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 태국의 역사

미얀마와 베트남의 침입과 영향으로 얼룩진 태국 역사

by 바다의 지정학



1) 태국의 기원전


anlsex.jpg 대만 섬 원주민의 이동 경로.. 배를 물에 띄워 아프리카, 남아메리카까지 이주했습니다.


로망스어(Romance languages)를 쓰는 민족인 남유럽의 스페인, 포르투갈인들을 로망스족(Romance peoples)이라 부르고.. 한반도의 한국어를 쓰는 민족을 "한민족"이라고 부르고.. 동유럽, 북유럽의 강력한 전사들을 "바이킹족", "슬라브족"이라고 부르고.. 아일랜드 섬의 민족인 아일랜드인을 "켈트족"이라고 부르고.. 영국인들을 "엥글로섹슨인"이라고 부르듯이 태국인은 "타이족"이다. 하지만 이 글에선 편의상 타이족이 아니라 태국인이라고 쓰도록 할테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현재 태국 영토에는 수십만 년 전부터 인류가 거주한 흔적이 발견된 것으로 추정된다. 람빵 지역에서 발견된 "람빵 맨(호빵맨이 아니..)" 화석은 호모 에렉투스의 존재를 증명된다고 추정된다. 기원전 약 4000년경에는 청동기를 제작한 문명 중 하나가 태국 북동부의 반치앙 유적지에서 번성했다고 태국에서는 주장하고 있다. 어쨌거나 이들은 농경 기술을 발전시키고 정교한 토기를 제작하며 독자적인 문화를 꽃피웠던 것 같다.


하지만 이들이 태국인인지는 아직 확인이 안된다. 단순히 태국 영토에 살았다고 죄다 태국인일 수는 없는 것이다. 오늘날 튀르키예인들의 탄생지는 "몽골"이기 때문에 현재 튀르키예 지역의 고대 역사는 튀르키예와 사실상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태국인은 본래 동남아시아의 타이완(대만) 섬에 거주하던 원주민들이었다. 이는 태국인뿐 아니라 동남아시아의 모든 민족들도 마찬가지다. 아니.. 동남아시아뿐만이랴.. 저 멀리 바다 건너 아프리카의 마라가스카르의 원주민들이나 남태평양의 수많은 열대 섬들에 퍼져있는 민족들.. 우리가 디즈이 영화 "모아나"에서 본 사모아인 같은 폴리네시아인이라던가.. 죄다 동남아시아 타이완(대만) 섬 원주민이 가서 정착한 곳들이다.


그런고로.. 크라다이어족과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은 잠깐 동일 계통의 언어였던 적이 있으나 크라다이어족은 한장어족, 오스트로아시아어족들의 영향으로 분화하면서 달라졌다. 이뿐만 아니라 얼굴 문신과 치아 발치 문화, 뱀 숭배 등의 종교적 공통점도 있다.


어쨌거나 대만 섬 원주민들은 바로 동남아로 내려가진 않고 처음에는 중국 대륙의 최남단 지역에 촌락을 이뤄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도 확실하진 않다. 추정일뿐이다. 동남아에서 바로 태국으로 갔다는 주장도 있으니 학계에선 아직도 논쟁적인 사안이다. 어쨌거나 맞다는 전제 하에.. 중국 대륙 최남단 지역인 홍콩, 마카오 같은 지역들은 사실상 섬과 같을 정도로 중국 대륙과도 멀리 떨어져 있으며 가장 남쪽에 위치해 있었고 이 지역들은 원래 중국 한족의 영향권도 아니었다. 이 마카오, 홍콩 같은 지역들은 본래 동남아시아 인종들이 거주하던 곳이었다. 엄밀히 따지면 그들이 원주민들인 셈이다.


그러다가 기원전 춘추전국시대때 초나라의 침공에 의해 월나라가 정복당하자, 월나라인들은 대거 남진을 하기 시작하여 이때 이미 서남쪽으로 대대적으로 진출하여이 현재의 광시좡족자치구~북부 베트남까지 장악하였다.






2) 태국의 고대 시대




한무제.jpg 진시황제에게 항복한 태국 왕을 Ai로 그려봤다


그리고 최초의 통일제국을 숙원을 완수한 진시황제는 대대적인 영토확장을 하면서 남진하였고, 한무제에 이르러서는 엄청나게 공격적인 영토 확장을 하면서 중국 대륙 최남부를 정복하기 시작했다.


물론 한무제 시대때 중국 최남단 대륙까지 정복하긴 했으나 엄청나게 폭력 행위들을 하면서 그곳 원주민들을 말살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8세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현재 남중국의 광시좡족자치구에 본래 거주하던 타이계 이민족들이 대당제국(당나라) 본국이 안산의 반란 사건으로 정신이 없는 틈에 독립을 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고, 이에 완전히 분노한 대당제국(당나라)의 황제들은 반란을 일으켜 독립운동을 꾀한 타이계 이민족들을 학살하고 완전히 노예로 만들고 그 지역을 완전한 식민지화시킬 것을 명령했다.


이 황제의 황명에 의해 결국 그나마 근근히 살아가던 타이계 이민족들은 학살과 노예화, 식민지화의 공포를 피해서 인도차이나 반도로 내려왔다. 물론 이 시기까지도 다 내려온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여기서 1가지 사실을 알 수 있는데, 타이계 민족들은 본래 동남아시아의 원주민은 아니란 소리다. 즉, 당시에 태국 지역에는 이미 다른 원주민들이 살고 있던 것이다. 그렇다. 타이계 이민족들은 현재 태국 지역으로 물밀듯이 내려와서 본래 살고 있던 토착 인종들을 거의 다 죽이고 그곳을 먹음으로써 "타이족"이 되었고, 미얀마로 내려간 타이계 민족은 "샨족"이 되었고 기타 동남아 지역에 내려간 이들과 연관지어서 크라다이어족이라고 불린다. 그래서 지금도 태국어랑 미얀마어랑 묘하게 비슷한게 이런 이유 때문이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기원후 초기 세기부터 이 인도차이나 반도 지역은 인도의 종교, 예술, 정치 체제의 영향을 깊이 받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기에 태국이나 미얀마는 중국 문화의 영향보다는 인도 문화의 영향이 훨씬 더 지배적이다. 아마 해상 교역을 통해 힌두교와 불교가 전파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현재까지도 태국 문화, 정신 그 자체의 근간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이 시기 태국 지역의 중부와 북동부에는 타이계 민족이 아닌 다른 민족이 세운 "드바라바티 왕국(Dvaravati, 6~11세기)"이 번성했다.


다시 말하지만 아직 이 시기에는 대당제국이 타이계 이민족들을 완전히 학살, 노예화, 식민지화하는 정책을 펼치기 전이었기 때문에 타이계 이민족들이 인도차이나 반도로 내려오기 전이어서 태국 지역에는 타이계 민족들이 거의 살지 않았다.


그러니 이 드라바라티 왕국은 태국 지역에 세워졌던 왕국이지만 현재 태국에서 가장 많은 민족인 타이족의 역사라고 볼 순 없다. 태국 지역의 역사에 가깝다. 이 드바라바티 왕국은 인도로부터 테라바다 불교를 받아들이고 불상, 법륜 등 뛰어난 예술품을 남기며 이 지역의 문화적 중심지 역할을 했다.


이렇듯 태국은 인도 문화의 영향이 강하지만, 베트남은 중국 문화의 영향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이 둘은 전혀 다른 경로, 루트, 방법을 통해 문화가 침투되었는데 베트남이 중국 문화의 지배를 당하게 된 것은 막강한 군사력에 의해서다. 쉽게 말해 고대 중국 한무제가 베트남을 침략하여 식민지로 삼고 "한7군"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한무제는 동시에 고조선도 침략하여 정복, 멸망시킴으로써 "한사군"도 설치했다.


어쨌든 이 무렵부터 고대 중국이 베트남을 1000년간 식민지화시켰고 그로 인해 베트남은 고대 중국의 문화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태국은 달랐다. 인도가 태국을 침입한 적도 없었고 식민지로 만든 적도 없었다. 베트남은 고대 중국 한무제가 막강한 군사력으로 침략하고 식민지로 만들면서 중국 문화의 영향 하에 뒀다면.. 태국은 자연스럽게 힌두교, 불교라는 종교가 해상 교역을 통해 태국으로 들어오면서 그 과정에서 인도 문화로 바뀌었던 것이다. 즉, 고대 중국은 강제적으로, 인도는 자연적으로 동남아시아의 문화를 바꾼 것이다.


그래서 한국인이 베트남과 대만을 둘 다 여행가다보면 묘하게 이질적임을 느낄 수 있다. 분명 같은 동남아시아 국가인데.. 그리고 바로 옆에 있는데.. 문화가 완전히 다르다는 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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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그 외에도 남부 말레이 반도에서는 "땀브라링가 왕국"라는 해상 왕국과 북부에는 또 다른 왕국인 "하리뿐짜이(Hariphunchai)"가 탄생하는 등 이들은 중세시대 유럽처럼 느슨한 국가 체계를 하며 봉건제 형식의 만달라 체제 형태로 왕국을 운영했다.


그리고 타이계 민족들이나 비엣족이 각각 인도차이나 반도의 미얀마, 베트남, 태국으로 내려오기 전에 동남아의 주인은 사실상 크메르 문명이었다. 크메르 문명은 평화로운 문명으로 발전된 과학과 기술력으로 안정되게 문명을 통치했다.


이 크메르 문명이 바로 오늘날 캄보디아의 황금기라고 불리는 그 문명으로 크메르 르주의 그 크메르가 이 크메르다. 9세기부터 동쪽의 크메르 문명은 높은 문명 수준을 바탕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드바라바티를 포함한 태국 중부와 북동부 지역 대부분이 크메르의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 탓에 앙코르 와트로 대표되는 크메르의 건축 양식과 힌두교적 세계관은 이 지역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3) 태국의 중세 시대



타이 왕국의 성립과 발전 (13세기 ~ 18세기)


최초의 타이 왕국, 수코타이 (1238년 ~ 1438년)


타이계 이민족들이 대당제국(당나라) 황제의 타이계 민족 노예화, 식민지화, 학살 정책에 놀라 도망치면서 태국 지역으로 흘러들어오긴 했으나 아직까지 죄다 들어온 것은 아니었기에 타이계 민족들의 인구수는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러다가 세계사를 완전히 뒤바꾸는 엄청난 대사건이 발발한다. 바로 11~ 12세기에 걸쳐 타이족(Tai) 원주민들을 마지막까지 끈질기게 그들의 고향인 현재 중국 대륙의 최남부인 윈난성 일대에 버티고 있던 있었는데, 12세기부터 세계 정복에 성공하더니 세계의 패권을 장악한 세계 패권국 대원제국(원나라)가 중국 대륙 전역을 완전히 정복하면서 그야말로 한족을 비롯한 모든 이민족들을 대학살, 통제, 감시, 단속, 관할하기 시작했다. 이전의 당제국(당나라) 황제의 황명하곤 차원이 틀렸다. 세계 최강의 기동력을 가진 대원제국(원나라)의 기병대들에게 도저히 살아남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면서 그나마 남아있던 모든 타이계 원주민들을 비롯해 동남아시아 인종, 민족들이 13세기를 기점으로 완전히 동남아시아로 대이주를 하기 시작했다. 마치 게르만족의 대이동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것이 나비 효과가 되어 동남아시아 역사의 판도 전체를 바꿔버린다. 그동안 인구 숫자에서 밀리면서 크메르 문명에게 얌전히 고개를 숙이며 살고 있던 타이족들이 세계 최강의 제국이었던 대원제국의 타이계 민족 대학살 작전을 피해 동남아시아로 대이동을 하면서 인구수가 폭증했고 순식간에 동남아시아의 인구 구조가 뒤바뀐 것이다. 이제 공수가 교대가 된 것이다.


그러면서 1238년, 인구수가 폭발한 타이족들의 지도자가 된 "뽀 꾼 빵 끌랑 하오(Pho Khun Bang Klang Hao)"와 "뽀 꾼 빠 므엉(Pho Khun Pha Mueang)"이 손을 잡고 당시 크메르 제국의 전초기지이자 수도를 무력으로 점령하고 독립까지 선언했다. 그리고 "빨 끌랑 하오"는 "씨 인트라팃 왕(Sri Intraditya)"으로 올라서서 "수코타이 제국"의 문을 열었고, 크메르 문명은 이 시기부터 완전히 수코타이 왕국의 식민지나 다름없는 신세로 전락했다. 그리고 더 이상 크메르 문명은 빛을 보지 못하고 전근대시대까지 끈힘없이 미얀마, 베트남, 태국의 침입을 번갈아 밥먹듯 받으며 그야말로 인도차이나 반도의 명실상부한 "동네북"으로 전락했다.


오늘날 캄보디아인들이 태국인들에게 열등감과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건 국경 분쟁의 역사도 있지만 자기들의 황금기였던 크메르 문명을 끝낸 것이 태국이었다는 것도 크게 한몫한다. 물론 그렇게 크메르 문명을 끝낸 태국도 결국 미얀마나 베트남에게 끊임없이 침입받던 동네북이었지만..


여하튼 이런 수코타이 제국의 황금기는 제3대 왕인 "람캄행 대왕(Ramkhamhaeng the Great, 1279~ 1298년)" 시대에 열렸다. 그는 영토를 크게 확장하고, 스리랑카로부터 정통 테라바다 불교를 받아들여 국교로 삼았으며, 오늘날 태국 문자의 기원이 된 타이 문자를 발명했다. 그렇기에 람캄행 대왕 비문에는 "물에는 물고기가 있고, 밭에는 벼가 있다"는 구절이 나올 정도로 풍요롭고 자유롭고 이상적인 아틀란티스 같은 혹은 성경에 나오는 천국 같은 풍요의 끝을 달리는 문명으로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물론 이 수코타이 제국도 세계 최강대국인 대원제국의 칼날을 피할 순 없었다. 대원제국이 군사 원정대를 조직해 수코타이 제국을 정복한다는 소식이 도착하자마자 수코타이 제국은 바로 무릎을 꿇고 복종하면서 백기들고 항복했다. 그렇게 대원제국은 군사적으로 침략하지 않고도 수코타이 제국을 비롯한 동남아시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식민지 지배했다. 또한 대원제국의 총관부들이 수코타이 제국이나 동남아시아 곳곳에 설치되어 다루가치 같은 주둔군들이 주둔하게 된다.


14세기 중반, 그렇게 세월이 흘러 먼 미래로 가서 대원제국이 쇠락하면서 동남아시아에 주둔해 있던 다루가치와 총관부들도 철군하게 된다.


하지만 이 시기 수코타이 제국의 힘도 쇠퇴하면서 짜오프라야강 하류의 아유타야(아요다야) 왕국(Ayutthaya)이 새로운 부국으로 부상했다. 1351년 우통 왕(Uthong, 우동 아님, 라마티보디 1세)이 건국한 아유타야 왕국은 417년간 지속되며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오랫동안 존속한 왕국 중 하나가 됐다. 수코타이 제국의 식민지나 다름없던 아유타야 왕국은 수코타이 제국의 힘이 약해진 틈에 반격을 가해 합병하고, 동쪽으로는 그나마 목숨만 간신히 붙어있던 크메르 문명의 수도 앙코르를 여러 차례 들어가서 결국 먹는 등 좋은 경제력을 과시했다.


게다가 아유타야 왕국은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해양 교역의 기반으로 번성했다. 야유타야 왕국의 시대때 그동안 나약했던 서구가 슬슬 꿈틀거리던 대항해시대였고, 지금까지 냉병기 시대의 세계를 지배하던 중국 당 제국(당나라), 몽골-튀르크, 대몽골제국과 대원제국과 티무르 제국, 페르시아 제국, 중동의 아랍 같은 동양의 세계 최강국들의 시대에서, 열병기를 지배하는 명나라, 무굴제국, 일본, 오스만 제국, 페르시아 사파비 제국 같은 기존의 동양의 초강대국들은 물론 포르투갈 왕국,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영국 왕국, 프랑스 왕국의 시대로 전환되면서 이 국제적인 상인들이 아유타야 왕국을 드나들며 거대한 해양 도시를 이루며 아유타야 왕국은 또 한 번 번성하며 아름답게 발달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아유타야 왕국은 지금까지 있었던 "만달라" 같은 다소 미개하고 느슨했던 유럽의 봉건제 같은 동남아 체제에서 탈피하여 높은 왕권을 바탕으로 중앙 집권적인 관료 체제와 사회 계급 제도인 "삭디나"(Sakdina)를 확립했다.


물론 겉으로는 이런 관료 체제를 확립한 것처럼 보이지만 야유타야 왕국도 여전히 중앙집권화가 완전히 안 된 만달라 체제에 가까웠던 건 사실이었다..






3) 태국의 근세 시대(1)



하지만 이런 기분좋음도 잠시.. 태국은 곧 태국 역사에서 가장 늪 같은 전쟁인 서쪽의 미얀마, 그리고 동쪽의 베트남과의 충돌을 시작하게 된다. 이 태국보다 훨씬 국방력이 강했던 두 세력과의 전쟁은 아유타야 왕국의 붕괴를 초래하고 태국 민족의 생존 자체를 위협했던 가장 중요한 외부 위협으로써 어찌보면 태국 역사에서 일본제국이나 유럽 열강보다도 훨씬 무서운 적이 바로 미얀마와 베트남이었다.


미얀마와 태국의 전쟁은 16~ 19세기까지 수백 년간 수십 차례에 걸쳐 벌어졌다. 전쟁의 주된 원인은 경제적 이권 다툼, 종교적 이유였다. 특히 강력한 통일 왕국이 등장한 미얀마는 인구수를 늘려나가며 번성을 하던 아유타야 왕국을 끊임없이 괴롭했다.


16세기 중엽인 1569년에 미얀마에 등장한 강력한 따웅우 왕국(Taungoo)은 동남아시아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제국인 "바간 왕국"이 멸망하면서 한타와디 왕국과 잉와 왕국으로 갈려지면서 그 후에 나온 왕국이다.

시간을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서 중세시대로 가보자면..


당시 세계 패권국가였던 대원제국이 태국을 정복하려하자 기겁한 태국은 미리 복종하면서 식민지 지배는 당했으나, 멸망만은 피하고 "생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미얀마는 달랐다. 당시 미얀마는 끝까지 개겼고, 이에 잔뜩 짜증이 난 대원제국의 쿠빌라이 대칸은 미얀마 완전 정복 및 멸망, 식민지화를 명령했고 그로 인해 대원제국(원나라)의 원정대가 미얀마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제국이었던 "파간(바간) 왕국"을 정복하면서 지도상에서 깔끔하게 사라졌다. 그 파간 왕국이 멸망하면서 한타와디 왕국, 잉와 왕국 같은게 생겨났고 따웅우 왕국은 나름 바간 왕국의 영광을 되찾으려고 나온 것이다.


그리고 따웅우 왕국은 바간 왕국의 영광을 되찾고자 수차례 태국의 아유타야 왕국을 침입했고, 오랜 공방전과 내부 분열 끝에 1569년 마침내 수도 아유타야를 함락시켰다. 하지만 이는 아직 "1차 아유타야 함락"에 불과했다. 아직 2차가 남아 있었다. 어쨌거나 이렇게 수도가 함락되면서 아유타야는 15년간 미얀마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굴욕을 겪었다.


g.jpg 태국 영화계 역사상 최대의 블록버스터 예산이 들어간 총3부작 기획 대작 서사극 "나레수안 왕"


이 암흑기에 혜성처럼 등장한 인물이 바로 "나레수안 대왕(Naresuan the Great)"이다. 우리에겐 다소 생소한 동남아 역사이기에 "그게 누군데..?" 라고 할 수도 있지만, 나레수안 대왕은 태국 역사상 대왕의 타이틀을 받은 인물로, 태국판 세종대왕이라 불릴 정도로 태국 역사상 가장 어진 국왕이었다.


미얀마가 태국을 다스리면서 볼모로 미얀마에 끌려갔던 그는 그곳에서 국방 기술과 각종 싸움법을 익힌 뒤 돌아와 독립 전쟁을 했다. 마치 미국이 영국과의 교역으로 경제력을 높이면서 결국 독립을 했던 것처럼 말이다. 16세기인 1593년, 그는 미얀마의 왕세자와의 전설적인 코끼리 싸움(Yuddhahatthi)에서 지지 않으면서 아유타야 왕국의 독립이 성사됐다. 이 승리는 오늘날까지 태국 민족의 자긍심을 상징하는 가장 위대한 역사적 사건으로 기려진다.


이렇듯 나레수안 대왕의 독립 운동 이후 아유타야 왕국은 다시 출산율이 올라가는 등 번성을 했지만, 18세기에 이르러 내부적으로 귀족들의 권력 다툼과 사치 향락으로 인해 국력은 빠르게 죽어갔다. 이 틈을 타 미얀마에 새로 등장한 "꼰바웅 왕조(Konbaung Dynasty)"의 "알라웅파야 왕(Alaungpaya)"과 그의 후계자들이 대대적인 침입을 감행했다. 1765년 시작된 미얀마의 괴롭힘은 14개월간의 처절한 공성전 끝에 1767년 4월, 아유타야 왕국의 완전한 망조로 이어졌다. 그렇게 417년간 동남아에서 가장 아름다웠고 눈부시고 평화롭게 번성했던 화려한 문명은 철저히 노략당하고 뜨거운 불길 속에 사라졌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수많은 백성들이 죽거나 인질, 볼모로 끌려갔고, 태국은 역사상 가장 큰 위기를 맞았다.


태국이 미얀마를 싫어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캄보디아가 태국을 싫어하는게 크메르 문명을 무너뜨린게 태국이라면.. 미얀마는 끊임없이 태국을 괴롭히며 아유타야 왕국을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물론 아유타야 왕국이 동남아에서 국방력이 가장 강한 건 아니었지만 당시로서는 동남아에서 가장 화려하고 과학이나 각종 기술들이 번영했던 발전된 문명이었는데 그걸 망하게 했으니 말이다.


어쨌든 그렇게 미얀마가 태국 아유타야 왕국에 있는 수많은 백성들을 끌고 가면서 노예로 만들거나 팔고 수도까지 점령하면서 이제 태국의 운명은 완전히 끝장날뻔 했다.


그런데 뜻 밖에(?) 세계 초강대국이 구원의 영웅으로 등장한 것이다. 바로 대청제국이었다.


당시 대청제국은 엄청나게 광범위하게 영토 팽창을 하면서 동북아시아, 중앙아시아를 정복하고 러시아 제국과의 전쟁에서도 승리하면서 하늘을 날고 있었다. 하지만 "동남아시아"라는 작은 촌동네에서 벌어지는 인도차이나 반도의 미얀마vs태국 전쟁에 대청제국도 가만히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미얀마가 태국을 먹으면서 경제력을 높이자, 대청제국은 감히 동남아시아 따위의 미얀마가, 전 세계의 패권자이자 주인인 대청제국의 황제에게 조공책봉 관계를 맺으며 머리를 숙이지 않았으며, 태국을 점령한 것에 대해 미얀마가 감히 대청제국 황제에게 보고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을 명분 삼아서 침략한 것이다. 그 지역 전쟁에만 익숙했던 미얀마는 세계 초강대국인 대청제국의 군단들이 침략해오자 순식간에 전멸했으며, 결국 미얀마는 자신들이 애써 정복한 태국을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4) 태국의 근세 시대(2)


태국을 괴롭힌 건 미얀마말고 또 있었다. 바로 베트남이었다.


베트남과의 충돌은 미얀마와의 전쟁과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미얀마vs태국은 미얀마의 일방적인 침입이었던데 반해, 베트남vs태국 양국 사이의 싸움은 양국 가운데 위치한 캄보디아의 지배권을 둘러싼 간접적인 대리전의 성격이 강했다. 캄보디아는 이미 크메르가 망하면서 사실상 미얀마, 베트남, 태국의 식민지 노릇을 하던 왕국에 불과해있던 것이라 자주적인 독립국으로 존재하는건 불가능했다. 캄보디아에 왕위 승계 분쟁이 벌어질 때마다 태국과 베트남은 각각 다른 파벌을 지원하며 군사적으로 개입했고, 이는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중반까지도 수십 년간 지속되었다.


아유타야 왕국이 미얀마에게 완전히 멸망한 후, 그렇게 영영 사라질 뻔했는데 갑자기 세계 초강대국인 대청제국이 군사적으로 개입하며 미얀마를 침략하면서 미얀마는 완전히 전멸했고, 그 결과 기사회생을 하게 된 타이족들은 그 틈을 타 중국계 혼혈 장군이었던 딱신 대왕(Taksin the Great, 중국계 혼혈이지만 이름은 태국 이름인 "딱신"이다.)이 흩어진 세력을 규합하여 "톤부리(Thonburi)"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니 이 왕국이 뭔가 돈까스 요리가 생각나는 "톤부리 왕국"이다.


하지만 대청제국은 절대 구원의 영웅이 아니었다. 미얀마를 전멸시킨 대청제국은 태국에게도 개입하며 톤부리 왕국을 공격했다. 대청제국의 황제는 톤부리 왕국이 대청제국의 승인, 허락 없이 멋대로 국가를 건설한 것에 대해 죄를 물으려 하니 이에 놀란 톤부리 왕국은 대청제국에게 엄청나게 아첨과 아부, 금은보화들을 바치며 지금이라도 조공책봉 관계를 맺으며 대청제국의 식민지 노릇을 할 테니 미얀마를 공격해달라고 울면서 빌었다. 그리고 대청제국의 건륭제는 각종 금은보화를 바친 톤부리 왕국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나마 남아있던 미얀마군을 죄다 학살하면서 톤부리 왕국은 안정적으로 국가를 운영할 수 있게 됐..


으나, 딱신은 캄보디아에 대한 종주권을 회복하기 위해 여러 차례 토벌군을 보냈고, 이는 곧 캄보디아를 노리던 베트남과의 마찰을 불러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딱신 자신은 마치 궁예처럼 불교의 구세주라는 등 헛소리를 하자 이에 빡친 태국 군부들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실각되었다.


1782년, 딱신 대왕이 쿠데타로 인해 실각되자 뒤를 이어 라마 1세(Rama 1)가 오늘날의 방콕에 라타나코신이라는 마을에서 라타나코신 왕국(Rattanakosin)을 건설했다. 이 왕국이 바로 유럽 열강과 외교적으로 맞짱을 뜨게 되는 그 태국 왕국이다. 여하튼 라마 1세~ 라마 3세에 이르는 시절에 캄보디아를 둘러싼 태국과 베트남의 갈등은 극에 달했으며, 특히 라마 3세(Rama 3) 시절에는 10년 이상 지속된 대규모 전쟁(Siamese–Vietnamese War, 1831~1834, 1841~1845)이 벌어졌다. 이 전쟁으로 싸움터가 된 캄보디아는 초토화되었고, 결국 1845년 베트남과 태국 양국은 캄보디아를 공동 보호령으로 삼는다는 타협안에 합의하며 전쟁을 마무리했다. 이 길고 소모적인 전쟁은 양국의 국력을 크게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5) 태국의 근대 시대


이렇듯 세계 초강대국이었던 대청제국에 의해 미얀마가 사실상 전멸하고, 베트남과의 길고 긴 전쟁도 끝나고, 캄보디아를 베트남과의 공동 보호령으로 삼으면서 태국은 이제 안정적인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곧 19세기가 시작되었다.

19세기가 어떤 시대인가..? 그동안 세계를 지배했던 동양의 초강대국들인 대청제국, 오스만 투르크 제국, 무굴제국의 시대가 이제 끝이나고..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해서 서구열강들의 시대가 시작되던 시대였다. 그로 인해 서구열강들이 인해전술로 물밀듯이 동남아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제 태국의 새로운 과제는 유럽의 위협에 맞서 왕국의 독립을 지켜내야 하는 새로운 과제에 직면했다.



g.jpg 1862년 태국 시암 왕국의 국왕과 영국인 가정교사 미망인 레노웬스의 실화를 그린 영화 "왕과 나"


라마 4세 국왕(1851년 ~ 1868년)과 아들 라마 5세 쭐랄롱꼰 국왕(Chulalongkorn, 1868년 ~ 1910년)은 태국 근대화의 아버지로 불린다. 이들은 서구 열강의 압력 속에서 태국의 주권을 지키기 위해 외교술과 과감한 내부 개혁을 추진했다.


라마 4세 국왕은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얘기가 있듯이 이왕 온김에 서양 학문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1855년 영국과 보링 조약(Bowring Treaty)이라는 조약을 체결하여 문호를 개방했다. 이는 불평등 조약의 성격이 있었으나, 무력 충돌을 피하고 유럽과의 관계를 제도권 안으로 끌어들여 독립을 유지하려는 전략적 선택이었다.


쭐랄롱꼰 왕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노예제 폐지, 행정, 법률, 문화, 경제, 예술, 제도, 교육, 안보 등 사회 전반에 걸친 대대적인 근대화 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영국과 프랑스 왕국 사이에서 교묘한 줄타기 외교를 펼치며 양국의 세력 균형을 이용했다. 비록 베트남과 피터지게 싸워서 간신히 받아낸 라오스와 캄보디아에 대한 종주권을 프랑스 왕국에, 말레이 반도 일부를 영국에 넘겨주는 고통스러운 영토 할양을 감수해야 했지만, 결과적으로 동남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식민지가 되지 않은 독립국으로 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태국의 일방적인 주장이고 사실상 겉으로는 식민지가 아니었지만, 일본의 식민지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밑에 더 자세히 써놨다.


지금까지 글을 보면 알 수 있듯.. 태국은 동남아에서 애매한 위치해 있던 국가였기에 생존을 하기 위해 외교술을 항상 펼칠 수밖에 없었다. 중세시대때는 세계 패권국인 대원제국의 식민지로 먼저 알아서 속한게 태국이었고.. 근세시대때는 대청제국에게 각종 아부와 아첨으로 멸망을 면했다. 그리고 근대시대에는 유럽 열강이 들어오자 이번에는 영국과 프랑스에게 줄타기 외교를 했던 것이다. 조선의 광해군과 비슷한 느낌이랄까, 인조가 하지 못한 줄타기 외교의 전형이었다.


근대화 교육을 받은 새로운 지식인과 병사 계층이 성장하면서 절대왕정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싹텄다. 결국 1932년, 지식인과 관료들이 중심이 된 "카나 랏사돈'(Khana Ratsadon)" 이라는 집단이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절대왕정을 종식시키고 "입헌군주제"를 도입했다. 이는 태국 현대 정치사의 분수령이 되는 사건이었다. 이후 태국 정치는 군부 쿠데타와 민주화 운동이 반복되는 불안정한 역사를 겪게 된다.







6) 태국의 1, 2차 대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은 태국 땅을 통과해서 영국령 인도제국을 먹으려고 했기에 태국에게 빨리 길을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하지만 태국이 일본을 통과시키면 일본제국vs대영제국 전쟁에 태국이 꼽사리를 끼게 될까봐 태국은 일본에게 불가하다고 했다. 그러자 바빴던 일본군은 태국을 침입해서 쑥대밭으로 만들고 사실상 식민지처럼 만들어버렸다.


일본군은 태국의 방콕까지 점령하고, 고위급 장교들의 저택들을 압수수색하고, 그리고 태국 군대가 가지고 있던 기름이나 무기창고, 비행기, 총포탄들을 죄다 압수했다. 그리고 일본군은 태국 내에서 마음대로 군대 서열하고 태국인들을 끌고 가서 전쟁터에 철도를 건설하게 하거나 하는 건설 노동자로 부려먹었다. 그리고 태국은 일본과만 무역할 수 있게 했고, 태국 돈을 일본 엔화와 연동시키고 게다가 태국이 다른 국가와 외교 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일본이 마음대로 조종했다. 그리고 일본군이 태국을 드나들면 태국인들은 항상 도열해서 일본군을 향해 박수를 치며 "반자이"를 외쳐야 했다. 오늘날 북한처럼 말이다. 이쯤되면 완전히 태국은 일본제국의 식민지였다.


그렇기에 태국은 일본의 식민 압력에 굴복하여 동맹을 맺고 연합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에 내부적으로는 일본으로부터 독립하고자 항일 지하 운동인 "세리 타이'(Seri Thai)"가 조직되어 연합군과 협력했다. 이러한 이중적인 외교 덕분에 태국은 종전 후 전범국으로 취급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럼 왜 태국은 식민지가 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가? 이는 태국 내의 일방적인 주장으로.. 태국의 학계는 사실상 이런 과거사에 대해서 잘 안가르치는게 있다.









7) 태국의 현대



전후 냉전 시대가 도래하자, 태국은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으려는 미국의 주요 동맹국이 되었다. 태국은 미국의 원조를 받아 경제 발전을 이루는 한편, 베트남 전쟁 당시에는 미군의 주요 후방 기지 역할을 했다. 이 시기 민간의 정치적 영향력은 더욱 약해졌다.


1970년대부터 태국에서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 운동과 시민들의 저항이 거세게 일어났으나 군부는 유혈 진압과 쿠데타로 이를 억눌렀다. 1990년대 이후 경제 성장과 함께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진전되는 듯했으나, 2006년과 2014년에 또다시 군부 쿠데타가 발생하는 등 군부의 정치 개입과 민주 세력과의 갈등은 오늘날까지도 태국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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