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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ehwa Lee Mar 17. 2021

마실 것과 취향 이야기

진토닉에서 백수환동주에 이르기까지

나는 가게의 분위기를 보면 얼추 그곳이 나와 맞을지 가늠할 수 있다고 믿는 편인데, 그런 면에서 동네에 새로 생긴 바는 한 번쯤 가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곳이었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옆 골목에 칵테일 바를 열 생각을 한 주인이 궁금하기도 했으며, 화이트 타일, 스틸, 조명만으로 깔끔한 인상을 주는 가게 인테리어도 마음에 들었다. 캐주얼하게 동네를 오가며 두고두고 들르고 싶은 바가 생긴 것 같아 궁금한 마음이었다.


대학생 무렵 칵테일바에 갔을 때는 매번 새로운 술을 시킨 기억이 난다. 종류는 얼마나 많으며, 색은 왜 이리 황홀한지. 야릇한 이름을 가진 칵테일을 주문할 때면 괜히 목소리가 작아지던 나는 이제 주종 별로 좋아하는 브랜드를 읊는 삼십 대가 되었다. 공간과 음식에 한해서라면 탐색은 늘 환영이지만, 그럼에도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으면 자신을 좀 더 좋은 기분으로 이끌 수 있는 치트키를 하나 알고 있는 것 과 같다는 생각을 한다.


"실례지만, 왜 진토닉만 마셔요?"


늘 검은 셔츠를 갖춰 입는 바 주인은 손님과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하는 호기심 많은 사람이었다. 내향적이기로는 둘째 가면 서러울 나에게도 능숙하게 말을 몇 마디 붙이고는 이야기를 나눴는데, 이후로 몇 번 더 가게를  들락거리며 나는 그가 나와 같은 동네에 살며, 한 살 차이가 난다는 것, 같은 재단 산하의 고등학교에 다녔다는 것, 영상 촬영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동안 나는 내리 진토닉만 마시고는 했는데, 그게 그의 눈에는 못내 신기해 보였나 보다.


"달지 않고 깔끔한 술을 좋아해요."


그 가게의 진토닉은 취향에 맞아 쭉 즐기게 되었는데, 달지 않고 탄산이 강한 토닉워터를 사용하여 입에 남는 들큼함이 없고 진과 탄산수의 배합이 음료수 같다거나 쓴맛이 난다든지 하는 식으로 치우치지 않아 밸런스가 좋다는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연태고량주, 하이볼, 오미자 술, 그리고 술 세팅에 진심인 나

가게에서는 진 토닉을 위주로 마셨지만 실은 나는 소주, 사케, 진, 위스키 등의 증류주를 두루 좋아하고, 가볍게 마실 때는 기주에 토닉워터와 레몬만 추가된 단순한 스타일을 즐기기도 한다. 비교적 일관된 취향을 가지고 있지만, 취향이란 모름지기 새로운 것을 접할 때마다 반짝하고 가지가 늘어가기도 하는 법. 탁주는 나의 취향 리스트에 자리하고 있지 않았는데, 몇 년의 시간 동안 우연한 기회에 걸쳐 지금은 완전히 마음에 자리 잡고 말았다.


때는 바야흐로 6년 전, 동료의 잡지 인터뷰 동행차 해방촌에서 막걸리를 만드는 지인의 집에 찾아간 적이 있었다. 지금처럼 전통주나 양조에 관한 관심이 그리 높지 않았을 때라 직접 담근 막걸리를 마셔볼 기회는 전무했는데,  그런 내게 물, 쌀, 누룩만을 가지고 만들어진 탁주에서 느껴지는 화사한 풍미는 그야말로 막걸리에 대한 고정관념 전체를 송두리째 바꾸어 버릴 만했다. 주택에 살던 시절, 매년 여름이면 나는 마당의 앵두를 따서 청을 만들고는 했는데, 종종 잔뜩 발효된 앵두청은 앵두주가 되어버리고는 했다. 한데 이 막걸리에서 마치 농도 짙은 앵두주를 머금은 것만 같은 맛이 나는 게 아닌가. 초여름 바람을 맞으며, 인터뷰를 빙자한 옥상에서의 막걸리 한잔은 내게 직접 담근 탁주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는 첫 기억이었다.



하지만 집에서 소량으로 담근 막걸리를 다시 맛 볼 방법은 요원했고, 그렇게 막걸리는 강렬한 기억으로만 남고 마는가 싶었다. 양조한 막걸리는 일상적으로 구매하기 어려웠고, 온라인으로 이것저것 시켜본 막걸리들은 배송과정에서 더 발효되어버리거나, 혹은 잘 도착하더라도 기대와는 다르게 달거나 고소한 맛뿐이었다. 그렇게 미련만 가득한 채 실패를 거듭하던 나의 탁주 생활에 한줄기 빛이 든 것은 정말 우연한 계기에서였다.


백수환동주를 처음만난 해방촌의 주막(feat.안주를 못먹게 해 슬픈 강아지)


지인들과 함께한 해방촌의 한 주막에서 자칭 '주모'라 부르는 주인분이 추천해 준 '백수환동주'를 만난 것이다. 호기심에 받아 든 잔 속의 탁주는 걸쭉하고, 녹진하며, 화사하고, 향긋했다. 먼 길을 돌아 취향에 맞는 막걸리를 만난 마음은 그야말로 행복했다. 한 입 마시면 이게 뭔가 싶어 헤실헤실 웃음이 나는 맛.


'드디어 시중에서 원하는 막걸리를 구할 수 있는 건가!'


'백수환동주'라는 이름을 단서 삼아 기사와 블로그를 뒤져내어  양조장이 있는 남양주 진접읍의 직판장으로 향했다. 동네 슈퍼 가듯 구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어딘가에서 백수환 동주가 조르륵 열 맞추어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한결 희망이 생긴 기분이었다. 용량 대비 가격으로 치자면 공장 막걸리의 스무 배쯤 비싼 술을, 그래도 양조장 술인데 칠레산 와인보다 저렴하다며 세 병을 집어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어려운 발걸음 한 김에 실컷 집어 들고 싶었지만 탁주라 오래 두고 먹을 수는 없기에 미련 가득한 마음을 내려놓았다.


그렇게 구한 술을 집어 들고,

티브이 앞에 쪼그려 앉아,

안주는 간단하게 육전에 김치.

좋아하는 영화 다시 보기를 틀어놓고

겨울의 끄트머리에 홀짝이는 혼술.


목젖을 꿀떡일 때마다

줄어드는 병이 아쉽고,

동시에 그 정도로 흡족한 것을 드디어 찾아내어

뿌듯하고 즐거운 마음.


애주가라기에는 애송이 같은 주량이지만

아무렴,

나는 좋아하는 것을 좋아할  찾아오는 만남에 

앞으로도 레어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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