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 조선은 국가의 통치 이념인 유교를 바탕으로 농본주의 국가를 표방했습니다. 농업을 장려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절기와 달력이 필수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은 세계 패권국이었던 명나라의 달력을 빌려 쓰고 있었기 때문에 한양과 베이징의 지정학적 위치 차이로 인해 일식과 월식의 발생 시간이 맞지 않는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이런 오차를 극복하기 위해 한반도의 하늘에 맞는 독자적인 천문 계산법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 사건의 발단이자 계기가 되었습니다.
Ai 그림입니다.
역사적으로 세종대왕은 이순지, 김담 등 당시 최고의 학자들을 등용하여 한양을 기준으로 천체의 움직임을 계산하는 칠정산 내편과 외편을 편찬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칠정산은 중세시대 때까지 세계 최강대국이었던 대원제국(원나라)의 최첨단 수시력과 중동 아랍 제국들의 회회력을 연구하여 조선의 실정에 맞게 재창조한 독자적인 역법서입니다.
조선시대의 천문도. (사진은 "국립중앙박물관" 출처 입니다.)
박성래 학자의 1998년 저서 "한국사에도 과학이 있는가"에 따르면 조선시대의 최첨단 과학 우주 관측 역법서인 "칠정산"이 계산한 1년의 길이는 365일 5시간 49분 12초로 21세기 천문학 최첨단 과학기계들의 계산과 비교해도 오차가 "1초 안팎"에 불과할 정도로 극도로 정밀했습니다. 유럽에서 이와 유사한 정밀도를 가진 그레고리력이 1582년에 등장한 것을 감안하면 조선의 천문학은 서양보다 무려 "140년가량 앞섰을 정도로 초기 조선의 과학 기술력이 유럽보다 훨씬 더 강력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Ai 그림입니다.
그 이후 조선의 천문 관측은 국가 주도로 꾸준히 이어졌습니다. 혼천의와 같은 천체 관측 기구를 제작하여 천체의 운행을 정밀하게 관측했으며 "앙부일구(해시계)"를 제작해 백성들이 시간을 읽을 수 있게 했습니다. 앙부일구는 단순히 시간만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가로줄과 세로줄을 통해 24절기까지 동시에 확인할 수 있는 달력의 기능까지 갖춘 혁신적인 발명품이었습니다.
이런 칠정산의 계산 방식과 혼천의(별의 좌표를 잴때 사용함), 앙부일구 등은 현대 21세기 한국천문연구원 등의 기관에서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그 과학적 정밀성이 지속적으로 입증되고 재조명될 정도로 21세기 수준으로 봐도 굉장히 뛰어난 과학 기술력입니다. 미국의 나사 항공우주국에서도 조선시대의 우주 관측 오차를 30초 안팎으로 공식적으로 인정했을 정도입니다. 현대 21세기 천문학적 역산출 결과 오차가 매우 적을 정도입니다.
다음으로 조선시대 초신성 관측 기록의 발단과 개요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우주에서 별이 폭발하며 엄청난 빛을 내는 현상을 초신성이라고 부릅니다. 1604년 선조 시대에 우리 은하에서 마지막으로 폭발한 초신성 관측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매우 상세히 남아있습니다. 이 사건의 계기는 조선의 천문 관측 관청인 서운관 관원들이 매일 밤하늘을 관찰하고 이상 현상을 기록해야 하는 국가적 의무를 철저히 수행했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변화는 곧 국가의 운명이나 국왕의 국가통치와 직결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별의 변화를 관측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국가 중대사였습니다.
역사적 기록을 살펴보면 조선의 천문학자들은 1604년 10월 13일~ 1605년 4월 23일까지 약 7개월 동안 무려 130여 회에 걸쳐 이 초신성을 자세하게 관측했습니다. 이는 21세기 이전까지 이렇게까지 초신성을 세세하게 관측한 국가는 세계적으로도 조선이 엄청나게 뛰어납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성변측후단자" 등의 사료를 보면 객성이 천강성 위에 나타났다거나 심화성보다 작고 황적색이었다는 식으로 별의 밝기, 크기, 색상의 변화까지도 매일매일 극도로 상세하게 기록했습니다.
이는 서양의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가 관측한 것보다 4일이나 앞선 최첨단 기록입니다. 그 이후 이 상세한 기록들은 그대로 보존되어 내려왔으며 근황에 이르러서는 전 지구상의 현대 21세기 천문학자들이 이 조선왕조실록의 기록들을 참고하여 결국 초신성 폭발이 제1a형 초신성 폭발이었음을 규명하는 데 핵심적인 증거 자료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미국이나 유럽의 과학계에서도 케플러의 기록보다도 조선시대의 기록들이 훨씬 정교하고 자세하며 길고 연속적이며 상세하기 때문에 논문에서 조선왕조실록을 가장 우선적인 참고 자료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3번째로 조선 전기의 막강했던 군사력과 화약 무기 체계에 대한 발단과 개요입니다. 조선 초기 고려 말부터 이어져 온 북방 중앙아시아 여진족 유목 군단들의 남진 침략과 왜구 함대들의 침략은 국방에 심각한 위협이었습니다. 이를 대응하기 위해 고려시대는 말기부터 압도적인 화력 무기를 바탕으로 한 국방력 강화가 절실했고 이것이 화약 무기와 독자적인 해군력 강화, 해군 전함 개발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지구 역사상 최초로 화약 무기를 발명한 송나라의 영향력을 받은 최무선이 고려 후기에 도입한 화약 제조 기술을 바탕으로 조선은 초기부터 해군력, 화약 무기 체계를 비약적으로 발전시켰습니다.
특히 세종대왕 시기가 조선 역사상 가장 눈부신 화약 무기 발전이 이뤄졌던 시대였는데, 이는 세종대왕은 본인부터가 군인이 아니었고 전투력이 강하지 못했기에 역설적으로 오로지 강한 무기만이 국방력 강화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정답이라고 느꼈던 것이었기 때문이며 그로 인해 세종대왕은 화약 무기 발전에 사활을 걸었습니다.
역사적으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지구 최초의 다연장 로켓으로 불리는 "신기전"과 "화차"입니다. 1448년 세종 30년에 대량 생산된 신기전은 화약을 추진체로 사용하여 날아가는 화약 무기였습니다. 특히 산화신기전은 발사체가 목표물에 도달한 후 다시 폭발하는 2단 로켓의 구조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를 100발씩 한 번에 쏘아 올릴 수 있는 화차는 당시 유럽의 초기형 대포나 석궁 위주의 전투 방식을 완전히 압도하는 대량 살상 방사 무기였습니다. 서양에서 이와 비슷한 다연장 로켓이 실용화된 것은 19세기 근대기의 영국의 콩그리브 로켓이 등장하면서부터였으니 조선이 약 350년 이상 앞서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신기전의 경우는 파괴력은 상당했던 것으로 추정되나 "정밀도"가 높은 편은 아니었기에 임진왜란 때 가서는 적을 살상하는 용도보다는 해군 함대들 간의 교신, 수신용으로 주로 쓰였습니다. 예를 들면 이순신 장군은 대장선에 올라가 지휘하면서 다른 거북선이나 판옥선에 정보 수신, 교신을 할 때 처음에는 북과 연으로 신호를 주고 받았으나 이조차 함대들 간의 거리가 멀어지면 북소리가 들리지 않고 연은 보이지 않다 보니 명령 전달이 잘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로 인해 결국 이순신 장군이 고안해낸 것이 신기전이며 이 신기전을 하늘로 쏘아올리며 다른 함대들에게 돌격을 하거나 작전상 후퇴를 하는 등의 명령들을 전달했다고 합니다.
어쨌든 그 이후 조선의 무기 기술은 금속 제련술과 결합하여 더욱 정교해졌습니다. 전상운의 한국 과학기술사에 따르면 조선은 고탄소강과 저탄소강을 두드려 합치는 접쇠 기술과 불순물을 제거하는 정련 기술을 통해 충격에 강하고 예리한 전투용 실전 강철검을 대량으로 생산했습니다. 물론 강철검은 중국의 경우는 이미 고대시대 한나라 시대 때부터 생산, 대량 보급화가 이뤄졌으며 한반도에서도 고구려가 고대시대에 강철검을 제작했습니다.
또한 갑옷에 있어서도 쇠사슬과 철판을 결합한 경번갑 등을 만들어 뛰어난 방어력을 갖추었습니다. 해군력에 있어서도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인 판옥선을 주력으로 삼아 대구경 함포를 싣고도 발사 반동을 견디며 제자리에서 회전할 수 있는 함포전의 기틀을 마련했고 이는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으로 이어져 임진왜란 당시 압도적인 해상 장악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근황을 보면 현대 군사학자와 로켓 공학자들이 설계도를 바탕으로 신기전을 복원하여 실제 비행과 폭발을 성공시켰으며 세계 로켓 학회에서도 이를 공식적인 역사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현재 21세기 지구상에서 가장 과학적인 문자인 훈민정음에 대한 발단과 개요입니다. 조선 전기까지 우리 한민족은 고유의 언어는 있었으나 여전히 중국의 한자어의 영향 하에 있었습니다. 한자는 배우기 매우 어려워 지배층인 사대부들의 전유물이었고 일반 백성들은 글을 몰라 관청에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농사 기술을 기록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집권층들은 이 한자어를 자신들만의 전유물로 사유화해 백성들을 핍박하고 수탈하는 용도로 썼습니다. 백성들이 쉽게 글을 읽고 쓰게 하여 그들의 삶을 돕고 국가의 기틀을 다지고자 했던 세종대왕의 이런 정신이 훈민정음 창제의 직접적인 계기이자 발단이 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1443년 세종대왕은 집현전 학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으로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1446년에 반포했습니다. 전 세계의 대부분의 문자가 자연 발생적으로 오랜 시간에 걸쳐 형태가 변형되며 만들어졌거나 중국 한자, 메소포타미아 문자, 페니키아 문자에서 파생된 것과 달리 훈민정음은 발음 기관의 모양을 본떠 만든 매우 독창적이고 인위적인 과학의 창작물입니다.
기역(ㄱ)은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양이고, 니은(ㄴ)은 혓바닥이 윗잇몸에 닿는 모양 등 인간의 구강 구조를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기본 자음을 만들고 여기에 획을 더해 거센소리를 만드는 과학적 원리를 적용했습니다. 모음 역시 하늘, 땅, 인간을 뜻하는 천, 지, 인 3재의 철학적 원리를 바탕으로 과학적인 조합이 가능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그 이후 훈민정음은 "한글"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으나 아쉽게도 정작 조선시대에는 한글이 보편화되어 쓰이진 못했습니다.
한글의 우수성은 전 세계 언어학자들에 의해 극찬받고 있습니다. 1997년 유네스코는 한글의 창제 원리가 담긴 훈민정음 해례본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했습니다. 세계적인 언어학자인 "제프리 샘슨"은 한글을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발음 기관을 본떠 만든 자질 문자라고 정의하며 극찬한 바 있습니다. 이처럼 한글은 철저한 음운학적 분석과 과학적 원리를 바탕으로 창제된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완벽에 가까운 문자 체계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조선 전기 세종대왕을 비롯한 여러 지도자와 학자들의 노력으로 이룩된 전쟁 무기, 화약 무기 발전, 과학, 천문학, 그리고 독창적인 문자 창제는 당시 서양보다 훨씬 강력하고 선구적인 업적이었음이 역사적 사실로 명백히 증명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조선은 추락했을까? 그리고 왜 서양에게 역전당했을까? 초기에 조선을 보면 대마도도 토벌하고 나름 선전했지만 임진왜란 때 이르러서는 대마도 토벌은커녕 일본군에게 침략당하면서 전국토가 유린됐으며 더 지나서는 근현대 시기에는 서구열강에게 역전당하고 러시아 제국, 청 제국, 일본 제국 사이에서 패권 경쟁의 전리품이 됐으며 일제강점기 때는 일본 제국의 속국으로 전락합니다.
왼쪽부터 차례대로 동양의 오스만 제국 술탄, 청제국 황제, 페르시아 제국 황제, 무굴제국 칸, 조선의 국왕 Ai 그림입니다.
이는 여러가지 상황들로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이유는 "경제력의 약화"때문입니다. 분명 고대 시기인 신라~ 중세 시대인 고려시대까지 세계 무역을 뛰어다니며 막대한 국고를 벌어들였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서 쇄국정책으로 결국 해외 무역을 중단한 조선은 점차 국고를 갉아먹으며 생명력을 잃어갑니다. 문제는 조선은 이집트처럼 내수 경제나 대운하가 활성화된 국가도 아니었고, 동남아시아 국가들처럼 식량자원이 많거나 농사짓기에 적합한 토양을 가진 땅도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렇기에 조선이란 국가에서 필수적으로 살아가려면 무조건 "전쟁" 아니면 "해외 무역"이 필수였습니다. 고구려, 발해가 전쟁으로 돈을 벌었던 것과 신라와 고려가 해상 무역을 통해 막대한 이득을 챙겼던 것은 그들이 진취적이고 역동적이며 국가 발전 지향형 국가여서도 있지만 한반도라는 국가의 특성상 "반드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기 때문"이라는 점도 컸습니다. 한반도라는 거지 같은 땅에서는 그것 아니고서는 답이 없기 때문입니다. 현재 대한민국도 한민족 역사상 가장 인구 숫자가 많음에도 "수출 주도형 국가"가 되서 무조건 해외 수출에 의존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한반도는 농사 짓기에는 좋지 않은 땅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조선은 그런 농사 짓기 안 좋은 땅에서 농사를 지었던 말그대로 바닷물 속에 잠수해서 불을 피워보겠다는 뻘짓을 500년간 했던 겁니다. 물론 조선이 기술력이 좋아서 거지 같은 한반도 땅을 어떻게 해서든 개간한걸 보니 대단하긴 하지만(그 혹한의 시베리아 땅에서마저 농사 짓는데 성공한 조선 민족이었으니..) 문제는 그런 뻘짓에 시간을 너무 많이 할애했으며 문제는 그렇게 해서 농사라도 잘되서 국가가 부유해지고 발전했으면 뭔가를 해볼 시간적 여유라도 생겼을 텐데 조선은 농업을 발전시켰지만 정작 동시대의 동남아시아 같은 식량자원이 풍부한 국가들에 비해서는 항상 백성들이 가난에 시달려야 됐습니다.
그리고 "인재유출"도 한몫합니다. 조선은 농사도 되지 않는 땅에서 사농공상이라는 얼토 당토않는 짓을 해버리는 바람에 농업은 생각보다 잘 되질 않았고, 고려시대까지 발전했던 그 막강한 공업과 상업은 말그대로 퇴보해버립니다. 그러면서 조선이 세계 열강으로 발전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던 "연은 분리법"마저 걷어차버립니다. 이유는 연은 분리법으로 은을 빠르게 생산을 하면 당시 명나라에 의해 국제 화폐였던 연을 조선이 자체 대량 생산이 가능하면 명나라가 조선에 와서 은들을 더 삥 뜯고 수탈할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결국 이런 생각 때문에 국가의 인재들이나 뛰어난 기술 장인들은 명나라나 일본으로 전부 유출이 되버립니다. 명나라는 같은 유교국가이지만 사농공상을 하진 않았고 기술자, 공업, 상업을 매우 중시했습니다(영락제 사후 해금정책을 펼치긴 했으나 곧 해금정책을 철폐하고 다시 해상 무역에 뛰어들긴 합니다). 그리하여 조선의 연은분리법을 "은본위법"으로 바꿔서 흡수한 일본은 제국주의 국가로 나아갈 경제력을 마련하게 됩니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은 결국 "왕조국가"라는 강점이자 단점입니다. 왜 강점이자 단점이냐? 분명 왕조국가라는 점은 중세시대 때까지는 매우 강한 강점입니다. 이는 중세시대 때까지 동양 국가들이 서양보다 군사력, 기술력에서 훨씬 더 막강할 수 있었던 비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근세 시대에 접어들면서 서양이 조금씩이나마 꾸준히 발전하더니 근대 시기에는 왕조국가가 아닌 완전히 다른 개념인.. "근대식 국가"로 탈바꿈하면서 전혀다른 양상이 펼쳐집니다. 서양은 중앙집권화 되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싸우던 중세 봉건제 사회가 결국 중세시대 내내 동양이 서양보다 군사력, 기술력, 경제력 모든 면에서 막강한 이유라는 걸 뒤늦게야 깨닫고..
왼쪽부터 차례대로 동양의 오스만 제국 술탄, 청제국 황제, 페르시아 제국 황제, 무굴제국 칸, 조선의 국왕 Ai 그림입니다.
뒤늦게 중앙집권화, 근대식 관료제, 그리고 자유 민주주의라는 시스템들을 도입하여 국왕이 아닌 대통령을 투표로 결정하며 백성이 아닌 국민들이 스스로 정치의 주체가 되어서 결정하는 시스템을 만들어냅니다.(물론 기원전의 그리스나 로마가 민주주의를 했다곤 하지만 엄밀히 따져서 오늘날 민주주의와는 직접적인 연결점은 없는걸로 보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민주주의의 직접적인 조상은 근현대 시기의 영국이 만든 민주주의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존의 동양의 강호들이었던 제국들.. 즉.. 왕조국가들이었던 오스만 제국, 중국, 페르시아 제국, 무굴제국, 조선 같은 결국 중세시대까지는 서양을 압도했으나 곧 서양에게 역전, 추월당하고 근현대 시기에는 격차가 크게 벌어지면서 "유행에 뒤쳐진 국가"가 되버리며 근현대 시기에 새롭게 급부상한 러시아와 영국을 필두로 한 유럽, 일본, 미국 세력에게 강호의 자리를 내주게 됩니다.
왼쪽부터 차례대로 무굴제국 칸(강철검 든 모습), 동양의 오스만 제국 술탄, 명나라 황제, 조선의 국왕 Ai 그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