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자 전쟁범죄자가 된 아이신기오르 푸이 황제

제국주의자 전쟁범죄자가 된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아이신기오르 푸이 황제

by 바다의 역사




아이신기오르 푸이는 1906년 북경에서 순친왕의 장남으로 탄생했습니다. 1908년 광서제가 사망하고 서태후가 죽기 직전 푸이를 후계자로 지목하면서 그는 3살의 어린 나이에 청나라 제12대 황제로 즉위하였습니다. 당시 그의 연호는 선통이었으므로 대중에게는 "선통제"로 선포되게 됩니다.



어린 소년황제 아이신기오르 푸이


하지만 선통제의 치세는 길지 않았습니다. 1911년 신해혁명이 발발하며 청 제국은 마치 로마 제국의 말기때처럼 급격하게 봉건제처럼 분권화하고 지방 군벌들이 반란, 내전, 군부 쿠데타가 끊이질 않으면서 행정권은 급격히 와해되었습니다.


결국 1912년 2월 12일 아이신기오르 푸이 황제는 황태후 유황태후의 대필을 통해 퇴위 조칙을 발표하였습니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때 폐위당하고 단두대에서 처형된 국왕인 루이 16세와는 달리, 푸이 황제는 이때 중화민국 정부와 청 제국 황족 사이에 체결된 청 제국 황족우대조건에 따라 아이신기오르 푸이 황제는 황제의 칭호를 유지하며 자금성 내부에서 생활할 수 있는 권리는 가져왔습니다.



퇴위 이후에도 푸이 황제는 자금성 안에서 여전히 황제로서 대우받으며 생활했습니다. 이를 소조정이라 부릅니다. 그는 호위 군인들에 둘러싸여 대제국의 부활을 꿈꾸는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그때 1917년 장훈이라는 군벌이 쿠데타를 일으켜 푸이를 다시 황제로 복위시키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를 장훈복벽이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도는 불과 12일 만에 중국 한족 공화정 지지 세력에 의해 진압되었고 푸이는 다시 퇴위 상태로 돌아갔습니다. 이 사건은 푸이에게 황제라는 직위가 한족 세력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언제든 이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24년 군벌 풍옥상이 북경 정변을 일으키며 청 제국 황족 우대조건을 파기했습니다. 푸이는 강제로 자금성에서 쫓겨나 순친왕부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하지만 몇백년간 한족들을 식민 지배한 침략자이자 식민 주의자였던 청제국 황제들의 후손인 푸이에 대한 분노의 감정이 강했던 한족들은 끊임없이 암살자들을 보내 푸이를 암살하려고 했고 푸이는 계속된 암살의 위협을 느끼고 일본 공사관으로 은신했다가 천진의 일본 조계지로 이주했습니다.


푸이는 천진에서 근대식 생활을 즐기면서도 자신을 황제로 예우해주는 일본 측 군인사들과 긴밀하게 접촉했습니다. 일본 관동군은 푸이를 향후 만주국의 황제로 추대하려고 그를 정중히 대우하며 환심을 샀습니다. 특히 일본의 공작원 도이하라 겐지는 푸이에게 만주에 황도낙토를 건설하자는 제안을 지속적으로 건넸습니다.









1931년 9월 18일 일본 관동군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 전역을 점령했습니다. 그때 푸이는 자신의 조상의 성역인 만주에서 다시 황제가 될 수 있다는 야욕을 가지고 관동군의 제안을 승낙했습니다. 1931년 11월 푸이는 일본군들의 삼엄한 경호와 비밀 작전 속에 천진을 탈출하여 만주로 향했습니다.


1932년 3월 1일 그렇게 푸이와 일본의 기획 아래 만주국이 건국되었습니다. 초기에는 황제가 아닌 집정이라는 직함으로 취임했습니다. 만주국은 황도낙토와 5족협화(만주족, 한족, 중앙아시아 튀르크인, 일본인, 조선인의 화합)를 기치로 내걸었습니다. 하지만 실제 군사권과 행정권은 관동군이 쥐고 있었으며 모든 주요 정책은 일본인 관료들에 의해 결정되었습니다.


1934년 3월 1일 푸이는 마침내 만주국의 황제로 즉위하였으며 연호를 강덕이라 정했습니다. 이로써 그는 강덕제가 되었습니다. 푸이가 만주국 황제로서 수행한 역할은 일본의 침략 전쟁을 지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관동군의 요구에 따라 만주국의 자원과 인력을 일본의 전쟁 수행을 위해 동원하는 칙령에 서명했습니다. 또한 만주국 군대를 일본군 휘하에 배치하여 중국 본토 점령 시도에 협조하게 했습니다. 이렇게 푸이가 일본군을 지원한 이유로는 중국 본토에 한족들을 공격하여 없애고 다시 베이징에 자신의 대제국을 건국하려는 푸이의 야욕이 있었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image (3).jpg 만주국의 황제가 된 아이신기오르 푸이는 수많은 제국주의 악행들을 자행했다.


푸이는 만주국 내부에서 자행된 생체 실험 부대인 731부대의 존재나 민간인 강제 동원에 대해 직접적인 명령을 내리지는 않았을지라도 제국의 수장으로서 이를 묵인하고 정당화하는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만주국 국무원 산하의 모든 의사결정 기구는 일본인이 실권을 쥐고 있었으나 만주국 황제인 푸이의 승인 없이는 어떠한 형식적 절차도 완성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즉, 731 생체실험 부대도 결국 푸이가 직접 주도하지는 않았더라도 그의 관여 혹은 허락없이는 개시될 수가 없었기에 그의 영향에 의해 시작된 악행인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푸이는 일본의 진주만 공격 이후 대동아전쟁 지지 선언을 발표하며 제국주의의 전면에 섰습니다. 그는 일본을 직접 방문하여 소화 천황과 우의를 다졌고 만주국 국민들에게 일본 제국은 우리의 동맹국임을 강요했습니다. 이는 푸이가 자신의 황제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협력한 측면이 있음을 시사합니다. 그렇기에 세계 역사학계에서도 아이신기오르 푸이를 제국주의자, 전쟁범죄자로 보는 시각이 많습니다.












1945년 8월 소연방이 만주로 진공하며 만주국은 순식간에 붕괴했습니다.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자 푸이는 8월 17일 통화에서 황제 퇴위 선언을 했습니다. 이로써 청제국의 황제에서 퇴위된 푸이는 또 다시 만주국의 황제에서 퇴위된 것입니다. 푸이는 자신의 제국주의 전쟁범죄가 국제 사회에 알려지면 비난을 피할 수 없었기에 황급히 일본으로 망명하기 위해 심양 공항으로 이동했으나 그곳에 기다리고 있던 소연방군에게 체포당했습니다.


푸이는 소연방의 하바롭스크 수용소로 압송되어 약 5년 동안 전쟁 포로 생활을 했습니다. 이 기간 중 1946년 도쿄에서 열린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전범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했습니다. 당시 재판 기록에 따르면 푸이는 자신이 일본 관동군의 압박에 의해 강제로 황제가 된 것이며 모든 범죄는 일본군의 책임이라고 주장하며 자신을 변호했습니다. 그가 자행한 전쟁 범죄 혐의를 피하려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푸이가 직접 관여하거나 굳이 하지 않아도 됐는데 적극적으로 나서서 제국주의 전쟁범죄들을 했던 푸이의 악행의 정황이 속속 밝혀지면서 푸이의 이같은 변호는 거짓말임이 서서히 밝혀지게 되고 그도 결국 일본과 같은 "또 다른 제국주의자"가 되어 중국을 재정복하려고 했다는 정황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나 1950년 중국이 결국 자신들이 직접 재판을 하겠다면서 소연방은 푸이를 신생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인도했습니다. 그는 무순 전범 관리소에 수감되었습니다. 이곳에서 푸이는 죄수 번호 981번을 부여받고 자신의 제국주의 악행들을 반성하는 사상 개조 과정을 거쳐야 됐습니다. 푸이의 자서전 "나의 반생(1964)"은 이 시기 그가 제국주의자였음을 반성하는 것, 과오에 대한 자아비판을 담고 있습니다.


그는 사상 학습을 통해 제국주의 사상을 씻어내고 일반인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겪었습니다. 중국은 마지막 황제인 푸이를 처형하기보다는 사회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홍보하기 위한 선전 도구로 활용하고자 했습니다.













1959년 푸이는 모택동의 특별 사면령에 의해 석방되었습니다. 그는 북경 동물원, 식물원의 정원사로 배치되어 평범한 국민으로서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1964년에는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의 문사 자료 연구원으로 위원직을 맡기도 했습니다. 그는 평민 신분으로 리수셴과 재혼하여 인생을 보내다가 1967년 신장암으로 사망했습니다.


푸이가 만주국 황제로서 행한 악행들은 명백히 제국주의자였으며 그 과정에서 만주 지역의 수많은 군중(조선인 포함)들이 고통받았습니다. 그는 한때 거대한 제국을 중국에서 다시 건국하려고 했으나 제국주의자, 전쟁 범죄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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