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앞에서 계산기를 두드리는 젊음에게
연말이라 술자리가 많습니다. 서른 즈음 20대 후반 남자들이 모이면 하는 이야기는 비슷비슷할 겁니다. 이미 취업해 안정을 꿈꾸는 친구, 꿈을 좇아 일상을 바친 친구, 방황하는 친구… 사람마다 처한 상황은 다르지만, 사랑 이야기에는 모두가 눈을 반짝입니다. 누구를 만나느냐, 어떻게 만나느냐, 결혼은 언제 하느냐 하는 대화는 몇 번을 해도 질리지 않습니다.
요새 연애하는 사람 보기가 꽤 어렵습니다. 적어도 제 주변에서는요. 저는 고등학교 선배를 대학시절에 꾀어 7년째 만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결혼까지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제 친구 중 대부분은 연애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연애를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쉬이 알리지 않습니다. 확신이 없어서 그런 걸까요? 여자친구가 있느냐 물어보면, 처음에는 연애하지 않는다고 답하다가, 결국 나중에 털어놓습니다. 사귀긴 사귀는데 아직 공개하기에는 부담스럽다는 겁니다. 왜 부담스러운지는 더 캐묻지 않았습니다. 우정을 위해서는 이 정도 거리가 적당하니까요. 그런데 굳이 묻지 않아도 이유를 알 것 같은 말을, 친구가 꺼냈습니다.
"어렸을 때 만나는 게 참 좋은 것 같아. 다 커서 사람을 만나면 조건부터 보여. 순수한 사랑은 어려울 것 같아."
무슨 조건이냐 물어보니 여러 가지를 늘어놓습니다. 직업, 연봉, 재산, 가족, 학벌, 외모, 취미, 나이 등등... 취하지만 않았다면 밤새도록 말하겠다 싶었습니다. 친구는 어느 순간부터 좋아하는 마음보다 이런 조건들이 더 크게 느껴진다고 말했습니다. 여러 조건 중에서 어느 정도만 만족하면, 사랑하지 않아도 일단 만남을 시작해볼 수 있게 됐다는 겁니다. 만나면서 알아가다 아니다 싶으면 멈추는, 그런 방식의 관계가 꽤나 흔하게 보입니다.
이제 더는 첫눈에 반하지 못할 것만 같다고도, 그 친구는 말했습니다. 그 친구가 불 같은 사랑을 해본 적 없던 것도 아닙니다. 제가 압니다. 뜨겁게 사랑했고 아프게 헤어졌던 그 연애의 역사를 저는 옆에서 지켜봤거든요. 그래서 달리 해줄 말이 없었습니다. '너는 늙어봤냐, 나는 젊어봤다'던 지상렬의 건배사를 처음 듣던 때처럼, 저는 입을 다물기로 했습니다. 조건을 따지는 사랑을 해본 적이, 제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제 조건을 따지게 됐지만, 한때 조건 없는 사랑도 해봤으니까요.
물론 앞날은 모를 일입니다. 모든 걸 잊고 가슴을 두근거리게 할 그런 사람이, 그에게 나타나지 않으리라는 법이라도 있나요? 그 친구를 인생 다 산 사람처럼 후려치기는 싫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가 그러한 감정을 느끼게 됐다는 것, 다시 말해 조건을 따지지 않는 사랑을 이제 다시 하기는 어려운 처지에 놓이지 않았느냐는, 자조 섞인 질문은 충분히 존중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조건을 앞세우며 사람을 만나다 보면 오던 사랑도 도망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숨길 수 없었습니다. 세상에 흠 없는 인간이 어디 있겠어요. 작정하고 털면 먼지 안 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랑을 하면 콩깍지가 쓰인다는데, 그 말이 딱 맞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기로 마음먹으면 흠도 먼지도 안 보이는 법입니다. 아니, 보여도 안 털기로 한다는 말이 더 맞겠습니다. 모든 관계에는 사실보다 믿음이 먼저라는 겁니다. 모든 사실은 믿는 대로 보입니다. 반드시 믿음을 갖게 하는 무언가는 어디에도,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먼저 마음을 열지 않으면 어떤 사람도 그 안에 들어설 수 없으니까요.
어느 순간부터 연애에 조건을 앞세우기 시작했다는 말을, 다른 친구들도 꽤나 진지하게 들었습니다. 다들 한 번쯤은 결혼을 꿈꾸던 사람을 만나던 때가 있었습니다. 친구들이 하나같이 꼽은 결별 사유는, 바로 불가항력적인 조건이었습니다. 사람은 참 좋은데, 결혼할 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근무지가 달라서, 여자친구 가족과 다퉈서, 아직 마땅한 직업을 갖지 못해서, 일에 집중해야 해서, 모아둔 돈이 없어서, 이러해서, 저러해서, 결혼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입을 모아 말했습니다. 몇몇 친구는 아직도 그때의 연인을 사랑하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지금 만나는 사람과 예전의 그 사람을 자꾸 비교하게 되는데, 이건 마음처럼 쉽게 멈추기가 힘들다고도 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저는 생각합니다. 여러 가지 조건을 방패처럼 앞세워 오히려 사랑을 피하는 듯한 요즘의 태도가, 사랑하는데도 헤어져야만 했던 과거의 사건을 반복하기 싫은 마음에서 비롯된 게 아니냐는 거죠. 그런데 하나 더 있습니다. 요즘 친구들에게서 느껴지는 일관적인 태도는 '위험 피하기'입니다. 과거의 사랑과 헤어졌던 이유도, 지금의 사랑을 마다하는 이유도 모두 불확실한 상황에 삶을 내던지지 않으려는 의지에 뿌리를 내린 듯합니다. 연애란, 사랑이란, 더 나아가 삶이란, 기본적으로 모험일진대 그에 뛰어들기를 주저하는 친구들이 제 주변에 많이 보인다는 겁니다. 과거의 아픔을 피하기 위해 철저히 계산해서 위험을 피하려는 태도 말입니다.
혹자는 조건을 따지는 사랑을 어른의 사랑으로 포장하기도 합니다.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학창시절에도 우리는 매우 많은 조건을 따졌습니다. 교복을 입고 뿜어내는 생기, 내게만 보이는 미소, 다정한 눈빛, 수업시간에서 보이는 태도, 친구를 대하는 말투, 옆을 지나칠 때 나는 비누향기, 이런 모든 조건들이 첫사랑이라는 이상을 만들어냅니다. 그 중에 하나라도 모자라면 우리는 사랑에 빠지지 않았을 겁니다. 우리가 때로 그때의 사랑을 동경하는 건, 무모한 사랑에 겁 없이 뛰어들었기 때문일 겁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학창시절이야말로 가장 두터운 보호를 받던 시절이었다고, 그래서 그런 사랑이 가능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몇몇 친구들을 보면 보호받는 환경이 꼭 사랑의 용기를 길러주는 건 아닌 듯합니다. 학창시절에도 여전히 사랑을 주저하는 친구들은 있었습니다. 흔히들 불안정하다고 평가하는 삶을 사는 친구들이 깊은 사랑을 나누기도 합니다. 사랑의 용기에 또 다른 조건을 들이미는 태도는 왠지 비겁해 보입니다.
사랑 앞에 계산기를 두드리는 건 성장의 증표가 아닙니다.
저는 최재천 교수님의 유튜브 영상을 즐겨보는데요. 우리 사회에서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는 일은 손해라고 인정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요즘 출산율과 혼인율이 낮아지는 이유도 우리 세대 사람들이 계산을 많이 하는 데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주장도 흥미로웠습니다. 헛소리로 볼 게 아닌 것이, 사랑과 삶 앞에서 계산기를 두드리는 태도는 제 친구들에게서도 자주 보였던 모습입니다. 게임을 해도 최적화된 진행방식인 공략이나 테크트리를 찾아봅니다. 데이트를 해도 맛집 검색을 하고 가고요, 물건을 사면 비교검색과 후기영상이 필수인 세대입니다. 시험공부를 하더라도 무슨 쌤 강의가 좋다더라, 무슨 교재가 좋다더라. 진로도 안정성을 위한 최단경로에 맞추는 세대가 제가 속한 세대입니다.
당연히 이런 전형적인 모습에 한두 가지씩은 어긋난 모습이 누구에게나 있을 겁니다. 저도 MZ니 뭐니 하면서 여러 사람을 단일한 형상으로 후려치는 태도를 참 싫어합니다. 그래도 여러 친구들의 개별적인 모습을 겹쳐 그려보면, 이런 가상의 인간형이 나타나지 않겠느냐는 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적어도 제가 주변에서 지켜본, 서울에서 중산층 가정에 태어나 공교육과 사교육을 경험하고 대학에 들어가 취업준비에 2-3년을 쓰고 마침내 입사해 30살을 앞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모습이었다는 말씀입니다. 비슷한 이야기를 털어놓는 선후배를 보자 하니 앞뒤로 몇 살을 더하고 빼도 아마 크게 다른 모습은 아닐 겁니다.
삶이 수능의 연장선이 된 듯한 기분입니다. 제 또래 사람들은 모두가 평생에 걸쳐 고시공부를 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미래의 실패한 나를 떠올리고 그가 되지 않기 위해 극도로 경계하는 태도... 삶의 모든 순간을 이익과 손해로 계량하는 모습, 사회의 규칙에 순응하고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는 모습, 평준화된 인간을 목표로 삼고 새로운 도전은 꺼리는 모습이 아마 이런 태도와 연결될 겁니다. 여기서 패배자에 대한 모욕과 승리자에 대한 동경이 팽배해지면, 흔히 능력주의의 부작용이라 일컫는 모습이 나올 겁니다. 그런 모습을 저는 ‘연애의 조건’이라는 표현에서 보았습니다.
사랑은 계산이 될까요? 저는 현대 문명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고대 그리스의 신화에서 답을 찾아봅니다. 아주 오래된 서사시인 헤시오도스가 쓴 <신통기>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맨 처음에 생긴 것은 카오스이고,
그 다음이 눈 덮인 올륌포스의 봉우리들에 사시는 모든 불사신들의
영원토록 안전한 거처인 넓은 가슴의 가이아와
불사신들 가운데 가장 잘생긴 에로스였으니,
사지를 나른하게 하는 그는 모든 신들과 인간들의
가슴속에서 이성과 의도를 제압한다.
사랑은 다른 무언가를 낳게 하는 힘입니다. 세상에 처음 나타난 건 아무 존재도 질서도 없는 카오스, 공허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발붙여 살아가는 땅,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는 가이아가 나타납니다. 세상에 그 둘뿐이었다면 아마 아무것도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사랑, 에로스가 나타납니다. 에로스가 나타나고 나서야 우리가 익히 아는 제우스와 같은 다른 신들이 나타납니다. 사랑으로 카오스가 에레보스(어둠)와, 가이아가 우라노스(하늘)와 맺어져 다른 신들을 낳거든요.
에로스는 신 중에 가장 잘생겼습니다. 여기서 ‘잘생겼다’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칼로스(καλός)는 ‘고귀하다’로도 해석할 수 있는데,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고귀함은 “불운을 침착하게 견뎌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은 어떤 이성과 의도도 무력하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사랑 앞에서는 불멸자인 신도 필멸자인 인간도 바보가 됩니다. 여기에 사랑의 본질이 있습니다. 바로, '계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랑은 계산할 수 없는 운명을 견뎌낼 힘도 줍니다. 물론 콩깍지가 씌여 예측 가능한 쉬운 문제도 못 보는 불상사가 발생하기도 하지만요. 그런데 삶에 예측 가능한 일만 발생하던가요? 우리는 모두가 불운에 던져진 존재입니다. 사랑만이 우리를 불운 속에서 살아남게 해줍니다.
사랑을 바보 같은 욕망으로 폄하하는 태도를 가장 널리 퍼뜨린 건 아마 플라톤이 아닐까 싶습니다. 절제를 강조하는 과정에서 이성의 통제를 벗어난 욕정(에로스)을 크게 비판했거든요. 그렇지만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플라톤의 말은 ‘사랑이 계산 불가능하니 나쁘다’는 비판이 아니라, ‘계산 불가능한 사랑도 최대한 절제해보라’는 권고에 가까웠으니까요. 심지어 플라톤은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게 된 것에 대해서 어쨌든 제일 마음을 쓴다”는 점도 인정했답니다.
핀트가 약간 안 맞긴 하지만, 십 년도 넘은 가요 중에 <사랑의 바보>라는 노래도 있습니다. 여기서 바보는 열심히 돌본 상대방을 다른 이에게 넘겨주라는 의미가 아니라, 풍차에 돌진하는 돈키호테가 되기를 주저하지 말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겁니다. 사랑 앞에서 ‘플러스’ 버튼이 빠진 계산기만 두드리는 몇몇 사람들의 모습이 어쩌면 더 바보같이 보이지는 않을까요? 운에는 불행만큼 행운도 포함되어 있을 테니까요. 사랑이라는 바보 같은 게임에 뛰어든 모든 분을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