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가 먼저 대영제국을 때려서 터진 전쟁들
근현대 시기의 미얀마vs대영제국 전쟁
(근현대 시기..)
미얀마의 마지막 왕국인 꼰바웅 왕국은 약 18세기 중엽쯤인 알라웅빠야 국왕에 의해 만들어진 이후 태국을 넘보기도 하면서 성장했습니다. 약 19세기 초엽쯤에 미얀마는 서쪽으로 마니푸르, 아삼 지방까지 진출하며 영국령 인도와 변경을 맞대게 되었습니다. 당시 미얀마의 국왕이었던 바지도 국왕은 조상들의 사업을 물려받아 벵골 지방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습니다.
이러한 정책의 핵심 계기는 샤푸리 섬 점거 사건입니다. 약 1823년쯤에 미얀마군은 나프 강 어귀에 위치한 샤푸리 섬을 점령하며 영국 초소의 병사들을 죽였습니다. 이는 영국 동인도 회사의 주권을 침해하는 행위였습니다. 미얀마 측은 이 지역이 전통적으로 우리 미얀마의 영토였으며 따라서 자신들의 정당한 소유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사건은 단순히 분쟁을 넘어 근현대 시기에 동남아시아의 패권을 쥐고 있던 미얀마vs무섭게 성장하던 신흥 세력인 영국(대영제국)이라는 두 거대 세력의 정면 충돌을 야기했습니다. 제1차 미얀마vs영국 전쟁 초기에 발생한 라무 전투는 미얀마군이 대영제국군을 상대로 거둔 가장 눈부신 전술적 승리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전투는 약 1824년 5월 10일~ 5월 17일까지 오늘날의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 인근 라무 지역에서 터졌습니다.
전투의 시작은 미얀마의 전설적인 장군인 마하 반둘라 장군이 이끄는 부대의 기습적인 진격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마하 반둘라는 산맥을 넘어 벵골 내륙으로 깊숙이 침투하는 계획을 펼쳤습니다. 당시 영국군은 미얀마군이 험준한 산악 지형을 통과해 대규모 병력을 이동시킬 수 없으리라 판단했으나 이는 큰 오산이었습니다.
미야와디 민기 우 사가 지휘하는 미얀마 병졸들은 라무에 살고 있던 캡틴 노턴의 영국군을 포위했습니다. 영국군은 약 1000명의 병력과 대포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사기가 높은 미얀마군을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미얀마군은 전통적인 참호 구축 기술인 티크를 활용하여 영국군의 포격으로부터 자기들을 보호하며 점진적으로 포위망을 좁혀갔습니다.
싸움이 절정에 달했을 때 미얀마군은 거센 보병 돌격과 함께 영국군의 보급로를 차단했습니다. 결국 5월 17일 영국군은 궤멸적인 타격을 입고 도망쳤으며 캡틴 노턴을 포함한 다수의 장교가 이 싸움으로 인해 전사했습니다. 이 승리는 미얀마군에게 엄청난 자신감을 주었으며 캘커타의 영국인들 사이에 심각한 패닉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미얀마군의 승리를 이끈 주요 요인은 독특한 전술과 지형 활용 능력이었습니다. 탠트 민 우의 책인 "근대 미얀마의 형성"에서는 당시 미얀마군이 사용했던 요새화 기술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미얀마 병졸들은 목책을 만들고 구덩이를 파서 단단한 방어 거점을 만드는 데 능숙했습니다. 이는 영국군의 부유한 화력을 무력화하는 효과적인 수단이었습니다.
또한 미얀마군은 정글 전투에 최적화된 보병 중심의 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라무 전투에서의 승리 이후 미얀마군은 벵골 지역으로의 추가 진격을 계획했습니다. 그러나 영국은 인도의 막대한 자본력을 동원하여 전면적인 방어에 나섰습니다. 아치볼드 캠벨 장수가 다스리는 영국군은 수로를 통해 양곤에 상륙하여 미얀마의 심장부를 때리는 병법을 취했습니다.
이로 인해 벵골 국경에 있던 마하 반둘라의 사람들은 본토를 방어하고자 되돌아가야만 했습니다. 이후 벌어진 다누뷰 전투에서 마하 반둘라가 죽었습니다. 결국 약 1826년쯤에 얀다보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