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특색 있는 한 부분만 알고서 그 사람을 전부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야 하는데, 그동안 노르웨이 화가 뭉크에 대해서 그랬던 거 같다. 에드바르트 뭉크 하면 곧장 그의 그림 <절규>가 떠오른다. 그림을 처음 봤을 때 흠칫 놀라고 어떻게 이렇게 그릴 수 있을까 생각했다. 붉은 노을을 보며 한 번도 부정적인 감정을 느껴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황혼 아래 해골 같은 얼굴은 참 이상하다. 자연을 뚫고 들려오는 절규에 귀를 막을 수밖에 없었다니.
평생 뜨개질하는 여인네나 독서하는 남자만을 그릴 수만은 없지 않은가? 하면서. 불안한 현대 사회의 군상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죽음을 담담히 마주한 그림을 보노라면 어떤 실존주의적 이야기가 들리는 것 같다. 능숙한 작가라면 그림 하나에 긴 산문 한편을 거뜬히 펼쳐낼 것이다.
이번 함부르크 미술관에서 색감이 고운 어느 채색화 옆에 뭉크 이름이 붙여 있는 것을 보았다. 비교적 평이한 분위기라 의외였다. <다리 위의 소녀들><마돈나><부둣가의 소녀들>이다.
십 대 애들은 다리에서 물끄러미 강물에 한눈이 팔려있고 해변을 몰려다니고 있다. 긴 스커트의 소녀들을 밝고 부드럽게 스케치해서 선명하고 명쾌한 감흥이 일었다. 일상의 정겨운 풍경인 듯한 이 그림들은 어떤 심리학적 긴장감이 없다.
짧은 서사가 들려오는 것 같기는 했다. 소녀들의 무리 속에 한 아이가 홀로 다른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전체적인 구도에서 단조로움을 피하려고 했는지, 그 아이의 마음속 갈등을(예를 들면 왕따를 당하고 있달지) 표현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마돈나>는 여성 누드의 아름다움을 열정적인 붓터치로 그려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별생각 없이 차례로 한 사람씩 그 작품과 나란히 사진을 찍었다. 미술사학자인 박사님(남성 인솔자)이 그 여인처럼 한 팔을 뒷머리에 괴고 다른 팔은 허리뒤로 얹은 포즈를 취해서 모두의 웃음을 자아냈다.
집에 돌아와서 뭉크의 다른 작품들을 찾아보며 공부하다가 <마돈나>가 많은 논란을 표현해 낸 작품이라는 걸 알았다. 성을 테마로 했지만 사랑과 출생과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뭉크는 <마돈나>를 5개 버전으로 그리면서 여자의 사랑은 육체적인 것이 아닌 정신적인 죽음과 동등시되는 것임을 말하고자 했다고 한다. 해설을 읽고 난 후 핸드폰에 담은 그림을 다시 보니 역시 뭉크의 메시지- 극적인 내면을 표현하고자 하는- 를 뿜고 있는 듯했다.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starry night>과 같은 제목의 그림도 찾았다. 고흐 보다 30여 년 후의 그림이라 그를 따라 하고 싶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와는 전혀 다르게 푸른 밤하늘의 색채와 도시의 매력을 보여주고 있다. 언젠가 오슬로에 간다면 뭉크 미술관을 찾아 이 그림 앞에도 서 보고 싶다.
<별이 빛나는 밤> 1922~19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