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미안!
5월의 아테네는 청명했다. 내 고국에서 보기 어려운 미세먼지 없는 새파란 하늘이 매일같이 열렸다. 해는 뜨겁지만 그늘은 시원하다. 거리에 관광객들이 넘쳐났다. 성수기 7, 8월에는 얼마나 붐빌까. 그제야 아크로폴리스에 무슨 집회하듯 빽빽이 채운 관광객 사진이 떠올랐다. 성수기를 비껴서 온 건 백수 여행자의 특권이다.
알고 보니 그리스는 세계 관광대국 10위 국가라고 한다. 주변에서 그리스로 여행 가는 사람들을 별로 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에서는 그리스행 직행이 없다. 유럽 간다 하면 다들 프랑스나 스페인으로 많이 가길래 그리스를 그저 '유럽 변방의 사그라든 나라'정도로만 알았던 건 나의 오해다. "관광 10 위국 그리스, 몰라봐서 미안!"
나를 그리스로 이끈 지도 한 장
난 왜 갑자기 그리스로 혼자 여행온 걸까. 사정은 이렇다. 친구와 튀르키예 여행을 3주 가기로 했다. 유럽 초입까지 갔는데 튀르키예만 다녀오기에는 항공비 본전 생각이 났다. 그래서 나 혼자 먼저 5월에 출국해서 독일의 딸아이에게 들렀다가 독일과 튀르키예의 어디쯤을 두 주간 여행한 후에 친구와 6월에 이스탄불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기왕 가야 할 곳, 인(IN) 도시 프랑크푸르트와 아웃(OUT) 도시 이스탄불은 정해졌겠다, 두 도시 사이에 두 주간 다닐만한 곳은 어딜까?
'프랑크푸르트-뮌헨-빈-부다페스트-크로아티아-이스탄불'로 로드 트립을 해볼까? 지도를 훑다가 그리스와 튀르키예 사이의 에게만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에게만의 섬 대부분이 그리스 국토가 아닌가. 심지어 튀르키예 남서해안 턱 밑의 섬조차 죄다 그리스 땅이다. 자고로 두 나라 사이의 바다에 떠있는 섬이라면 그리스 가까운 섬은 그리스 땅, 튀르키예 인접한 곳은 튀르키예 땅, 이게 보통의 국경 룰이 아닌가?
그리스 지도(지도 출처 ko.wikipedia.org)
그리스와 튀르키예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 중 사이가 좋은 나라는 없다. 특히 그리스와 튀르키예는 견원지간이라고 한다. 한 때 지중해 동쪽 연안과 에게해의 동네 대장 이었던 이 두 나라는 오랜 기간 동안 힘겨루기해왔다고 한다.
아주 예전에는 에게해의 섬뿐 아니라 지금 현재 튀르키예의 아나톨리아반도 남서 해안 도시들도 그리스 땅이었다. 고대 그리스 땅은 로마의 황금 시기에 로마 치하에 있었고 1453년 동로마 수도 비잔티움(오늘날 이스탄불)이 오스만제국에 의해 함락된 이후로 오스만령 그리스가 된다. 로마 500년에 이어, 400년 가까이 침묵하고 있던 그리스가 오스만제국으로부터 1829년 독립하게 된다.
고대 그리스(지도 출처 namu.wiki) -> 현재 그리스(지도 출처 ko.wikipedia.org)
이후 그리스와 튀르키예는 발칸전쟁과 세계 1차 대전에서 충돌했다. 뒤이어 그리스가 일으킨 그리스-튀르키예 전쟁(1919-1922)에서 그리스가 패하면서 이오니아지역을 튀르키예에게 빼앗기고 에게해의 섬만 그리스로 복속되는 오늘날의 국경이 형성된다.(물론, 튀르키예 입장에서는 오스만 제국 시절 옛 국토의 일부 회복이다.) 그리스 황금기에 비추면 그리스로서는 이오니아 도시들을 회복하지 못한 결과이다.
이 두 나라 간의 얽힌 역사의 실타래는 1923년 인구 교환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국가 간 최초로 맺어진 대규모 인구 교환 조치인 로잔 협정에 의해 '튀르키예 땅 이오니아에 살던 튀르키예어를 쓰는 그리스인' 150만 명과 '그리스 땅 발칸에 살던 그리스어를 쓰는 튀르키예인' 50만 명이 상호 이주하게 된다. 실제로는 상호 추방이나 다름없었고 강제로 국가적 규모의 난민이 되어 각기 자신의 고향에서 생존기반을 잃고 쫓겨나게 된 것이다.
그리스에 갈 이유는 넘친다
이것만 해도 튀르키예 여행 전에 그리스에 갈 이유는 족했다. 그리스 지도 한 장의 이면에 이런 엄청난 과거가 숨어 있었다니! 물론 이것도 인터넷 백과사전을 뒤져 짜깁기 해본 겉핣기에 불과하지만 튀르키예 여행에 앞서 그리스를 여행을 배치한 건 아무래도 괜찮은 선택이다.
거시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리스와 튀르키예는 유럽 기독교 문화권의 동쪽 끝과 이슬람 문화권의 서쪽 끝이 만나 전선을 이루는 곳이 아닌가. 무엇이 되었든 두 나라와 두 문화가 얽혔던 흔적의 파편을 만날 수 있으리라.
사실 그리스는 유럽의 자존심이다. 자신들의 문화의 뿌리를 그리스로 보기 때문에 그리스눈 서양 문명의 원류를 찾아보려는 서양 여행자들로 인기 있는 여행지다. 그뿐 아니다. 에게해와 지중해 연안의 보석 같은 섬들도 사람들을 유혹하고 보기만 해도 건강해질 것 같은 그리스 음식도 그리스 여행을 부추긴다.
또 그리스는 세계 어느 나라 보다도 이야기를 많이 품은 나라가 아닌가.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고대 철학과 사상의 얹저리만 밟아봐도 영광이다. 어딜 가든 생생한 그리스 신화 한 두 토막은 건져 올릴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