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가 되면 어엿한 어른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보다 확고하고 노련하게 인생을 살아갈 줄 알았다. 그러나 오히려 인생은 더 모호해졌고, 복잡한 미궁 속에 갇혀있는 기분이다. 그렇다고 치열하고 불안했던, 그만큼 끔찍했던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나는 어제보다 오늘이 좋고, 하루하루에 만족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물론 모든 것에 만족하는 것은 아니다. 불만이 있다면, 그것은 삶을 대하는 나 자신의 태도다.
내가 40여년을 살면서 정립된 삶의 이상이 있다. 그것은 나에게 주어진 조건을 충실히 살아가면서도, 미래에 대한 희망과 믿음을 잃지 말자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태도가 어른을 만들고, 한 사람을 사람답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은 일이다. 나는 종종 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현재를 냉소하고 미래에 절망하며, 누군가를 탓하는 일에 열을 올리기도 한다. 나는 종종 실체는 없지만 누구나 고개를 끄덕여주는 그럴듯한 명분 안에 숨어 안주하려는 유혹에 시달린다. 나라니 민족이니 애국이니 정의니 좌파니 우파니 보수니 진보니 하는 내용 없는 빈 말들을 보라. 나를 흔들어 한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길에서 벗어나게 하는 모습은 대개 그러한 빈 말들에 휘둘려 상대방을 악마화함으로써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 나 자신을 신격화하는 것과 다름없는데, 여기서 말하는 신격화란 자기가 서있는 자리가 역사를 초월해있는 진공상태라고 상정하는 오만함을 말한다.
루쉰은 모든 사람은 ‘역사적 중간물’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말하는 중간물은 단순히 과거와 미래를 잇는 시간적 존재라는 뜻만은 아니다. 우리가 좋든 싫든 우리는 미래를 향해 개방되어있는 동시에, 과거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존재라는 뜻이다. 나는 루쉰의 말을 과거의 운명에 붙잡혀 있는 동시에 미래를 향해 개방되어있는 존재가 인간임을 받아들이자는 것으로 이해했다. 지금의 내 모습이 과거와 상관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여긴다면, 그것은 스스로의 인간성을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단념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미래에 대해 절망하는 것은 스스로를 신의 자리에 올려놓는 것과 같다. 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어떤 사람을 어른이라고 할 수 있는가? 내가 세상에서 타도하고 싶은 악마성이 내 안에도 자리하고 있고 나와 분리될 수 없음을 인정하는 사람이다. 또한 아무것도 보이지 않더라도 다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하여 성급하게 체념하지 아니하고, 뚝심 있게 참고 인내하는 사람이다.
기독교에는 ‘성육신’이라는 개념이 있다. 여기서 성육신에 대한 신학적인 설명을 늘어놓으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을 기독교에서는 굉장히 가치 있게 여긴다는 것이다. 성육신은 우리가 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이 신적인 일이요 거룩한 일임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에 실패하는 것은 지금 나에게 주어진 조건을 무시하고 경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내가 가진 조건을 초월하는 신비한 능력 같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를 붙들고 있는 조건과 자리를 믿음으로 지키는 능력이다. 여기서 지킨다는 것이 다만 이 악물고 버틴다는 뜻은 아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끊임없이 시도하며, 미래를 체념하지 않고 열어놓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은 결코 현실을 인정하고 직시하지 않는 정신승리가 아니라, 오히려 믿음으로 현실을 묵묵하고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하루하루가 그러한 삶으로 충만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