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종로기획』 창립>
1.
인왕산 개나리꽃이 활짝 핀 날이었다.
노란 꽃잎이 봄바람에 흔들렸다. 꽃은 가장 먼저 피고 가장 먼저 진다.
그날, 종로기획은 무악동에서 태어났다.
남자는 종로구청에서 받은 신고확인증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하얀 종이 위의 검은 글자들이 또렷했다. 붉은 직인은 조용히 번지고 있었다. ‘종로기획’ 네 글자가 종이 위에서 숨 쉬고 있었다.
종이는 가벼웠지만 손끝에는 무게가 남았다.
그 무게는 종이의 두께가 아니라 지나온 시간의 두께였다.
개나리는 봄을 알린다.
종로기획은 남자의 또 다른 봄이었다.
2.
꽃은 피고 진다.
시간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
친구들은 여행을 다니라고 말했다.
꽃이 필 때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남자는 늘 일 속에 있었다.
정해진 시간에 움직였고, 맡은 일을 끝까지 해냈다. 일과 놀이는 늘 서로 다른 길에 서 있었다.
이제는 벗어나도 될 때가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나 몸에 밴 습관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책상 위에 확인증이 놓여 있었다.
아무것도 없던 자리와 시작된 길 사이에 한 장의 종이가 놓여 있었다.
아직 쓰이지 않은 책들이 뒤편에 서 있었다.
보이지 않는 그림자들이었다.
종이 한 장이 문지방이 되었다.
그 문턱 앞에 남자가 서 있었다.
3.
"욕심 좀 내려놓으세요."
아내의 말이 떠올랐다.
남자는 오래 일해 온 사람이었다.
신문을 돌리며 공부했고, 직장에 다니며 야간대학을 다녔다. 밤과 낮이 뒤섞인 시간 속에서 그는 버텨 왔다.
부족함은 늘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더 배우고 싶었고, 더 인정받고 싶었다.
근심이 밀려올 때마다 그는 일 속으로 들어갔다.
일은 걱정을 밀어내는 가장 쉬운 길이었다.
‘신고확인증’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 말은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머물던 이름 같았다.
밤마다 고쳐 쓴 문장들이 종이 뒤편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쓰이지 않은 책들이 어둠 속에서 조용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
4.
사람들은 책을 읽지 않는다고 말했다.
출판사는 돈이 되지 않는 일이라고도 말했다.
남자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돈이 전부인가.
손해를 알면서도 시작해야 하는 일이 있다.
그것이 살아가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지하철 안을 떠올렸다.
사람들은 모두 손안의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글은 사라지지 않았다. 읽고 쓰는 일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이 종이 한 장이 시작이었다.
첫 인쇄기의 손잡이 같았다.
붉은 직인은 작은 불빛이었다.
그 불빛이 앞으로의 페이지를 밝히고 있었다.
5.
남자는 여러 시대를 건너왔다.
산업화의 시간 속에서 일했고, 정보화의 시간 속에서 배웠다. 이제는 인공지능의 시간 앞에 서 있었다.
살아남아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도시에서 공부했고, 도시에서 일했다.
몸은 늘 앞으로 기울어 있었다.
종로기획의 시작은 선택이면서도 운명처럼 느껴졌다.
남자는 확인증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몸이 조금 앞으로 기울었다.
새로운 길이 시작되고 있었다.
출판사는 건물이 아니었다.
약속이었다.
한 장의 종이는 생각을 남기겠다는 다짐이었다.
‘종로기획’이라는 이름은 앞으로 흘러갈 시간의 방향이었다.
그 방향이 이제 종이 위에서 조용히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