을 느꼈습니다. 원작자 박성신 님 곡을 듣자 더욱 애절해져서 제 마음 깊은 곳에서 뭔가가 솟아 나와, 그대로 <마곡사의 바람> 여주인공이 돼 버렸습니다. 영감을 주신 두 분 작가님께 감사드립니다.


제목의 그림:  금발의 소녀 (Girl with Blonde Hair) by  Helene Schjerfbe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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