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랫동안 교회에서 설교를 했다. 물론 지금은 하고 있지 않지만, 오히려 설교에 대한 생각은 더 많이 하게 되는 것 같다. 교회에 있을 때는 하루하루 설교문을 작성하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쉬고 있는 지금에 와서야 비로소 설교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된 것이다.
물론 교회에 있을 때에도 설교에 대한 고민은 있었다. 이를테면 “설교내용을 청중에게 어떻게 효과적으로 전달할까?” 혹은 “이 시대에 청중에게 필요한 메시지가 무엇일까?”와 같은 고민이었다. 그런데 무엇보다 나를 괴롭혔던 것은 성경해석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는 점이다. 확신이 없는 것에 대하여 확신있게 전해야하는 일은 참으로 괴로운 일이었다. 하나님 앞에서 청중을 속이는 것 같았고, 나 자신을 속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와서 그 때를 생각해보면, 더 부끄러운 일은 사실 따로 있었다. 그것은 그런 고민을 하며 괴로워하는 스스로에 대해 품었던 은근한 우월감이었다. 그 당시 내가 경멸했던 것은 성경한줄 읽어놓고 성경내용과 상관없이 “확신있게” 떠드는 목사들이었다. 그런 목사들은 목사도 아니라고 생각했고, 그런 설교는 설교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성경과 상관없이 헛소리나하는 자들보다는 차라리 내가 낫다며 스스로를 위로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게 돌아갔다. 그런 내 판단을 비웃기라도 하듯, 하나님은 그런 목사들에게 오히려 기회와 부흥을 주셨고 심지어 그런 목사들의 설교를 통해서 일하셨다. 물론 당시에는 그런 현실조차 인정하지 않으려했지만, 지금은 그런 불편한 현실을 신앙 안에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것은 성경이 증언하는 바, 하나님은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마3:9). 하나님께서 윤리적으로 옳고 합당한 자들을 통해서만 일하실 것이라는 생각은 하나님을 우습게 보는 가소로운 짓이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그런 목사들과 설교들을 통해서도 일하신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할 것은 하나님이 그런 목사의 설교를 통해서 일하신다고 해서 그런 목사와 설교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는 여전히 성경과 상관없이 떠드는 설교가 좋은 설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성경적인 설교만 하면 좋은 설교이고 최선의 설교라고 착각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설교를 통해서만 하나님이 일하실 거라고 착각하지 말자는 것이다. 나는 자주 내 뜻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것만 설교한다고 자부하는 목사들을 본다. 그들은 설교 전에 간절한 목소리로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만 드러나게 해달라고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설교를 해본 내 경험상, 내 뜻을 완전히 배제한 성경적인 설교란 불가능하다. 미안하지만, 그런 설교가 가능하다고 믿는 목사들은 스스로를 신의 자리에 올려놓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그런 설교는 하나님만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실상 하나님조차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한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성육신의 하나님이다. 신이 인간이 되셨고, 그러한 성육신을 통해 스스로를 계시하셨다고 말하는 종교가 기독교이다.
성경적인 설교를 한다는 우월감에 취해서 성경 안에 숨어들어가는 목사는 좋은 설교자가 될 수 없다. 가장 성경적인 설교가 가장 좋은 설교라면 그냥 성경구절만 읽고 내려오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성경을 근거로 무언가 덧붙이는 순간, 어떤 설교자도 자의적 해석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좋은 설교자는 그런 위험성을 오히려 겸허히 받아들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하실 하나님을 신뢰하며 담대히 선포하는 설교자일 것이다.
확신도 없는 형편없는 설교를 하면서도 같잖은 우월감에 취해 설교자의 가치와 책임을 외면하는 짓은 이제 그만두어야한다. 얼마나 내가 성경적인 설교를 하는지, 성경을 주석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으며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청중들 앞에서 증명하려고 귀한 설교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소설가 이병주는 소설에 대해 1.5배를 말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그냥 사실만 나열할 것이면 굳이 소설이란 형식을 빌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즉, 그는 단지 사실이 아니라 1.5배를 통해 어떤 진실을 말하기 위해 소설을 쓴다는 것이다. 설교도 마찬가지다. 설교의 최선이 다만 성경적인 설교라면, 성경만 봉독하고 내려와야 할 것이다. 물론 설교는 당연히 성경을 근거로 해야하겠지만, 동시에 몸에 와 닿는 것을 이야기해야한다. 1.5배를 해야한다. 객관적인 설교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설교자가 모든 청중의 관심에 응답할 수도 없다. 그건 불가능하기도 하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설교자는 성경을 근거로 자신의 실존적인 문제에 응답해야한다. 그것이 하나님이 설교자를 부르신 이유이다. 이것이 성경봉독과 설교의 차이다. 설교가 성경과 동떨어지지 말아야하는 만큼 설교자의 실존도 외면하지 말아야한다는 것을 명심해야한다.
내가 아는 어떤 목사는 요즘 유튜브에 훌륭한 설교자들이 많으니 자신의 설교는 중요하지 않으며, 자신은 성도들이 설교를 실제로 실천하게 하는 일에 집중하겠다고 말했다. 그 목사는 요즘 성도들은 설교는 많이 찾아듣지만 정작 실천하는 데는 소홀하다고 비판했다. 물론 취지는 이해한다. 그러나 설교는 단지 성도가 무엇을 실천할지 전달해주는 일 정도가 아니다. 설교는 교회를 통해서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을 설교자의 몸으로 증언하며 순종하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라는 구체적인 몸으로 오셔서 아버지의 부르심에 순종하셨듯이 자신을 부르신 그 자리에 순종하며 응답하는 일이다. 이것이 설교의 진정한 가치이며, 부르심을 받은 목사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함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