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 커플, 부부의 데이트 코스, 허니문 신혼 여행지로 가장 인기가 많은 곳은 어디일까요? 아무래도 덥고 바다가 맑고 좋은 곳이겠지요? 그렇다면 남아메리카나 남태평양, 남아프리카, 동남아시아 같은 남반구이거나 남반구에 가까운 "적도" 근처일 텐데.. 몰디브? 말레이시아? 필리핀? 멕시꼬? 브라질? 호주?
이렇듯 남녀의 커플, 부부의 데이트, 신혼 여행지로 항상 거론되는 곳에 꼭 빠지지 않을 만큼 따뜻하고 살기 좋은 곳이 호주가 아닐까 싶은데요, 그래서 오늘은 호주의 역사를 들고 와봤네요. ^^
(A) 오스트레일리아의 탄생과 원주민
구석기 수준이었던 호주 원주민들이 주로 쓰는 고대 로마군같은 투창
오스트레일리아(호주)의 원주민인 "아보리진"은 약 5만 년 전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같은 적도(태양이 지나가는 곳)에 가까운 해양부 동남아시아 열대 섬에서 이주해 온 태곳적의 처음 태어난 인류의 후손으로, 지구상의 비(非)아프리카 인종 가운데 가장 오랫 동안 잉카인, 아즈텍인, 브라질 아마존 원주민, 폴리네시아 원주민과 더불어 구석기 생활을 유지했어요. 이들은 파푸아뉴기니의 원주민과 유전적 유사성을 공유하면서도 수만 년 동안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서 생활되었으며 약 500개 이상의 민족들이 있었으며 최소 약 250여 개의 언어들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요. 주로 호주 파푸아어족, 피진어족 등의 다양하고 복잡한 언어들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요. 원주민들마다 각기 다른 언어들이 있었지요. 먹거리들로는 도마뱀 같은 야생동물들과 호주 고유 꾸안동, 야꼼바 등의 열대 열매들을 먹었고, 잎벌레 유충인 윗쩨띠 벌레, 물고기, 그리고 지역마다 아보리진 야생 야꼰, 꿈꽈라라는 고구마 같은 유사 식물 등을 먹었어요. 이런 토종 식물들과 단백질들을 먹으며 "부시 터커(Bush Tucker)" 식생활은 약 5만 년간 유지했다고 해요.
호주 원주민들은 주로 비바라는 모래돼지, 카카두 오리, 악어 같은 생물들과 와붕구라는 해양 생물을 잡아 먹었고, 식물로는 꾸안동, 레몬 마뜰 등의 야생 베리들을 먹었고, 와리스 쥬얼리, 야꼼바 등의 뿌리 식물, 부냐 열매 같은 견과류 열매, 와리갈 그린, 멜로니타 같은 잎채소을 즐겨 먹었어요. 특히 윗쩨띠(Witchetty) 벌레나 흰개미, 멜랄레우카 나무에서 채취해버린 잎벌레 같은 벌레들도 주요 단백질 공급원이었어요. 이런 식재료들은 돌절구로 으깨거나 숯불에 구워 조리했으며, 땅굴에 구덩이를 파서 조림하거나 수증기로 삶기도 했어요. 현재도 레몬마틀, 사봉 등의 허브들은 향신료와 약재로 활용되요.
고고학적으로는 약 5만~6만 년 전쯤에 인류가 호주에 도달했는데, 그 시절에 열대 우기 시절 인도네시아 열도와 뉴기니를 거쳐 카다무카(안냉랜드) 등으로 배를 타고 이주했을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물론 역사학이 훨씬 권위가 높고 고고학이라는 것 자체가 신빙성이 떨어지는 학문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단순히 고고학적인 걸로만 판단하긴 힘든 게 현실입니다만. 여하튼 원주민들이 처음 들어온 곳은 지금 호주 북쪽과 북서부 지방으로 추정되며 그곳을 마두제두베베(Madjedbebe)라고 부른다고 해요. 이후 수만 년에 걸쳐 오스트레일리아 여러 곳으로 퍼져나갔어요. 오스트레일리아는 긴 역사 동안 구석기 시대였기 때문에 농업과 금속기술은 전혀 발달하지 못해서 청동 무기조차 만들지 못했지만, 독자적인 구~신석기 문화를 만들며 재밌는 생활 양식을 유지했다고 해요.
(B) 뉴질랜드 원주민과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차이점, 성격, 특성
뉴질랜드의 원주민들인 "마오리(Māori)인"들은 동부 폴리네시아 혈통의 이주민으로, AD 약 1250~1300년쯤 폴리네시아 항로를 따라 뉴질랜드에 정착한 사람들의 후손으로 추정되요. 이들은 말레이 폴리네시아어인 폴리네시아어족 문화권으로 감자, 돼지, 닭 같은 가축과 고구마(쿠마라), 야자, 코코넛 같은 열대 식물들을 가져와 식생활을 했어요. 반면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은 수만 년 전 말레이시아쪽에서 왔으며 적도 부근의 섬들과는 문화, 언어적으로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어요. 즉 뉴질랜드 원주민은 "폴리네시아계(말레이계)"이고 호주 원주민들은 구석기 시대 기반의 완전히 동떨어진 독자적 문화권의 원주민들이라고 볼 수 있지요. 지리적 인접에도 불구하고 두 민족은 서로 다른 시기에 서로 다른 조상으로부터 이주했기 때문에 외모, 언어, 문화가 완전히 다른 "인종"이에요.
전반적으로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이 뉴질랜드나 폴리네시아 원주민들과 똑같은 점은 성문화였어요. 그들의 성문화는 잉카, 아즈텍, 다른 폴리네시아 원주민들이나 필리핀 원주민 사회처럼 지구상에서 가장 개방되었으며 성행위라는 것을 현대적 개념의 성(性愛) 문화 개념과 다르게 사회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는 장치로 봤어요. 어째서냐면 이런 오스트레일리아나 남태평양의 폴리네시아 원주민, 필리핀, 브라질 아마존 원주민, 잉카, 아즈텍 같은 구석기 사회는 글자라는 개념도 없었고 알몸으로 생활했고 종교의 힘이 강했기 때문에 사회 공동체 내에서 만약 분란이 발생할 경우 그것을 해소할 방법이 없었어요. 우선 "법"이 없었기 때문이에요. 그렇다고 미국의 서부 개척시대같은 무"법"지대처럼 법이 없는 시대였다 하더라도 어떤 룰이나 규칙, 질서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마치 정글 속의 고릴라나 오랑우탄처럼 그저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살아 갔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해요.
어째서냐면 무기도 그들은 딱히 청동 무기조차 없어서 싸워서 누구를 제대로 죽일 수 조차 없었고 뭔가 싸우거나 할 동기도 없었고 게다가 남반구의 기후도 좋은 열대 섬들이 많아서 먹을 게 풍부하고 살기가 좋아서 굳이 싸울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에요. 그렇기에 오스트레일리아나 남태평양의 폴리네시아 원주민, 필리핀, 브라질 아마존 원주민, 잉카, 아즈텍 같은 원주민들은 싸움에 익숙하지 않아서 싸웠을 때 해소하는 게 없어서 그런 의미에서 성행위를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해요.
그렇기에 1번씩 오스트레일리아나 남태평양의 폴리네시아 원주민, 필리핀, 브라질 아마존 원주민, 잉카, 아즈텍 같은 이런 남반구의 열대 원주민 사회는 종교 의식을 하면서 사회적 행위로 남녀가 아무나 성행위를 하면서 사회적인 공동체를 유지했던 것이지요. 또 이런 오스트레일리아나 남태평양의 폴리네시아 원주민, 필리핀, 브라질 아마존 원주민, 잉카, 아즈텍은 딱딱한 성 역할 규정보다는 공동체와 종교 의식으로서 남녀가 아무나 성행위를 하는 특성을 지녔어요. 우리가 보기에는 난잡한 난교로 보여서
(C) 손님의 방문과 정착
기록에 써진 "호주 대륙 발견"은 대항해시대 이후 만들어진 유럽 해양세력 중심으로 만들어졌어요. 16세기까지 세계 패권국이었던 명나라가 완전히 몰락하면서 덩달아 스페인 왕국, 포르투갈 왕국도 몰락하였고 이제 해양 세력의 후발 주자였던 네덜란드에게 기회가 찾아오게 되었지요. 물론 네덜란드가 패권국이 되었다는 소리는 아니에요. 하지만 네덜란드는 명나라처럼 막강한 군사력, 기술력, 경제력으로 세계 패권국이 되었다가 망한 것도 아니었고, 스페인 왕국이나 포르투갈 왕국처럼 경제적으로 파산이 된 것도 아니었어요. 네덜란드는 최초의 주식회사인 "동인도회사"를 만들어서 짧고 굵었던 명나라, 스페인 왕국, 포르투갈 왕국들과는 달리 "가늘고 긹게 가는 것"을 택했어요.
어쨌든 그 전까지 호주 대륙은 누구에게도 발견되거나 개척이 되지 않았어요. 세계 패권국이었던 명나라의 군사 전략은 항상 동북아시아와 중앙아시아였고 명나라는 영락제 시대때 정화(鄭和)의 대함대가 세계의 해양 패권을 지배한 적이 있었으나, 그 이후로는 계속해서 막강한 대륙 세력이었으니까요. 또한 명나라의 해군 군함들이나 해적들도 비교적 그나마 문명이 있었던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침공하거나 약탈하는데 주력했지 동남아시아 밑의 문명이 없는 구석기 사회였던 호주 대륙 같은 곳에는 관심조차 없었으니까요.
스페인 왕국이나 포르투갈 왕국의 경우는 이미 교역이 어느정도 안정화에 접어들었기에 더 이상 다른 섬을 발견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어요. 그렇게 명나라, 오이라트 제국, 후금제국, 오스만 투르크, 무굴제국, 스페인 왕국, 포르투갈 왕국에 의해 국제 질서가 자리잡혔다가 여진족 기병대를 이끄는 총사령관 누르하치가 명나라를 총공격하면서 명나라를 정복하여 청 제국을 건국하면서 명나라가 멸망하였고 스페인 왕국, 포르투갈 왕국도 사실상 경제적으로 파산하면서 국제 질서가 요동치기 시작하였지요.
그렇게 급변하던 국제 질서 속에 17세기 초, 네덜란드의 빌렘 얀손이라는 이름의 선장은 17세기인 "1606년" 케이프요크 반도의 부근에 있는 쿠린지 섬에 내리면서 첫 유럽인으로서 "오스트레일리아(호주)"라는 땅을 "발견"하게 되었어요. 물론 그러다가 같은 해 스페인 왕국의 탐사꾼인 "루이스 데 또렛쓰"라는 이름의 사람이 뉴기니와 호주 사이의 수로를 발견해서 항해했지요. 17세기까지도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들은 라틴 아메리카의 잉카인, 아즈텍인, 브라질 아마존 원주민, 그리고 다른 폴리네시아 원주민들과 필리핀 원주민들처럼 여성들은 가슴을 노출하고 생활했던 토플리스(Toplessness)로 다니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지구상에서 가장 습하고 무더운 열대 기후에 적응한 어쩔 수 없는 문화이며, 그렇기에 옷을 만드는 대신 알몸에 그림과 타투 등 신체 장식을 그리며 옷을 대신하하였지요. 이렇게 척보기에도 "구석기인" 같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은 당연히 총과 활, 화기 같은 원거리 열병기를 가지고 있는 네덜란드 군대들이나 스페인 군대들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어요. 기껏해야 흑요석의 돌멩이나 투창 따위를 가진 잉카 문명, 아즈텍 문명이 총, 활, 화기 같은 원거리의 열병기 장비를 가진 스페인 군대들에게 숙청을 당했던 것처럼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도 그럴 운명이 뻔했.. 는데 그러지 않았어요.
이후 수십 년간 다수의 네덜란드 선원들이 서, 북쪽의 오스트레일리아 해변을 따라 지도에 “새로운 네덜란드(New Holland, 뉴 홀랜드)”라는 이름을 남겼을 뿐 딱히 속국이나 조공국으로 삼으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어요. 어째서냐면 당시 스페인 왕국이나 네덜란드는 워낙 기술력과 경제력이 안 좋아서 이 호주라는 땅이 어떤 땅인지 알 수조차 없었고 하필 스페인인들이나 네덜란드인들이 내렸던 곳이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가장 안좋은 곳이라서 그들은 딱히 이곳(오스트레일리아)이 사람이 살기에 적합하진 않았다고 생각해서 발견만 하고 가버렸거든요.
(D) 영국인 손님의 방문
어쨌든 어찌 저찌 그러다가 약 17세기 후엽쯤인 1688년쯤에 영국 사람인 윌리엄 댐삐어가 서부의 호주 지방에 오고 약 1770년쯤에 뭔가 음식을 잘할 것 같은 이름인 "제임스 쿡" 선장이 오스트레일리아의 동해안에 오면서 영국 땅으로 만들었어요. 비록 당시 유럽인들 입장에서 호주는 필요없는 땅이었지만 당시 영국은 인구가 폭증하여 죄인들이 많아졌기는데 영국의 땅 자체가 워낙 좁아서 감옥을 더 만들 곳이 없었기에 하는 수 없이 감옥으로 쓸 남반구의 열대 섬이 필요했지요. 그러면서 이후 약 1788년 1월쯤에 영국의 배가 시드니(보타니 베이)쪽에 내리면서 호주를 죄인들을 보내는 유배지로 만들어 이 날을 기점으로 근대 호주의 탄생이 되었다고 해서 1월을 호주의 날이라고 해요.
18세기 이후 인도네시아의 마카사르(술라웨시 섬) 어부들은 해삼(트렝퐁) 어획을 위해 북호주 해안에 계절별로 방문하긴 했어요. 이 인도네시아인들은 호주 원주민들과 간접적으로나마 교류하며 도끼 등 동남아시아의 선진 문물들을 전했고 1907년까지 수백 척의 목제 배(프라우)로 호주 북부를 드나들었다고 해요. 다만 마카사르인도 영구적 식민 정착은 하지 않았어요.
약 19세기쯤에는 죄인들 이외에도 선진국, 강대국의 이민자들도 대거 들어왔어요. 영국 본토와 아일랜드 사람들이 농장, 도시 개발을 위해 대거 이주했고 1850년대쯤에는 금광 개발 시기에 광동성, 복건성 출신의 중국인들이 돈을 벌기 위해 지구 곳곳을 탐험하던 터라 마침 호주에 골드 러시가 터지면서 금이 넘쳐난다는 소문을 듣고 돈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아야 직성이 풀리는 중국인 답게 호주에 있는 금들을 싹쓸이 하고 싶은 욕망에 수많은 중국인들이 호주로 마구잡이로 이민을 왔어요.
이렇게 영국인, 중국인, 아일랜드들은 광부, 농장잡부, 시장 정원사 등으로 일하며 본인들은 경제적으로 이득을 챙기면서 호주도 경제, 사회가 발달하게 되었지요. 또한 영국인, 중국인, 아일랜드인들이 막대한 부를 얻자 그 소문을 들은 이탈리아, 그리스, 독일, 프랑스 등 여러 다른 서, 남유럽계 이민자들도 19~20세기에 걸쳐 많이 오기 시작했어요. 그야말로 미국과 함께 또 다른 "기회의 땅"이 탄생하게 된 셈이었지요.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들은 잉카인, 아즈텍인, 브라질 아마존 원주민들처럼 모계 사회였기에 일부 지방에서는 농경 사회와 달리 재산 축적이 적어 고대 이집트 왕국의 상층부처럼 다처제 등이 허용되기도 했어요.
(E) 호주 근대사와 이민 문화
약 18세기 후엽쯤인 약 1788년 이후쯤 영국 지배 아래 호주는 급격한 변화를 겪었어요. 영국인들의 출산율이 높아지면서 인구가 많아지자 죄인들을 가둘 옥이 필요했고 영국인들은 그곳을 호주라고 생각했지요. 약 1868년쯤 중단될 때까지 호주에 옥이 만들어졌고 많은 영국인들이 호주로 가서 농민들이 되거나 먼저 온 죄인들은 도시를 만드는데 참여하였지요. 그러다가 약 19세기 후반쯤에 미국과 함께 호주에 금이 발견되면서 "골드러시(금광 붐)"로 경제가 활성화되자 전 세계에서 이민자가 몰려들었다.
특히 돈 욕심이 세계에서 가장 강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가져가야 직성이 풀리는 중국인들 가운데 수만 명이 돈을 벌기 위해 지구상 곳곳으로 진출했고 호주에도 돈을 벌기 위해 무수하게 많이 와서 금 채굴과 철도 공사에 뛰어들었지요. 그 외 후발주자로 영국인, 아일랜드인, 독일인, 이탈리아인, 그리스인 같은 서구인들뿐만 아니라, 중국인과 같은 아시아인들인 중동의 아랍인, 서아시아의 이란인, 남아시아의 인도인, 한국인, 일본인 등 다양한 출신의 이민자들이 돈을 벌기 위한 꿈을 가지고 호주로 이민을 오면서 호주 사회를 다문화로 만들었지요.
그리고 약 20세기인 1901년 1월 1일쯤 호주는 6개의 연방화를 통해 독립된 연방국이 되었으며 이때 같은 습하고 무더운 남반구의 오세아니아 섬이었던 뉴질랜드는 가입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당시 호주는 경제가 부유해졌지만 아시아의 중국인, 아랍인, 인도인들이 많이 와서 돈을 많이 벌면서 상인적 기질이 워낙 강한 중국인, 아랍인, 인도인들은 곧장 많은 돈을 가지게 되었고 호주 사회의 최상위층으로 올라서면서 호주인들을 지배하게 되자 기존에 살던 호주인들은 대단히 위기감을 느끼며 "이민 정책"을 시행해 중국인, 아랍인, 인도인 같은 아시아인들이 호주를 지배해가는 것에 저항하기 시작했고 비(非)유럽권의 이민을 제한했으며 이 이민 정책의 시행으로 비(非)유럽인 이주민들이 가지고 있던 호주 내에서의 강했던 정치, 경제적 파워가 점차 원상복구되기 시작했어요.
(F) 일본 제국의 호주 식민지화 시도
시간이 흘러 20세기 초부터 호주는 중국, 소련, 영국, 미국을 필두로 한 연합국으로 세계 대전(제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어요. 특히 제1차 대전의 1915년에 일어난 갤리폴리 전투에서 "ANZAC(호주, 뉴질랜드인들)"의 슬픈 희생은 호주 국민정체성을 만들어줬지요. 호주는 약 60만 명이 참여해 6만 명 이상이 사망하는 큰 피해를 입었어요.
그러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제국주의로 무장 일본 제국이 미국 본토를 침공하고 동남아시아 전역을 식민지로 만든 것도 모자라 남반구까지 내려와 남태평양의 무수히 많은 오세아니아 국가들을 식민지로 만들고 호주 대륙까지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넘보기 시작했어요. 일본 제국의 파죽지세 같은 남진의 위협 속에서 호주 대륙의 북부가 일본 제국의 공군기의 공습을 당하고 다윈이 폭격당하면서 일시적으로 일본 제국에게 정복당하자, 호주군들은 끈질기게 저항하였고 결국 일본 육군의 호주 대륙 본토 상륙 침공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어요.
일본 제국의 호주 대륙 식민지화가 무산이 되면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호주는 전후 1950년~1960년대 미국, 유럽 등에서 이민을 많이 오자 경제도 고도 성장하면서 또 다시 경제 붐이 발생했어요.
울버린으로 유명한 휴잭맨과 니콜 키드먼 주연의 "오스트레일리아"가 바로 일본제국의 호주 대륙 식민지화 시도를 다룬 영화
(G) 호주 원주민의 슬픔
호주는 대만(타이완) 섬(16~17세기 명나라 한족이 대만 섬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대만 섬을 차지), 일본(고대시대 한반도 도래인들이 아이누족들을 밀어내고 일본 열도를 차지), 미국(영국 청교도인들이 인디언들을 쫓아내고 아메리카 땅을 차지)의 사례들처럼 이주민 세력이 원주민들을 밀어 내거나 내쫓거나 숙청하여 그 땅을 차지한 대표적인 사례들 가운데 하나에요. 그렇기에 호주도 그로 인해 원주민들의 인구가 급감하고 토지를 빼앗겼어요. 그렇기에 매우 뒤늦은 약 20세기 후반쯤에 이르러 비로소 호주 원주민 인권 운동이 생겨나고 있어요. 약 1967년쯤의 국민 투표로 헌법상 원주민 차별 조항이 폐기되었고 1992년 "모보(Mabo) 판결"로 그제서야 비로소 원주민의 토지 권리가 인정되었지요. 2008년쯤 호주 정부는 뒤늦게 원주민들에게 정식으로 죄송하다며 사과를 했고 문화와 언어의 보존 사업이 활발해졌어요. 그렇기에 현재 호주는 나름의 따뜻한 남반구의 복지 국가로 발전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