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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램즈이어 Jul 15. 2023

시인의 집에서

정오의 쇼팽 왈츠 7번

 이과 모범생인 나는 비 오는 날, 빗소리를 하염없이 듣는 것을 좋아한다. 마음이 차분해져서 좋고, 계속 듣다 보면 언젠가 무슨 영감이 한 바가지 주르륵 부어질 것만 같다. 꿈에도 그리는 시인이 될지 모른다.

 시인이 된다는 것, 이과생들의 문학에 대한 로망, 이 병은 인생 후반에 가까울수록 점점 도진다.

 글 쓰는 사람들 속에 끼게 되면 괜히 랭보부터 들먹인다. 취한 배 어쩌고 하면서. 어려워서 몇 편 읽다 말았으면서 자꾸 그러는 것은. 자랑하고 싶어서라기보다 계속 그를 들먹이다 보면 감성 몇 조각이 떨어질 것만 같은 착각에.

 비 오는 날은 빗소리에 집중하기 위해서 다른 음악을 듣지 않는다. 그런데 어제 예외 사건이 생겼다. 삼일 내내 주구 장창 오던 비. 비 피해 입은 사람들 생각에 죄책감도 느끼며 비의 운율을 듣다 잠깐 잠이 들었다. 정신이 드니 비가 잠시 소강상태로 하늘이 조금 환해있다. 비도 염치가 없나 보다. 그때를 이용해서 산책을 나갔다.

 정오를 알리는 시계탑, 어디선가 쇼팽 왈츠 7번이 들린다. 마음 울리는 선율이라 귀 기울인다. 이곡도 계속 듣다 보면 시인이 될 것만 같다

 골목에서 피아노 소리에 멈추었던 피천득 선생처럼 그 근방을 서성이며 음을 좇아 걸어가 본다. 가끔 틀리기도 하면서 왈츠가 되풀이된다. 점점 소리가 커지고 거의 그 집 앞에 이르렀다. 키 작은 관목으로 담장을 한 정겨운 단독주택이다.

 수국 백일홍 등꽃 가득한 정원, 초록을 뚫고 나오는 낭랑한 음표들, 참으로 운치 있는 곳이다. 덩굴장미로 만든 아치가 있다. 대문 역할을 하나보다. 명패에 걸린 글자.

‘담이 있는 시인의 집’

음! 어쩐지 분위기 있다 했더니…. 그런데 좀 이상하다. 담이 없으면서 담이 있다니.

 안에서 명랑한 말소리가 들린다. 영어 같기도 하고 프랑스어가 들리는 듯도 하다.

 모르는 집이지만 새 나오는 음악과 식물을 바깥에서 잠시 즐겨도 될 것 같다. 피아노 연주가 그치면 돌아갈 거니까. 

 저만치서 후줄그레한 중년 남자가 이 집을 기웃거리며 허둥지둥 다가온다. 막걸리 한 병과 무슨 자루 하나를 들었다. 나랑 눈이 마주치자 그가 묻는다.

“아줌마도, 아니 시인님도 이 집에 초대받았나요?”

“아니, 저는 그냥. 지나가다….”

“시를 좋아하세요?”

“네 조금은요.” 시인이 되고 싶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누구를 가장 좋아하세요?”

“천상병 시인이랄지, 백석이랄지….”

“흐음~” 그가 빙긋 웃는다. 어디선가 낯익은 미소다.

 그는 아치에 들어서려다 말고 다시 내게 말을 붙인다.

“함께 들어가실래요?”

“어떻게 남의 집엘….”

“제 친구라고 하면 돼요. 조그만 생일 파티가 있는데, 우리 또래 연배도 필요합니다.”

 우리 또래? 이 아저씨는 나랑 자신이랑 비슷한 나이로 생각하나? 내가 그렇게 나이 들어 보인단 말인가? 속상하지만 현실을 인정해야겠지. 그는 발랄한 장미 넝쿨을 지나며 이 댁 시인이 해마다 생일날 두 외국 시인을 초대한다고 알려 주었다. 자신은 깍두기로 가끔 초대받는다며.

 널따란 창으로 뜰이 내려다보이는 방 한가운데 스타인웨이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 있다. 음악 방일까? 거실일까? 쇼팽 선율이 영롱한 것은 고급 피아노도 한몫했으리라. 생일 케이크 중심으로 갖가지 싱싱한 과일과 다과가 준비되어 있다.

 삼십 대 선남선녀 세 명이 진지하게 이야기 중이다. 세 사람을 보면서 깜짝 놀랐다. 외모가 출중해서다. 그들의 섬세한 분위기를 감지하지 못했다면 배우들이 모인 것으로 착각했으리라. 세 사람은 영어, 프랑스어로 이야기하고 있다. 영어는 가끔 귀에 들어오고 프랑스어는 택도 없다. 쪽팔림. 이 허름한 아저씨만 아니라면 당장 돌아갔을 것 같다.

 이 쪽팔림이 외모와 언어실력의 열세에서 오는 것일까? 꼭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 어떤 고아함에 압도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능력에…. 투명한 공기까지도 선명하게 색깔을 입히고, 재미있는 수다에 동참시키고 있는.

  아저씨를 부른 이유를 알았다. 이분이 들어가자 대화 속의 묘한 긴장감이 누그러지며 뭔가가 환해졌다.

 “아! 천상병 시인님. 어서 오세요!” 그중 동양 여성이 한국말로 반긴다.  

천상병?! 아~ 이런.

여긴 꿈속이구나. 어쩐지.

“좀 늦었습니다. 제가 좀 바빠서…. 얼른 생일 선물만 두고 금방 갈게요. 양해 부탁해요.”

 나도 빨리 이 비현실을 벗어나자. 그런데 가만…. 잠시 구경만 좀 하고.

 천 시인은 막걸리 병을 탁자에 놓으며 거기에 이미 놓인 두 상자를 눈여겨보았다. 나도 따라서 찬찬히 살폈다.

 불어의 모음들로 장식된 상자에는 ‘<영리함> 랭보로부터’라고 적혀있다.

 붉은 튤립이 놓인 상자에는 ‘<감수성> 실비아로부터’라고.

 이 계절에 튤립이라니. 역시 꿈속이다.

 랭보와 실비아 플라스! 얼마나 놀라운 손님인가? 지금까지 꿈에서도 만나보지 못했다.

“흠 대단한 선물들 가져오셨군. 나도 좀 준비했지!”

 천 시인은 두 상자에 요동하지 않고 자랑스레 자루에서 주섬주섬 선물을 꺼내 탁자 위에 나란히 놓았다.

 구름과 이슬 무늬 상자에 쓰인 글씨는 <아름다운 소풍 사는 법>

 그게 다가 아니었다. 이어서 웽하는 소리와 함께 나방 같은 물체가 두 개 튀어나왔다. 가만히 보니 작은 날개가 달린 꼬마 여자아이 모습이다.

“와! 팅커벨이다.”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맞아. 애 이름은 <새벽빛> 재 이름은 <노을빛>이야.” 두 애들은 벌써부터 지지직 촐랑거리며 은가루 금가루를 주인공에게 뿌리고 있다.

“와우, 시인님! 참 기발하세요.” 주인공이 방긋 웃으며 좋아한다.

 다른 두 젊은이도 도도한 표정이 금세 동심으로 바뀌며 부지런히 두 요정을 좇는다. 자신들의 비범함으로 곧장 피터 팬으로 변할 수 있다는 듯이.

 아이쿠, 부러워라. 그치만 구경 끝났으니 어서 사라져야겠다. 잠을 깨자. 아, 그런데 깨지지가 않네. 빨리 도망가야 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내게로 시선들이 옮겨 온다. 뭐 준비한 것도 없는데 어떡한담.

사람들은 선물 보다 내가 누구인지 미심쩍은 표정이다. 침입자가 온 것을 이제야 알았다는 듯.

 결국 주인공이 천 시인을 향해 묻는다.

“친구 분도 시인이신가요?”  

“이분도 시를 좋아하고 내 팬인 것 같아서….”

 설명이 궁색해지니 나도 얼른 가세했다.

“저, 아직 정식 시인이라 할 수는 없지만. 브런치에서 사람들이 댓글 시인이라고….”  

 무슨 말인지 모르는 눈치다.

“아프면서 아름답나요?”

 이건 일종의 심문인가? 시인의 집에서는 뭐든 색다르네.

 음~ 아름다운 것은 할 수 없다. 그런데, 천 시인님 얼굴도 뭐….

 다행히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저 아파요. 걱정병과 수면장애 앓고 있습니다. 자낙스, 스틸녹스 자주 먹어요.”

 사람들 얼굴에 약한 미소가 떠오르며 경계심이 흐려지는 눈치다. 이때다 싶어 재빨리 내가 줄 수 있는 선물을 떠올렸다. 흠, 나는 <따뜻함>과 <우정>을 선물할 수 있어. 그런데 상자가 없네. 예쁘게 포장을 해야 하는데.

 쇼팽 왈츠 피아노 소리를 따라 우연히 걸어온지라…. 

 어떡한담? 고민하며 땀을 뻘뻘 흘린다. 지금이라도 집에 가서 포장 상자를 ….

  

띵동.

초인종 소리에 벌떡 깨났다. 휴 다행. 그렇지 꿈속이었지.

“누구세요? 곧 나가요.”

“정수기 점검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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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유담 작가님의 브런치 <실비아 플라스를 읽다가> <정오의 희망곡? 그래, 미망곡> <랭보처럼 살기엔 이미 글렀으니까>를 읽고 지어본 픽션입니다. 영감을 주신 작가님께 감사드립니다.


제목의 사진: 프랑크푸르트 괴테하우스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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