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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색무취 Sep 29. 2022

중년에 읽는 톨스토이 인생론 (1)

서론 - 사색의 위치

     어린 시절 과학자/엔지니어란 직업에 동경심을 가졌던 적이 있었다. 무언가 다른 것을 만들어내고 추상적이기보다는 구체적 결과를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서 마음이 동했던 것 같다. 과학적 방법으로 얻어낸 결과물 그리고 데이터는 믿을 수 있다는 순수한 마음을 가졌던 시절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안타깝게도 그때 그 소년은 데이터를 신뢰하지 않는 날이 선 비판가로 변해 있다. 과학계의 연구 데이터는 연구비를 따내기 위한 몸부림으로, 엔지니어의 결과물은 밥그릇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으로, 연준과 정부의 경제 데이터는 민중의 부를 서서히 강탈하기 위한 전문적 거짓말로 받아들여질 뿐이다. '과학적 방법이라... 어차피 의도에 따라 결과는 맞추어 지는 것이 아닌가' 라는 말을 되뇌이면서.


     돈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세상에서 과학자 그리고 엔지니어의 역할은 이 시스템을 더욱 공고히 만들어 보통 사람들이 이에 도전하거나 뒤엎는 행위 자체를 할 수 없도록 돕는 것일 뿐이라는 생각이다. Profit, efficiency, fast, accuracy, compliance, 등등... 듣기만 해도 정신병이 걸릴 것 같은 단어들이다. 


     오늘도 매년 반복되는 회사의 compliance training 을 마치고 정신이 망가졌던 무색무취 씨는 답답한 마음에 오랜만에 책 보따리를 열어 청년 시절부터 고이 간직했던 책 한권을 꺼내 서론 부분을 다시 읽고 싶었다.  




초등학교도 입학하기 이전인 1987년에 인쇄된 책. 20대 시절 처음으로 끝까지 읽고 지금껏 간직하고 있다.


     '여기에 물방앗간을 생활의 유일한 수단으로 하고 있는 어떤 사나이를 상상해 본다. 이 사나이는 가루 방앗간의 아들이며 손자이므로 가루를 빻는 데 제분기의 각 부분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를 잘 알고 있다. 이 사나이는 기계학 따위는 조금도 모르나, 가루를 훌륭하게 잘 빻도록 제분기의 각 부분을 썩 잘 다루어서 그것으로 밥을 먹고 살아간다. 그런데 우연한 일로 이 사나이가 제분기의 구조에 관해서 생각하게 되고, 기계학에 관해서 막연한 설명을 듣게 되었다. 그는 빙빙 돌아가는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하고 그런 것을 관찰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해서 밀을 넣은 깔대기에서 절구통으로, 절구통에서 축으로, 축에서 바퀴로, 바퀴에서 둑으로, 물로, 관찰을 진전시킨 결과 마침내 모든 것이 둑과 시내에 있음을 그는 똑똑히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이 사나이는 이 발견을 매우 기뻐하면서, 그로부터는 이전처럼 빻아나오는 가루의 성질을 비교 연구해서 절구를 오르내리거나, 절구통을 닦거나, 피대를 조이거나 늦추거나 하는 대신 시내의 연구에 손을 댔다. 그런데 그의 물방아는 아주 고장이 나버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에게 그가 하고 있는 일이 잘못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들과 언쟁을 하지 않고 오로지 시내의 연구만을 계속했다. 이와같이 해서 그는 시내만을 너무 오래 열심히 생각하여 그의 사고방식이 옳지 못함을 말해주는 사람들과 언쟁하기에 정신이 없어서 마침내는 시내가 결국 물방아 그 자체라고 굳게 믿어 버렸다.' 


     '그의 생각이 잘못임을 지적해 주는 모든 증명에 대해서 그 사나이같은 제분업자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어떠한 물방아라도 물이 없이는 제불할 수 없다. 따라서 물방아를 알자면 물을 대는 방법을 알고, 그 흐름의 힘과 그것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 즉, 물방아를 알자면 시내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고...  그 고찰에 있어서 논리적으로는 물방앗간 주인이 옳다. 그러나 미망으로부터 그 사나이를 벗어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대체로 사색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사색 그 자체보다도 사색이 차지하는 위치라는 것, 즉 효과적으로 사색하기 위해서는 처음에 무엇을 사색하고 다음에 무엇에 관해서 사색할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는 것 ...'



     

     현 사회가 금융의 노예가 되기 이전, 현인들은 분명 사색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삶의 본질과 가치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삶은 어떤가. 회사원들은 '돈을 더 효율적으로 벌기 위한 기계가 될 것' 을 강요받는다. 투자자의 수익은 어떻게든 지켜 주어야 하므로 임직원을 쥐어 짜야 한다는 방향성은 이미 정해져 있다. 거대한 수익의 흐름 앞에 개인은 회사의 가치 체계에 도전할 수 없다. 개인적 생활 역시 마찬가지다. 계속해서 떨어지는 돈의 가치와 늘어나는 세금은 우리의 마음을 더욱 조급하게 만들고 쉴 새 없이 한 방향 -돈을 벌기 위한 삶- 으로 뛰어다니게 한다. 위치 그리고 방향은 이미 시스템 설계자에 의해 결정되었고 별 볼일 없는 개인은 오로지 그 방향에 맞추어 노력하고 깊이 사고하면 된다는 강요만 있을 뿐이다. 

  

     다시금 한 발치 뒤로 물러서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바라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잘것 없는 나란 존재가 세상의 방향을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이 행위를 통해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이 있다면 타인을 향해 나오는 나의 말과 행동일 것이다. 매일 아침 비정상적인 시스템을 무의식 중에 받아들이게 하는 스마트폰과 컴퓨터에서 잠시 벗어나, 인간의 본질과 생명에 대해 불 뿜듯이 이야기 하는 이 책을 다시 읽어보며 인간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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