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전 막 후(태평산부인과)

by 오토

나는 서울 중구 필동 어느 골목에 있던 ‘태평 산부인과’ 의원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와 내가 며칠 묵었던 입원실 번호도 알았는데 몇 년 전에 그만 잊어버렸다. 일본식 2층 가옥형 건물이었던 의원은 1970년대 초중반까지 그 자리에 있어서 본가에 갈 때마다 오가며 은근히 친밀하게 바라보곤 했다. 1965년이면 집에서 출산하기도 하고 조산소를 이용하기도 하던 시절이라고 들었는데, 정식 산부인과 의사가 있는 의원에서 태어난 것을 보면 나는 꽤나 대접을 받은 장남이었나 보다. 내 태몽은 아버지가 꾸었는데, 땅을 넓고 깊게 파내려 가니 번쩍이는 금부처상 주변에 뱀들이 우글거리며 감싸고 있더란다. 내가 뱀띠니까 좋은 의미의 태몽일까.


부모님은 한 해 전에 결혼해서 바로 나를 가지셨다. 종묘 근처 동원예식장에서 결혼식을 마친 두 분은 대절 택시로 북악스카이웨이를 드라이브하고 팔각정에서 맥주로 기분을 낸 뒤 명동에 있는 호텔에서 첫날밤을 보낸 것으로 신혼여행을 삼았다. 그때 아버지는 경기도 마석지역 국민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서울 사대문 안에서 나고 자란 어머니는 예기치 못하게 신혼살림을 시골살이로 해야 했다. 나중에 내가 중학생일 때 아버지가 근무했던 학교에서 가을운동회에 초대해서 어머니와 따라간 적이 있다. 나는 그때까지도 가마솥이 걸린 부뚜막에서 다 탄 재를 퍼다 광에 수북이 쌓아두고 용변에 사용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른이 되어 생각해 보니 종로 5가 광장시장에서 포목 장사를 하는 외할머니를 대신하여 원남동 기와집에서 수돗물과 전기불로 신식 살림을 살던 어머니가 느닷없는 시골살이에 얼마나 당혹스럽고 고생스러웠을까 가슴 한편이 시렸다.) 그래도 그날 아버지의 하숙집이자 두 분의 신혼집이었던 시골집 뒷마당 닭장 안에서 맛본 달걀의 고소한 맛은 지금도 기억날 정도로 좋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방금 낳은 달걀은 기다려서 굳은 후에 깨뜨려야 할 정도로 껍질이 말랑거리고 따뜻했던 감촉도 아직도 생생하다. 나도 그곳에서 첫돌이 지날 때까지 살았다고 하니 고향까지는 아니더라도 연고지라고는 해도 될는지 모르겠다.


아버지는 피난민이고 실향민이다. 한국전쟁 중 1.4 후퇴 때 온 가족이 어찌어찌 남한 땅을 떠돌다가 서울 수복 후 광화문에서 모여 천막생활을 했다. 그곳에서 나무궤짝들을 모아다가 할아버지와 진외종조부의 솜씨로 밥상, 찬장 등 가재도구를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던 중 당시 여군 장교였던 둘째 고모 덕분에 남산자락 비스듬한 바위 터를 불하받아 본가를 세우게 되었다. 제법 너른 터이긴 했지만 흙이 아닌 바위였고 그마저도 경사진 곳이어서 아버지는 남자 형제들과 달포가 넘도록 곡괭이질을 고되게 해야만 했다. 할아버지는 원래 개성에서 실력 있는 소목수로 맵시 있는 가구를 만드셨는데, 필동에 넓은 집을 짓고 나서는 가구나 합판에 쓰이는 무늬목을 가내수공업으로 생산했다. 사업은 그럭저럭 괜찮았던 것 같은데 그래도 칠 남매를 기르고 가르쳐서 분가까지 시키기엔 벅찼는지 아버지는 마석에서 서울로 전근하고는 처가살이를 시작했다. 아버지는 개성에서 알아주는 송도중학교에 합격할 정도로 공부에 재능이 있었지만 가정형편 때문에 대학 진학을 미루고, 졸업하면 바로 초등교사가 되는 고등학교 과정인 ‘서울사범학교’를 지원, 졸업했다.


외갓집에는 한동안 남자가 없었다. 생선장사를 하시던 외할아버지가 서울에서 퇴각하던 인민군에 끌려가 미아리고개 어디에선가 처형되었다는 풍문만 들려왔을 뿐이었다. 그 후 아버지가 처가에 들어와 살기까지 외갓집에는 외할머니와 두 딸만 살았는데, 외할머니 여동생의 큰아들이 대학 다닐 때 평택 농촌에서 올라와 문간방에 머물렀던 것만 예외였다. 아무튼 외할머니는 사위를 집에 들이고서 아주 든든하셨음에 틀림없다. 더욱이 ‘여성’‘장사치’로서 당시만 해도 인텔리 대접을 받던 ‘남성’‘선생님’이 사위임에야.


어머니는 덕성여고를 졸업하고 살림에 전념하느라 대학공부는 동생인 이모에게 양보했다. 부잣집 맏며느리 감이라는 주위의 칭찬을 받던 어머니는 그에 더욱 부응하기라도 하듯 외할아버지 실종 이후 인심 후한 친척의 도움으로 마련한 작은 한옥을 반짝거리도록 살림을 잘 살아냈다. 그러느라 당시로는 늦은 결혼이었지만, 마흔도 안되어 청상이 된 외할머니에게 효도라도 하듯 번듯한 사위에 외손자 둘과 외손녀 하나까지 안겨드렸다.


이렇게 내가 태어날 무대가 만들어졌고, 나는 마침내 등장했다. 아무런 의도도 계획도 없이. 그럴 필요도 이유도 없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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