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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ehwa Lee Nov 01. 2017

[한 술]우유와 엽산 보조제

각자의 음식이 든 냉장고 앞에서

아빠의 퇴사 후 엄마는 더 많은 끼니를 만들어 냈다.

집에는 군대에서 돌아온 아들과, 직장을 그만둔 딸과, 퇴사한 남편이 삼시 세끼를 기다리고 있었다.

결혼한 지 스물일곱 해가 넘도록 차려준 밥만 먹고 살찌운 가족들은 말 그대로 '식솔'이었다.

그녀는 가벼워진 주머니로 많은 재료를 사다 날라야 했다.

저렴한 우유를 사기 위해 철도길을 건너 재개발 지역에 덩그러니 남은 마트에 갔고, 

일요일에 문을 닫는 언덕 위 마트에는 토요일 저녁에 들러 채소와 과일을 사 왔다. (휴일 하루 전의 마트는 채소와 과일이 특히 저렴하다.) 


"엄마 이거, 우유가 너무 묽어. 라떼 해 먹으면 맛이 별로야."

"요거트 발효는 잘되던데 뭘."

"그거 알아? 엄마가 사 오는 두 묶음 짜리 우유. 그거 우유 아니야."

"그게 우유가 아니면 뭔데?"

"이거 철분 엽산에 우유 30프로 탄 물."


나는 엄마가 우유인 줄 알고 철도길을 건너 사다 나른 것이, 사실은 우유를 흉내 낸 값싼 철분 엽산 보조제라고 말한 것을 후회했다. 엄마는 이후로 사백 원 정도 비싼 '진짜 우유'를 꼬박 사 왔다. 


                                                                                           


많은 끼니를 만들어 낼수록 돌아오는 건, 더 많은 그릇들 뿐이었다. 

엄마는 결심했다.


"이제 난 아무것도 안 할래."


끼니를 거르고 티브이를 보는 아빠의 모습에 엄마는 마음이 답답하다. 

그가 밥 달라는 말을 입밖에 꺼내지 않아도, 그녀에게는 남편의 끼니를 거르는 모습이 투쟁이었다.

너는, 끼니가, 지나도록, 밥도 주지 않느냐는. 

엄마는 속을 끓이며 누구도 모르게 분을 삭이다가, 아빠가 매번 '먹어도 배도 안찬다'라고 툴툴대는 국수를 가득 끓여 내왔다. 부엌을 떠날 수 없다면 머무는 시간을 최소화하는 게 그녀만의 투쟁이었다.


                                                                                           


작년에 엄마가 담가놓은 마늘장아찌마저 냉장고에서 자취를 감추자 본격적으로 집이 가물었다. 나와, 아빠와, 동생은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면서 빈 냉장고를 돌아가며 여닫았다. 나는 야채를 긁어모아 볶음을 만들고, 조림을 하고, 카레를 만들고, 국을 끓였다. 그야말로 간단한 조합만으로 만들 수 있는 것들. 이를테면 장떡, 감잣국, 계란 김국, 애호박볶음 같은 단출한 반찬들이 냉장고 안을 채웠다. 아빠는 자전거를 타고 빵이나 고기를  사 왔다. 그리고 끼니때가 되면 그것을 구워 먹었다. 조리법과 재료가 단출해졌다. 부엌을 떠난 엄마는 친구를 만나고, 친정에 가고, 여행을 떠났다. 


며칠 전 아빠는 우유 육 리터, 소 돼지 닭고기와 새우, 각종 탄산음료와 주스 여덟 병과 빵 네 봉지, 양배추 두통, 치즈 등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많은 식재료들을 사다가 냉장고 안을 가득 채워두었다. 내가 놀란 것은 양도 양이지만, 이렇게 많은 것들이 냉장고를 채우고 있어도

먹을 것이 없다는 사실에서였다.


아빠와 동생은 엄마가 한 음식이 아니면 잘 먹지 않았다. 그건 나도 그랬다. 아빠는 김치찌개를 끓여서 끼니때마다 그것을 먹었고, 나는 카레를 만들어서 끼니때마다 프라이를 올려 먹었다. 동생은 밖에서 식사 약속이 있으면 최대한 배부르게 먹는 습관이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엄마는 가족들이 만들어 낸 걸 아주 조금씩 맛보았다.


                                                                                 

"너 저번에 만든 오이냉국, 어떻게 만든 거야?"

엄마는 오이냉국을 잘 못 만들겠다고 했다. 나는 인터넷을 뒤져서 오이냉국 한 대접을 만들어냈다. 고깃집에서 여름에 내오는 밑반찬 맛이 났다. 

누구도 그녀의 빈자리를 메우지 못하지만, 아무도 천연덕스레 굶고 있진 않다. 각자의 음식이 든 냉장고에서, 이따금 자기가 낸 적 없는 요리를 맛보며, 엄마는 그것을 궁금해한다. 스테이크를 어떻게 굽는지, 연어에 곁들여 먹는 케이퍼가 무언지, 오코노미야끼가 무언지 내게 물어보는 엄마의 모습에서, 나를 살찌우고 배 불린 손길이 부엌에서 거둬져 가는 것만 같아 시원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이따금 그녀의 그런 모습이 약하게 느껴지는데, 그것은 그녀의 음식들로 살과 뼈를 길러온 나만의 간사한 생각이라는 것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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