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을 식민지로 만든 미얀마의 역대 왕조들

미얀마의 역대 왕조들은 태국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by 바다의 역사



16세기 중반 북부 태국의 란나 왕국은 황금기를 지나 극심한 내부 혼란에 빠져 있었습니다. 왕위 계승을 둘러싼 귀족들 사이의 내분으로 인해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었고 주변 열강들의 간섭을 받기 쉬운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때 서쪽에서는 버마(미얀마)의 뚱구라는 이름의 왕국이 바인나웅 국왕의 지도 아래 강력한 열강으로 급부상하고 있었습니다.


약 1558년쯤에 버마의 바인나웅 국왕은 란나의 수도 치앙마이를 무력 점령했습니다. 이를 시작으로 란나 왕국의 약 200년 동안 버마의 간접적인 지배(식민지)를 받거나 속국 상태로 머물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태국의 역사 교과서에서도 태국은 역사적으로 유일하게 미얀마의 식민지였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버마(미얀마)는 란나를 아유타야 왕국을 공격하기 위한 해상 기지이자 물자 보급처로 활용했습니다.


란나 왕국의 내분이 결정적인 계기였습니다. 당시 란나의 국왕이었던 메꿋띠 국왕은 귀족 세력의 반발로 권위가 실추된 상태였으며 주변국인 란쌍 왕국과의 관계 설정에서도 실패했습니다. 바인나웅 국왕은 이러한 틈을 타서 태국 토벌의 첫 단계로 란나 왕국을 지목했던 거지요.


바인나웅 국왕은 1558년 대규모 병졸들을 이끌고 치앙마이를 포위했습니다. 메꿋띠 국왕은 저항했으나 버마군의 화약무기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토벌 이후 버마는 란나에 버마식 행정 체계를 일부 도입하고 식민지 수탈을 강요했습니다. 하지만 미얀마는 란나의 고유한 문화와 모계 중심적 가족 구조를 완전히 말살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런 사회적 구조는 미얀마의 통제 아래에서도 란나인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이후 란나는 미얀마의 다스림에 저항하거나 아유타야 왕국과 협상하는 등 복잡한 정치적 행보를 보였습니다.


란나 왕국은 18세기 말 똔부리 왕국의 딱신 국왕과 라따나 꼬신 왕국의 라마 1세에 의해 버마 세력이 축출될 때까지 지배를 받았습니다. 이후 란나 지방은 현대 태국의 북부 지방으로 편입되었습니다. 오늘날 치앙마이와 북부 태국 곳곳에는 버마 양식의 사원과 건축물이 남아 있어 이 시기 지배의 흔적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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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유타야 왕국과 미얀마의 뚱구 왕국 사이의 갈등은 흰 코끼리를 둘러싼 분쟁에서 표면화되었습니다. 버마의 바인나웅 국왕은 아유타야 왕국의 짜끄라빳 국왕에게 평화의 징표로 흰 코끼리를 요구했으나 아유타야 왕국이 이를 거절하면서 전쟁의 명분이 만들어졌습니다.


약 1563년부터 시작된 버마의 대규모 토벌은 결국 1569년 아유타야 왕국의 함락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는 태국 역사상 가장 뼈아픈 패배 중 하나로 기록되며 이후 약 15년간 아유타야 왕국은 버마의 속국(식민지)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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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유타야 왕국 내부의 배신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삐싸 눌록의 영주였던 마하 땀마라쨔는 아유타야 왕국 중앙 정부와의 갈등 끝에 버마군에 투항하고 길잡이 역할을 했던 겁니다. 또 아유타야 왕국 성 내부에서도 버마와 내통한 세력이 성문을 열어주면서 아열대 지방의 요새라 여겨졌던 요새가 허무하게 무너졌습니다.


1568년 바인나웅 국왕은 수십만 명의 군단을 이끌고 아유타야 왕국을 포위했습니다. 아유타야 왕국은 수로와 성벽을 이용해 방어전을 펼쳤으나 버마군의 집요한 노략과 내분으로 인해 10개월 만에 함락되었습니다. 버마군은 아유타야 왕국의 수많은 장인과 왕녀, 귀부인들을 벌거벗기고 인질로 잡아 버마의 수도인 페구로 끌고 갔다고 합니다. 이 시절 인질 가운데는 훗날 태국의 위인이 되는 나렛 쑤완 왕자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고 합니다. 바인나웅 국왕은 마하 땀마라쨔를 아유타야 왕국의 괴뢰 국왕으로 앉히고 식민지 관계를 만들었습니다.


아유타야 왕국는 1584년 나렛 쑤완 국왕의 봉기로 독립을 되찾았습니다. 나렛 쑤완 국왕은 버마에서 커가며 배운 미얀마의 화약무기를 역으로 이용하여 버마군을 여러 차례 때렸습니다. 이 시절의 역사적 사건들이 태국의 역사 드라마, 영화로 가장 자주 만들어지는 소재이며 주로 만들어지는 영화로는 "나레 쑤완"과 "수리욧따이"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 시절은 현재 태국인들에게 좋은 애국심의 원천이 되고 있으며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의 소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18세기 중엽쯤의 미얀마에서는 꼰바웅이라는 이름의 왕국이 새롭게 일어났습니다. 알라웅 빠야 국왕에 의해 세워진 이 왕국은 다시 한번 아유타야 왕국을 겨냥했습니다. 당시 아유타야 왕국은 마치 로마 제국처럼 오랜 평화로 인해 국방력이 약화되어 있었고 지배층의 사치와 무능이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약 1767년쯤에 버마의 신뷰신(븅신이 아니..) 국왕은 아유타야 왕국을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고 400년 역사의 왕국을 멸망시켰지요. 이는 단순히 먹는 걸 넘어 마을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습니다.


버마는 과거와 달리 2개의 방향에서 동시에 노리는 양동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북쪽의 란나 지역을 먹은 후 남하하는 병졸과 서쪽 변경을 넘어 아유타야 왕국을 압박했습니다. 아유타야 왕국 내부에서는 왕위 계승 서열을 둘러싼 갈등으로 제대로 된 방어를 하지도 못했습니다.


버마군은 약 1765년쯤부터 아유타야 왕국을 포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번에는 성 주위에 둑을 쌓아 홍수기에도 철수하지 않고 2년 동안 포위망을 유지했습니다. 약 1767년 4월쯤에 버마군은 성벽 아래에 굴을 파고 불을 질러 성벽을 무너뜨린 후 진입했습니다. 버마군은 아유타야 왕국의 금박 불상들을 녹이고자 종교 사원에 불을 지르고 모든 기록물과 보물을 노략질했습니다. 아유타야 왕국의 마지막 국왕인 에까탓 국왕은 혼란 중에 사망했으며 왕국은 공식적으로 망했습니다.


아유타야 왕국의 망조는 태국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딱신 장수가 남부 지방에서 세력을 긁어 버마군을 몰아내고 똔부리 왕국을 만들었습니다. 이후 라마 1세가 방콕으로 수도를 옮기며 현재의 짜끄리 왕국이 시작되었습니다. 현재 아유타야 왕국의 역사 공원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당시의 안좋았던 흔적과 아름다운 과거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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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유타야 왕국이 망한 뒤에도 버마(미얀마)는 새로 태동한 태국 세력을 완전히 밟고자 했습니다. 버마의 보다우빠야 국왕은 태국이 다시 성장하는 것을 막고자 대규모 토벌을 계획했습니다.


1785년 버마는 9개의 병졸들을 이끌고 태국 전역을 동시에 먹었습니다. 이를 9군 전쟁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버마가 태국을 향해 감행한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해외 행동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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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의 보다우빠야 국왕은 자기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전체를 식민지로 만드려는 욕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태국이 방콕을 중심으로 빠르게 부활하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버마군은 북부 서부 남부의 여러 경로를 통해 동시에 내려갔습니다. 라마 1세와 그의 동생인 마하 수라 싱하낫은 대응을 하고자 화약 무기를 썼습니다. 특히 깐짜나부리 지방의 랏야 지방에서 벌어진 싸움이 결정적이었습니다. 태국 군대는 버마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지형지물을 활용하여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결국 보다우빠야 국왕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버마군은 퇴각했습니다.


이 전쟁의 패배로 버마의 동남아시아 식민지 정책은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이후 미얀마는 내부 문제와 영국과의 전쟁에 집중하게 되었고 태국에 대한 대규모 토벌은 더 이상 불가능해졌습니다. 이 전쟁은 태국이 방콕 시대를 안정적으로 여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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