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예진 Jul 27. 2020

<밤과 안개>: 살아남은 자들의 윤리

포스트 ○○○ 세대로 살아간다는 것




    우리는 포스트 ○○○의 시대를 살아간다. 


    포스트 IMF, 포스트 세월호, 그리고 지금은 포스트 코로나. 현재는 과거를 거쳐 규정된다. 현재의 사람이 아니라 '과거' 이후의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곧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 살아남았음을 보여준다. 그렇게 무수한 죽음과 무력한 절망을 거친 사람들, 살아남은 사람들은 항상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누구도 이러한 끔찍한 사건을 겪기 전의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명제는 언뜻 자명하고 합리적이다. 그러나 정말로 그런가? 포스트 홀로코스트, 〈밤과 안개〉의 필름은 여기서 시작한다.





살아남은 자들의 예술



    테오도르 아도르노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더라도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스러운 일이다.”라는 말을 들어본 적은 있을 것이다. 아도르노가 이 말을 남긴 후 오래도록 홀로코스트 이후의 예술은 예술가들의 숙제로 남았다. 그의 말은 단순히 더 이상 서정시를 써선 안 된다는 명령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상실한 시대에 예술은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알랭 레네 감독의 단편 다큐멘터리 〈밤과 안개〉는 아도르노의 이러한 물음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대답이다.


    상징적으로 들리는 이 영화의 제목은 1941년 11월 히틀러가 시행했던 ‘밤과 안개(Nacht und Nebel)’ 작전에서 따온 것이다. 이는 나치 독일 치하에서 저항하는 자들이라면 누구나 밤과 안갯속으로 사라질 수 있음을 암시하는 이름이다. 그러나 영화는 이러한 작전의 이야기 내지는 밤과 안개라고 하면 상상할 수 있는 어두운 이미지를 대신해 드넓고 고요한 풀밭의 이미지로 장면을 연다. 그리고 관객이 잠시 방심했을 때, 혹은 녹색의 들판을 보며 일상적으로 떠올리던 심상을 환기할 때, 풀밭을 두른 철조망을 포착한다. 평화로운 들은 잡초가 우거진 수용소가 되고 넓은 하늘은 철조망 사이로 조각난다. 그리고 내레이터는 생존자이자 방문자의 위치에서 담담한 어조로 고백한다. 일상적인 시선이 비일상 속으로 편입되는 순간이다.


“피는 말라버렸고, 혀들은 침묵의 심연으로 가라앉았다. 지금 이곳을 찾은 방문객이라곤 카메라뿐. 수용되었던 이들이 다니던 길은 이름 모를 풀들로 뒤덮였다. 철조망에는 더 이상 전류가 흐르지 않고, 발소리라곤 나 자신의 것 외엔 들리지 않는다.” 


《밤과 안개》(Nuit Et Brouillard, Night And Fog) (1965)


    〈밤과 안개〉에서는 이러한 체험의 기법을 일관적으로 유지한다. 영화는 종료된 학살의 잔혹성을 극적으로 재현하는 대신 관객의 발길을 자연스럽게 수용소 안으로 이끄는 방법을 택한다. 마치 우리가 사멸되지 않은 현실을 함께 목격하고 체험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치 치하 유대인 수용소의 끔찍한 과거와 현재 버려진 수용소의 이미지는 끊임없이 서로 교차하며 병치된다. 버려진 녹슨 침대, 죽어가는 사람들, 빈 가스실, 차곡차곡 쌓인 시체, 콘크리트마저 패일 정도로 깊이 파인 손톱자국들과 머리와 몸이 나뉜 시체, 잡초만이 무성하게 남아 평온한 들판과 발가벗은 채 총살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이미지는 끊임없이 교차한다. 그 안에는 어떤 상징도 없다. 많은 다큐멘터리 영화들이 저지르는, 극적인 감동이나 슬픔, 분노도 없다. “나는 책임이 없다.”라고 말하는 장교와 카포 앞에서도, 사람의 피부를 벗겨 만든 물건들 앞에서도 카메라는 잠시 머무를 뿐 그저 흘러간다. 대상화되지 않은 악은 대단하거나 무시무시하기보단 그저 모욕적이다. 홀로코스트가 그랬듯이. 그리고 현실에 존재하는 모든 폭력과 억압이 그렇듯이.


    마침내 기나긴 병원 시퀀스에서 눈조차 감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면서 관객들은 그 모든 순간의 목격자가 된다. 그러나 영화는 이러한 스트레스 상황에 관객들을 오랫동안 묶어두지 않는다. 오히려 빠르게 이제는 텅 빈 병원, 누구의 것도 아니며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폐건물의 이미지를 재현한다. 비명소리도 시체 타는 연기도 없이 고요한 수용소에서 우리에게는 하나의 질문만이 남는다. 거기에 있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가?


    과거와 현실 사이의 괴리 속에서 관객에게는 무력한 목격자로서의 수치심이 남는다. 그것은 우리가 “목격한” 자이기에 느끼는 죄책감이면서 동시에 “살아남은” 자이기 때문에 느끼는 부끄러움이다. 우리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지만 망각함으로써 과거와 비슷한 사람이 될 수는 있다. 절망과 슬픔을 잊는 삶은 언제나 유혹적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망각의 유혹에 쉽게 빠져들고는 한다. 그러나 이 영화가 끊임없이 현재로 ‘가지고 오는’ 희생자들의 이미지 앞에서 괴로움을 잊고 싶다는 감정은 스스로를 수치스럽게 만든다. 그렇게 과거의 기억이 재현되고 살아남은 자들이 이를 체험하면서, 그리고 집단적인 책임을 느끼면서, 우리는 비로소 망각을 거부할 수 있다. 장 캐롤의 마지막 내레이션은 이를 명확히 지적한다.


  우리는 진실한 눈으로만 이러한 죄를 헤아릴 수 있다.
  이 낡은 괴물이 영원히 잔해 아래에 파묻혀 있다면, 이미지들이 과거로 멀어짐에 따라 우리는 이 수용소에서 겪은 모든 일들이 치유되었다는 희망을 가진 척한다.
  우리는 이 일이 오직 정해진 장소와 시간에, 한 번만 일어났던 것처럼 군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것들에 눈을 감고, 인간성의 끝나지 않는 울음에 귀를 닫는다.


    그는 관객에게 진실한 눈으로 응시하며, 귀를 막지 않고 들을 것을 요구한다. 홀로코스트의 비명뿐만이 아니라 여전히 세상에 울려 퍼지고 있는 모든 인간성의 울음소리를 말이다. 이러한 학살은 1941년 나치 독일에서만 일어났던 일이 아니다. 폭력은 과거에 머무르지 않는다. 세상에는 여전히 인간 존엄에 대한 모멸과 억압이 존재한다. 홀로코스트는 그중 일부일 뿐이다.


    그러므로 〈밤과 안개〉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증언이면서 동시에 인간에 대한 폭력이 얼마나 모욕적인지를 고발하는 작품이다. 현실에 여전히 실존하는 울음소리들로부터 귀를 막지 말라는 외침이다. 과거에 대한 망각은 결국 현실에서 눈을 돌리는 일이다. 반면 기억하는 것은 생존한 이들의 의무이자 끝나지 않은 폭력에 대한 궁극적 저항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를 살아남은 자들의 윤리라고 부른다.





상실과 애도


《밤과 안개》(Nuit Et Brouillard, Night And Fog) (1965)


    “나는 책임이 없다.” 카포가 말했다. 

    “나는 책임이 없다.” 장교가 말했다. “나에게는 책임이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책임이 있다. 우리에게는 윤리가, 존엄성과 인간성이, 수치심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기억은 가장 성실한 애도이다. 그리고 예술은 인간이 가장 충실히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이다. 2014년 4월 이후의 글들이 ‘세월호 이후의 문학’이 되었듯 우리는 메울 수 없는 상실을 애도하기 위해 예술을 선택한다. 그러므로 아도르노에게 감히 대답한다. 홀로코스트 이후에도 서정시는 존재할 수 있으며, 존재해야만 한다. 예술은 기억의 방식이며,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충실한 애도이자 연대이고 저항이기 때문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