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 좋은 애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살아보는 법
0. 내 위로는 6살, 11살 터울의 언니가 두 명 있다. 어렸을 때야 서로 안아주며 사이좋게 지냈을지 모르겠지만 나의 질풍노도 시기 이후로는 데면데면한 사이다. 언니들은 나를 ‘운 좋은 애’라고 부른다. ‘막둥이’로서 받은 게 많기 때문이다. 우리가 별로 친하지 않은 것과는 별개로 언니들은 나를 챙겼다.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내 살 길은 스스로 찾아야 했던 우리는 첫째, 둘째, 셋째 차례대로 독립을 했는데 나보다 6년, 11년 먼저 독립한 언니들은 적당한 타이밍에 나에게 뭔가를 주었다. 등록금, 일할 기회, 지낼 곳, 비싸고 맛있는 음식 같은 것들이다. 언니들은 나를 ‘운 좋은 애’라고 부른다.
1. 샌프란시스코에 언니가 산다. 만나본 적도 없는 엄마의 사촌오빠의 미국 사는 둘째 딸이 아니다. 6살 터울의 “내” 작은 언니다. 언니는 작년에 이 곳으로 왔다. 모두가 부러워할만한 직업을 가지고 번듯한 집에 번듯한 차를 가지고 살고 있다. 언니가 일구어둔 이 빛나는 업적에 나는 14불짜리 최대 3개월 무비자 입국으로 샌프란시스코의 번듯한 집에 살아본다. 게다가 백수다. 나는 운이 좋다.
2. 오늘로 이 곳에 온 지 딱 2주째다. 가족여행을 열흘 동안 했고 엄마 아빠가 가신 뒤로는 이것저것 알아보느라 이제야 브런치를 켠다. 틈틈이 적어둔 메모가 지금 세어보니 58개다. (여행 바이브가 떨어지기 전에 얼른 써야 하는데 한 달 반 전에 다녀온 홍콩 여행 메모 60여 개도 아직 메모장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 늘 그렇듯 번호를 붙여 하나씩 써본다.
3. 그동안 나는 이 곳에 조금 익숙해졌다. 챙겨 온 옷 중에 이 곳에 와서 처음 입는 옷을 꺼내면 서울 집 냄새를 느낄 수 있을 만큼 내 몸에선 이제 이 곳의 냄새가 난다. 38번 버스를 타고 다운타운으로 나가는 길에 더 이상 구글맵을 보지 않아도 된다. 눈에 익은 가게들이 생겼고 학교에 가는 길은 핸드폰을 보면서 걸을 수 있다.
4. “시티컬리지”는 미국 서부 부자들이 설립한 전문대학교다. 서부 곳곳에 캠퍼스가 있고 샌프란시스코에도 여러 개가 있다. 캠퍼스마다 전공이 다른데 모든 캠퍼스에 공통적으로 있는 것이 ESL(English as a second language)이고 이 수업만큼은 NONCREDIT이다. 공짜란 얘기다. 미서부 부자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 덕분에 비자도 없이 미국에 와서 학교를 다닌다. 게다가 운 좋은 애의 타이틀에 걸맞게 여름학기가 시작되는 첫날에 맞춰와서 수업도 바로 시작할 수 있었다.
5. 첫날에는 미리 신청해두었던 레벨테스트를 봤다. 그래도 나름 입학시험이라고 2시간 동안 리스닝, 리딩 나눠서 진행됐다. 시험은 쉬웠다. 한국 수험생 출신이라면 쉽다. 수능 본 지 10년이 넘었는데도 습관이라는 게 아직 남아서 문제를 먼저 쫙 읽고 본문을 읽는다던가 하는 스킬이 자동으로 발동했다. 전체의 흐름을 이해하면 풀 수 있는 문제들이라는 것도 같았다. 다만 본문은 달랐다. 굳이 어려운 단어나 문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한국 수능 영어는 영어를 위한 영어가 아니라 등수를 더 잘게 나누기 위한 문제였구나 싶었다.
6. 첫 등교를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