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첫 기억.(친할머니)

by 오토

친할머니. 내게는 낯선 단어다. 내 기억의 맨 처음에 등장하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보통, 할머니는 친할머니를 말한다. 세상의 외할머니들에겐 불공평하게 느껴지겠지만, 그렇다. 하지만 실제 상황에서 이는 어색할 때가 많다. 외할머니와 훨씬 가깝게 살거나 친할머니가 일찍부터 안 계신 경우에 아이들은 외할머니를 그저 ‘할머니’로 입에 달고 살게 된다. 나도 그런 경우다.


친할머니는 내가 국민학교에 입학을 앞둔 1969년 가을, 추석을 지낸 10월 초 갑자기 쌀쌀해진 어느 날 아침에 돌아가셨다. 간밤, 여름을 지나고 눅눅해진 방구들에 오랜만에 연탄불을 들인 것이 화근이었다. 할머니와 함께 방을 쓰던 사촌 형은 불행 중 다행으로 창호지 문을 억지로 기어 나와 살았지만 할머니는 매캐한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셨다.

출근 준비를 마치고 아침 식사를 막 시작하던 아버지는 수화기 너머 비보를 듣곤 표정이 돌처럼 굳어지셨다. 어머니와 외할머니는 갑작스러운 시어른의 사망 소식에 놀라며 아버지의 심기를 살피셨다. 아침상이 차려진 안방과 부엌 사이에 난 문으로 작은 가마솥에 숭늉이 끓으며 흰 김을 무럭무럭 피워 올리고 있었다. 이것이 친할머니가 내 기억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마지막 장면이다.


친할머니에 대한 첫 기억과 마지막 기억의 중간은 이렇다 할 기억이 없다. 무성영화 같은 2-3초 정도의 잔상만 두어 개 있을 뿐. 국민학교 선생님인 아버지는 일요일이면 우리 다섯 식구가 사는 ‘창경원’ 앞 외할머니댁에서 처자식들을 거느리고 남산 아래 필동 할아버지 댁을 자주 찾아뵈었다. 칠 남매의 넷째인 아버지는 대가족을 이끌고 피난 내려온 할아버지와 할머니에 대한 효심이 유난스러울 정도는 아니어도 극진했다. 큰아들인 나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본가의 대문을 맨 먼저 들어서곤 했다. 그러면 대문과 마당을 사이에 두고 마주 바라보는 부엌에서 할머니가 매번 앞치마에 두 손을 닦고 나오시며 “우리 새끼들 왔구나~”하고 반겨 주셨다. 은비녀를 꽂은 쪽진 머리 밑 거무스름한 주름진 얼굴에 환한 웃음을 보이며.


할머니는 가끔 부뚜막이나 부엌 뒤 바위 아래에서 궐련을 피우셨다. 할머니 앞치마에는 커다란 주머니가 있는데, 문득 주섬주섬 뒤져서 궐련과 성냥갑을 꺼내 익숙한 동작으로 불을 붙이고 연기를 내뿜는 모습은 어린 나에게 무척 신기하고 재미난 구경거리였다. 후에 어른들에게 들은 바로는 할머니가 명치끝이 고질로 자주 아팠는데 담배가 통증 완화에 도움이 된다는 권유로 흡연을 시작하셨다고 한다. 아마도 만성위염으로 소화불량이었지 싶다.


나를 반겨주고 재미난 구경거리도 제공했던 친할머니가 나에게 왜 낯선 존재일까. 그 이유는 첫 기억 때문이리라. 내가 세상에 태어나 기억하는 첫 장면에 친할머니와 어머니가 있다. 이른 새벽. 어머니는 경대 앞에서 긴 머리를 빗으며 단장하고 있었고 할머니는 뒤에서 어머니 등께를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며 무어라 야단을 치고 있었다. 고작 너 댓 살이었던 나는 그 장면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처음엔 꿈을 꾸는 줄 알 정도였다. 그러나 비몽사몽이 확연한 생시로 판가름 났을 때 나는 주저 없이 할머니에게 달려들어 어머니에 대한 구박을 온몸으로 막아냈다. 그 뒤의 기억은 없지만 어머니가 포근하게 안아준 느낌은 있다.


내가 철이 들고 그때 친할머니가 왜 그랬는지 물어보고 싶었을 때는 어머니가 이 세상에 계시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버지에게 물어본들 당신의 어머니가 며느리 시집살이시킨 일을 곧이곧대로 말해줄 리도 없을 터였다. 여러 정황으로 볼 때 넉넉지 못한 형편 탓에 금쪽같은 아들을 처가살이시키는 할머니의 속상함과 왠지 모를 불쾌함이 전래의 ‘못된 시어미’를 불러온 듯하다. 워낙 어렸을 때의 일이고 친할머니가 얼마 뒤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 기억이 생활과 관계에서 이어져 어떤 영향을 나에게 준 것 같지는 않다. 다만 내 인생의 첫 기억이라는 상징성이 더 중요하달까. 첫 기억이 유쾌하거나 흐뭇한 것이었으면 좋았겠지만 어찌하랴. 그래도 난 첫 기억에서 ‘엄마’를 지켰고, ‘악당’이었던 친할머니와도 그 후 한 두 해를 재미나고 친하게 지냈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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