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오십까지 앞으로 6개월
완결이 찾아온다. 졸업도 반년, 동아리도 곧 탈퇴, 발행하던 뉴스레터도 시한부 판정을 받으며 일 년의 절반이 지났다. 그런데 완결의 과정이 시원섭섭한 것이 아니라 찝찝섭섭이다. 신점에서 봐준 대로 공부나 했었어야 했는데, 괜히 떠난 바람 잡다가 시간만 버린 것 같기도 하다.(자세한 내용은 신점과 이력서를 참조.) 어찌 됐든 완결이 다가왔으니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준비를 해야 한다. 새로운 곳에서 '나'로 서 있기 위한 일장연설을 가다듬어야 한다. 알맹이는 텅 비었지만, 그럼에도 새로 깃털을 갈고, 몸을 무장해야 한다. 다시 어딘가에 속하기 위해 갈피를 잡고 증명해야 했다. 즉 터닝포인트다.
무언가를 완결 짓는 일은 오히려 간단하다. 익숙해져 있던 포맷을 버리기. 그게 끝이다. 이미 잘하는 것을 그만두는 것이 쉽겠는가, 아니면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이 쉽겠는가. 단연 전자가 쉽다. 완결은 쉽지만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유종의 미를 거두는 것이다. 유종의 미. 중학교 때 국어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유빈아 제발 유종의 미를 거두어다오." 하지만 선생님 그게 가장 어려운 일임을 모르시나요? 꾸준히 하기만큼 세상에서 어려운 일이 있을까요. 그때는 선생님의 부탁이 창피하고 부끄러웠다. 저 충분히 잘했잖아요. 이제 좀 쉬면 안 되는 거예요? 궂은일도 참고 최선을 다했는데 대체 언제까지 참아야 하는 건데요. 하지만 이제는 안다. 완결에서 유종의 미가 중요한 이유. 그것은 완결에 기록이 남기 때문이다.
세상에 완벽한 완결은 없다(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소설이 완결되어도 주인공의 세상이 종결되나? 대부분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것은, 인생이란 것이 단편적 기억으로 뭉뚱그리기엔 지나치게 길고 지루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소설 속 주인공보다 긴 세월을 살 것이고, 그들보다 수많은 단편소설을 완결 지으며 하루를 보낸다. 따라서 완결은 소멸이 아닌 축적이다. 완결로 인해 남은 결과물은 기록으로 남아 여전히 나의 세상을 부유한다. 그리고 세상의 사람들은 종종 완결의 기록으로 사람을 판단하고는 했으므로 완결이란 축복이 아닌 저주였다. 나는 완결의 꼬리표를 가지고 다시 증명을 시작해야 한다. 그러니 끝은 곧 새로운 시작이었다.
그런데 나는 이 증명의 과정이 참 싫다. 다시 어딘가에 소속되어 처음부터 관계를 쌓아 올리는 것도 귀찮고, 이곳에서의 신임을 얻기 위해 성과를 보여야 하는 것도 별로다. 그래서 나는 하나의 일을 오랫동안 지속해 오는 것에 특화된 사람이 되었다. 하나를 꾸준히 잘하는 사람이 아니고, 귀찮아서 새로운 것을 도전하지 않는 사람이라서 꾸준히 했다. 익숙한 것을 잘하는 것은 내 특기니까. 그래서 복수전공도 금세 포기하고 단일 전공으로 졸업하는 것을 선택했으며, 별로 재미있지도 않았던 연극 동아리를 3년 간 했고, 우연한 계기로 시작한 뉴스레터를 2년 간 연재할 수 있었다. 그것은 단지 내가 자기 계발에 미친 사람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외로운 사람이라 성공할 수 있던 업적이다.
복수전공을 들으며 적응하지 못했고, 연극 동아리를 하며 상처를 받았다. 잘하고 싶었지만 잘하지 못하는 영역이 있었고 잘했지만 떠나간 마음을 붙잡지 못한 것도 있었다. 그렇게 뉴스레터를 떠나보냈다. 물론 내가 약 반 오십의 세월을 보내며 완결지은 것이 이것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몇 년 동안 해왔던 것을 꼽아보니 이렇게 세 가지가 남았다. 이십 대의 오 년을 이것들과 함께했다. 모아보니 결국 책이었다. 갈피는 잡았지만 마음이 텅 비는 것 같았다. 완결이란 참으로 씁쓸하다. 그래서 더 찝찝해지지 않도록 유종의 미를 거두자고 생각했다.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선생님의 마음을 알 것 같아 서글프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완결 짓는다. 앞으로 걸을 증명의 길이 아깝지 않도록 노력하고 싶다. 청춘을 보낼 준비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