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동남아시아 인종을 묘사한 기록들 "벌거벗음"

조선시대의 동남아시아 인종을 묘사한 기록들

by 바다의 역사




문명국이었던 조선과 미개인으로 여겨졌던 동남아시아 인종의 직접적인 접촉, 사건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은 조선 초엽인 태조 시기인 1393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2년 6월 15일 기사에 따르면 섬라곡국(Siam, 현재의 태국)의 사신인 장사도 등이 고려 말에 이어 조선에 도착하여 예물을 헌납했다는 기록이 존재합니다. 이를 보아 군사력이나 영향력에서 당시 조선이 태국보다 우위에 있음을 알려주는 사건입니다. 이는 조선이라는 신흥 국가의 건설을 주변국에 알리고 교역을 시도한 사건입니다.


당시 중국 한족인 장사도가 데리고 온 동남아시아 일행은 소목 1천 근과 후추 1천 근 등을 바쳤으며 태조는 이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의복을 하사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조선 정부는 동남아시아 인종의 존재를 명확히 인지하게 되었으며 이들의 외양과 풍습에 대한 단편적인 관찰이 기록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태종과 세종 대에도 유구국(오키나와)을 매개로 하거나 직접적인 표류를 통해 동남아시아 인종과의 접촉이 지속되었습니다.


조선시대 동남아시아 인종에 대한 기록은 크게 세 가지 경로로 분류됩니다. 1째는 섬라곡국이나 자바 등지에서 온 공식 사절단의 기록입니다. 2째는 표류하여 조선 해안에 도달한 동남아시아인들에 대한 문초와 송환 기록입니다. 3째는 조선인이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표류하여 그곳의 인종과 풍습을 보고 돌아와 남긴 문견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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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사료에 나타난 "동남아시아 인종들"의 모습을 묘사한 기록들은 공통적으로 죄다 피부가 검고, 코가 납작하며, 눈이 깊으며, 체구가 작다는 특성으로 요약됩니다. 조선인들은 하얀 피부에 콧날이 날카롭고 뾰족한(동남아시아인보다) 조선인과는 확연히 다른 동남아시아 인종의 검은 피부, 납작한 코 같은 생물학적 특성들을 처음에는 재밌고 신기하게 여겼으나 유교적 세계관 아래에서 이들을 중화 질서의 바깥에 있는 이민족으로 규정했습니다. 특히 조선 중기에 일본군에게 전쟁 포로로 끌려갔다가 일본 국제 무역상에게 팔려 베트남으로 가게 된 진주 출신의 선비인 조완벽의 베트남에 대한 기록이나 후기에 홍어장수 문순득의 표해시말과 같은 기록은 당시 필리핀의 의식주와 언어를 매우 세밀하게 담고 있어 인류학적 가치가 높습니다.











동남아시아 인종을 상세히 기록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19세기 초 문순득이라는 신안 지역 상인의 표류 사건입니다. 정약전의 저서 "표해시말(1805년)"은 문순득이 1801년 홍어 장사를 하러 나갔다가 춥고 거센 북태평양의 풍랑을 만나 유구국과 여송(필리핀) 그리고 안남(베트남)을 거쳐 돌아온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이 기록은 이전의 국제적 시각으로서 오로지 동남아시아의 국가나 군대 같은 전체적인 모습에 대해서만 기록한 조선왕조실록 기사와 달리 동남아시아 인종 원주민들의 생활상, 문화까지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문순득은 여송(Luzon).. 즉 필리핀인들의 언어를 채록하고 그들의 의복 구조와 식사 방식 그리고 가옥의 형태를 설명했습니다. 이는 조선 지식인들이 동남아시아 인종을 단순한 남만의 범주를 넘어 구체적인 문화적 실체로 인식하게 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조선 초엽에는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조공 질서 안의 일원으로 강제 편입시키려 노력했습니다. 세종실록에 나타난 조와국(자바) 사신에 대해서 그들의 벗은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은 조선인들이 동남아시아 인종을 문명화시켜서 옷을 입혀야 한다는 기록이나 유구국을 통한 동남아시아 물품의 유입은 이러한 역사적 맥락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대항해시대가 열리고 특히 19세기 근현대 시기에 접어들면서 해상 세력이 동남아시아를 접수하면서 조선과 이 동남아시아의 직,간접적인 외교적 접촉은 줄어들었습니다.


이 시기부터는 서양 세력과의 결혼을 통해 핏줄이 섞인 필리핀 인종에 대한 묘사가 나타납니다. 17세기 하멜 표류기나 이후 서학의 유입 과정을 통해 필리핀 인종은 서방인의 노비나 선원으로 활동하는 모습이 조선에 전해졌습니다. 이로 인해 초엽에는 조선은 나름 동남아시아 인종을 나름 자신들의 틀 안으로 편입시키려고 좋게 보려고 했으나.. 그런 이미지는 점차 사라지고 동남아시아 인종을 피부색이 검고 서양인의 부림만 받는 하층민이라는 인식이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서 형성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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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사료에서 동남아시아 인종의 신체적 묘사는 매우 구체적입니다. 성호사설이나 성소부부고 등 지식인들의 문집에서는 동남아시아 인종들을 검은 이빨이나 검은 피부, 작은 코, 나체(벌거벗음) 등으로 설명, 기록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는 동시대의 중국인 한족, 유럽인들이 동남아시아 인종(특히 필리핀 인종)에 관해 묘사한 기록들과도 일치하는 공통점입니다. 특히 동남아시아의 덥고 습한 열대 기후에 적응한 이들의 의복 문화를 조선의 예법과 대비시켜 기록했습니다.


문순득의 표해시말에는 여송(필리핀) 사람들의 생김새에 대해 피부가 검고, 눈이 둥글며, 코가 작고, 머리카락이 짧고 곱슬거린다는 묘사가 등장합니다. 또한 이들이 밥을 먹을 때 식기 도구가 없는지 맨손만을 사용하거나(이는 동시기의 스페인 왕국이나 포르투갈 왕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얇은 천으로만 알몸을 가리거나 아예 벌거벗었다는 방식 등을 기록했습니다. 이는 조선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매우 생소한 모습이었습니다.


오늘날 역사학계에서는 조선시대 기록에 나타난 동남아시아 인종 묘사를 단순한 타자화의 산물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시 조선이 가졌던 세계관의 확장 과정을 보여주는 지표로 해석합니다. 특히 문순득의 사례는 일방적인 관찰이 아닌 상호작용의 산물로서 동남아시아 구어체 언어가 조선의 문자로 기록된 최초의 사례 중 하나로 꼽힙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조선 정부가 표류해 온 동남아시아인들을 심문할 때 사용했던 문견록은 그들의 국적을 확인하고 환하기 위한 행정적 목적이 컸습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세계 지리 지식인 직방외기나 해국도지를 인용하며 동남아시아의 여러 섬들과 그곳의 인종들에 대해 서술했습니다.


조선시대 문헌에서 나타나는 토인(土人)이라는 단어는 한자 그대로 흙 토 자와 사람 인 자를 사용하여 해당 땅에서 태어나 거주하는 사람 즉 토착민을 의미하는 중립적인 단어로 출발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등 관찬 사료에서 이 용어는 주로 특정 지역(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 흑인)의 원주민이나 변방의 주민을 지칭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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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시아 인종에 대한 묘사는 주로 남만 혹은 서역인 등의 범주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남만은 전통적인 고대 중국 한족의 세계관인 "화이관"에 근거하여 "남쪽의 미개한 종족(동남아시아 인종)"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으나 실제 교류와 표류 사건을 기록할 때는 구체적인 국명인 섬라곡(태국)이나 조와(자바) 혹은 점성(베트남 중부) 등으로 명시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근대 이후 토인이라는 단어가 미개인이라는 멸칭으로 변질된 것은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의 인류학적 분류와 식민주의적 시각이 유입되면서 서구의 원시인 개념과 결합되었기 때문입니다. 조선 전~후기 사료에서의 토인은 현대적 의미의 멸칭보다는 지리적 원주민이라는 정보 전달의 목적이 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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