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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셜트래블러 Dec 14. 2021

#. 관계라는 희망

(버드박스/2018/수잔비에르)

‡'어렵다'라는 함의를 가진 단어 중 가장 최상위 단어‡


  현직 사회복지사로 근무하다 보면 어려움에 직면할 때가 많다. 여기에 '종종'이라는 단어를 상투적으로 덧붙이려다 어려움이라는 단어가 무게가 더욱 크다는 것을 직면하고 차마 붙이지 못했다. 전국의 모든 사회복지사들은 이해하시리라. 여하튼, 사회복지사들이 느끼는 어려움은 무엇일까. 낮은 급여? 극한 직업적 환경? 누구나 이러한 이유를 떠올리겠지만 이러한 이유보다 더욱 크게 어려움으로 작용하는 이유가 있다. 바로 '관계'다. 보통 회사가 가지고 있는 직장 동료들과 상사 등에 대한 관계뿐 아니라, 마을 주민들 혹은 업무에 따라 서비스를 제공하는 이용인들과의 관계도 매우 어렵다. 코로나가 대유행하고 있는 지금, 사람들의 마음에 알 수 없는 분노가 차곡차곡 적립되고 있는 지금!!! 사람들과의 관계는 더 어렵기만 하다. 실례로 중증 발달장애인과 함께 낮시간 동안 즐거운 시간을 꾸려가는 내게도 몇 번의 큰 위기가 있었다. 어느 날, 이용인 한분이 감정이 격해져 주위에 있던 이용인의 멱살을 잡는 이벤트*가 발생했다. 그 과정에서 멱살을 잡힌 이용인의 목에 빨간 스크레치가 발생했고, 이 이용인의 부모는 도전적 행동을 보인 이용인을 퇴출해야 한다며 다른 이용인의 보호자들의 동의 서명을 받았다. 서명을 받는 과정에서 반대하는 어머님들과 큰 싸움이 일어나기도 했다. 퇴출에 동의하는 다수의 보호자들은 내게 동의서를 보여주며, 해당 이용인을 쫓아낼 것을 요구했다.  얽히고설킨 실타래 마냥 보호자들끼리의 관계를 중간에서 오롯이 감당하는 것에 큰 스트레스를 받았었다. 다행히 보호자들과 긴 대화 끝에 잘 마무리할 수 있었으나 그 간의 과정이 정말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런 큰 이벤트부터 소소한 이벤트까지 열거하면 끝이 없으리라. 이렇게 사회복지사로서 혹은 직장인으로서 고객과의 어려움이 가장 큰 난제일까? 아니다. 동료라는 큰 산이 하나 더 존재한다. 회사의 동료 선후배 관계는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직장 내 괴롭힘으로 생을 스스로 마감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종종 포털에서 접할 수 있다. 얼마나 사람을 힘들게 하면 영혼이 재가 될 때까지 태운다라는 말을 줄여 태움이라고 할까. 이 태움의 문제는 간호사들이 대표적으로 선점하는 단어이기도 하지만, 비단 간호사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아마도 관계로 인해 곤란하거나 어려움에 빠진 경험이 없는 사람은 지구 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한다. 더욱이 SNS의 발달로 사람 사이의 관계는 더욱 어려워지기만 했다. 당장 인터넷 포털에 '인간관계'라는 단어를 검색해도 다양한 이야기들이 차고 넘친다. 인간관계를 어떻게 해야 상처를 받지 않도록 나를 지키고, 때에 맞는 적절한 가면을 사용해 물이 흘러가듯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지. 좀 더 나아가면 수많은 관계 속에서 외로움을 덜어내고 싶은 마음과 사람들에게 관심을 독차지하고 싶은 마음까지, 인간관계란 인류 보편적 초미의 관심사가 틀림이 없다. 인간관계라는 거미줄 속에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기에, 아마 영화 <버드 박스>의 멜러리도 누군가로부터 마음에 생채기를 입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그녀는 임신을 한 상태이면서도 아이에 전혀 관심이 없다. 아이의 아버지는 아예 언급조차 없다. 그녀는 사람들로부터 벽을 쌓고 자신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 않는다. 심지어 맬러리의 소식을 동생이 어머니에게 전해야 할 정도로 가족들에게도 자신을 감춘다. 


'어떻게 생각해?'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있는데, 모두 아주 외로워'

'외로움은 부수적인 거야. 연결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얘기야'

'언니에게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을 거야. 아이가 있으면 달라. 바로 사랑에 빠진다고'

'나한테는 안 통할 거야'

'혼자 남는 게 두렵지. 언니에게 필요한 건 나가서 사람들과 만나는 거야'


맬러리가 그린 그림에 대해 동생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외롭다고. 아마도 동생은 맬러리의 현재 심리상태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언니를 걱정했다. 그럼에도 맬러리는 아기를 그저 '콩알'로 지칭한다. 사람에게 관심이 없고 관계에 벽을 세운 그녀. 그녀는 새장 속에 스스로를 가두고 이것이 마치 당연한 삶인 것처럼 살아간다. 이런 그녀를 중심으로 영화는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 흔히 우리 사회복지사들은 중증 발달장애인들의 이런 공격성을 도전적 행동이라고 명명하며, 이는 중증 발달장애인이 가진 '개성'이라고 표현한다. 이러한 개성의 원인은 다양한데 가장 쉽고 느슨하게 이야기하자면 언어 등의 표현이 어려운 당사자들이 몸짓을 이용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개성을 발달장애인 안에서도 차별하고 나눈다면,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차별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행동이 아닐까? 개인적으로 진심 안타까운 이벤트로 평생 기억될 것이다.


출처(네이버 포토)


‡살아남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님을..‡


 병원에서 작은 콩알을 확인하고 돌아오는 길. 세상은 망해버렸다. 거리에 무언가를 목격한 사람들은 정신이 착란에 빠지고 곧 자신을 자해해 죽음에 이르게 한다. 함께 병원을 다녀오던 동생도 운전 중 무언가를 목격하고 맬러리가 보는 앞에서 자살을 한다. 충격을 받은 맬러리. 마침 임신한 맬러리를 본 여성은 맬러리를 구하려고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돕는다. 그러나 무언가를 마주하게 되고 불이 붙은 차 안으로 스스로 들어가 죽음을 맞이한다. 그녀의 도움으로 간신히 어느 집으로 대피한 맬러리. 집 안에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사람들이 대피해있었고, 뉴스와 자신들이 가진 정보들을 함께 모아 이 현상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 그들은 밖이 보이는 창문을 막고, 먹을 것을 정비한 후 한숨을 돌린다. 맬러리에게는 피신처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강제적으로 만나게 된다. 맬러리 자신처럼 사람들을 믿지 않고 자신들의 안위만을 챙기는 할아버지부터 비슷한 시기에 임신한 여성까지. 그 과정에서 그녀는 뜻하지 않게 톰이라는 남자를 사랑하게 되며, 임신한 여성과 우정을 나누게 된다. 조금씩 사람들과 관계를 만들어가는 그녀. 이내 아이들은 동시에 태어나고, 그들은 위기를 맞는다. 영화 속 설정 중에는 외부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목격해도 괜찮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정신적으로 이상이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무언가를 목격하도록 만들어 사람을 생명을 앗아갔다. 그들로 인해 피난처는 아수라장이 되고 사람들은 목숨을 잃는다. 함께 출산했던 여성은 맬러리에게 자신의 딸을 부탁하고, 맬러리는 톰과 함께 아기들을 데리고 가까스로 탈출한다.  


 사람들과의 관계를 회피하는 맬러리에게 피신처라는 이 공간은 1차원적인 감정을 보다 입체적으로 겪을 수 있도록 해 준 공간이다. 어쩔 수 없이 사람들과 공동체를 꾸려 살아남을 수밖에 없었던 맬러리에게, 우정이라는 감정과 사랑이라는 감정의 대상을 만난 공간이며 존 말코비치가 연기한 더글라스라는 사람을 통해 타인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미뤄내야 생존할 수 있음을 보여준 아이러니한 공간이기도 하다. 결국 정신이상자들에 의해 안전한 피신처였던 공간은 파괴되고, 맬러리와 톰은 아이들을 데리고 탈출에 간신히 성공한다. 이때 만약 더글라스의 의견대로 했다면, 타인을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생명은 희생되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에 다른 애들도 있어요?'


아이들은 톰의 어린 시절 이야기에 푹 빠져 듣고 있지만, 이런 과정을 겪은 그녀이기에 아이들에게 희망을 이야기하는 톰이 미덥지 않다. 


'밖에 나가서 다른 애들이랑 나무에 올라갈 거라고 생각하잖아. 나무랑 꽃도 보고.... 나무에 올라갈 수도, 새로운 친구도 만들 수 없잖아. 왜 그런 걸 믿게 해?'

'뭔가 믿어야 하잖아. 믿을 수 없다면 다 무슨 소용인데'

'그래야 살아남으니까'

'살아남는 건 사는 게 아니야!'

'네 말을 들으면 애들이 다 죽게 되잖아'

'인생은 보이는 게 다가 아니야.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꿈꾸는 게 인생이야. 이룰 수 없을지 몰라도 꿈꿀 수 있도록 해줘야 해. 언제고 아이들을 잃게 된다는 걸 알면서도 사랑해야 하는 거라고. 아이들은 꿈꾸고 사랑받고 희망을 품을 자격이 있어. 엄마를 가질 자격이 있어. 엄마를 가질 자격이 있다고.'


 이제 더 이상 사람을 믿을 수 없는 세상. 집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눈을 가려야 하는 세상에서 꿈과 희망은 맬러리의 이야기처럼 허상에 불과한 것일까. 극한 상황에서 단지 생명을 연장하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는 톰의 외침. 이 외침은 사회복지 현장에서 만난 삶의 끝에 머물고 있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떠오른다. 집 안 곳곳이 쓰레기로 가득 찬 집에서 생활하시는 분들. 삶에 대한 의지 없이 오직 알코올을 목적으로 살아가시는 분들. 사회는 그들의 어려움을 '문제'라 여기고 그들을 사회에서 격리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작은 돌멩이 하나로 큰 연못에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는 것처럼 작은 계기가 있다면 변할 수 있다. 


 알코올 중독이신 분에게 이웃을 위해 반찬 배달을 부탁드린 일이 우리 사회복지사들에게 널리 알려진 대표적인 사례다. 마을 주민 중 알코올 중독이신 남성분이 매일 복지관을 찾아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이 어르신을 회복시키고자 알코올 중독 프로그램 등 다양한 서비스를 함께 진행해보았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한다. 이때, 사회복지사 한분이 어르신께 형편이 어려우신 이웃에게 반찬배달을 부탁드렸더니, 흔쾌히 수락하시고는 조금씩 알코올을 줄이시면서 노력하시는 모습을 보이셨다는 것이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알코올로 방황했던 어르신께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된다면, 어르신의 삶이 다시 회복할 수 있는 작은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존재라는 것은 자신의 쓸모를 넘어서 자존감을 다시 찾는 과정과 마찬가지다. 이처럼 누군과와의 '관계'는 사람이 살아간다는 의미에는 다양한 복합적인 의미와 감정을 우리 삶에 더한다. 좀 더 거창하게 이야기하자면 존재의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또 하나의 사례를 이야기하면 전에 구청에서 근무할 때였다. 그때 맡았던 사례 중 사람들이 흔히들 말하는 비행청소년 한 명이 있었다. 그 아이는 집 앞 골목에서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아이들의 다양한 일탈로 인해 이웃 주민들은 불편을 호소했다. 이 아이 때문에 골목에 가로등이 생겼다고 한다. 이 아이를 만나 아이의 마음을 열고 가장 먼저 내가 한 일은 주위 이웃들에게 함께 인사하는 일이었다. 자주 인사를 함께 드리다 보니 아이와 주위 이웃들은 '관계'가 생겼고, 아이는 내가 없어도 먼저 주위 어른을 보면 인사를 드렸다. 그 후 아이는 집 앞 골목에서 담배를 피우다가도 어른이 지나가면 담배를 서둘러 끄고 인사를 드렸다. 스스로의 행동을 규제하게 된 것이다. 당연히 골목은 점차 깨끗해졌다. 이처럼 인간에게 '관계'는 매우 오묘한 함의를 가지고 있는 단어이기도 하다. 이런 '관계'라는 단어가 맬러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며, 그것은 아이들에게 엄마가 되는 것이라고 톰은 이야기한다.


출처(네이버 포토)


‡이름을 지어주다‡


 톰과 다툰 후 톰과 맬러리는 안전한 피난처가 존재한다는 무전을 받게 된다. 다만 배를 타고 강의 급류를 따라 강 아래로 내려가야 했다. 어느 날 정신 이상자들은 톰과 맬러리의 집을 발견하고 이내 습격한다. 이로 인해 톰은 정신 이상자들과 함께 동귀어진하고, 맬러리는 걸과 보이라고 부르는 아이들과 함께 배를 타고 탈출한다. 너무나 빠른 물살로 인해 누군가는 눈을 뜨고 앞을 봐야 하는 상황. 맬러리는 아이들 중 한 명이 눈을 떠서 봐야 한다고 이야기하며 누가 눈을 앞을 볼 건지 아이들에게 물어본다. 


'급류는 아주 위험한 거야. 통과하려면 한 가지 방법밖에 없어. 누군가 봐줘야 해. ' 

그러자 보이가 말한다.

'제가 볼게요'

'아니, 결정은 내가 해! 알겠어? 잠깐만 시간을 줘' 그러자 걸이 말한다. 

'제가 할게요'


맬러리에게 보이는 자신이 낳은 아들이지만, 걸은 올림피아가 낳은 아이 었다. 맬러리는 걸에게 밖을 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걸이 말한 순간 올림피아와 나누었던 우정을 떠올린다.

 울먹이는 맬러리. 


'아무도 안 볼 거야. 그래, 아무도 보지 말자. 알았지?'


그들은 결국 급류에 휘말려 배는 뒤집히고, 맬러리는 아이들을 잃어버린다. 애타게 걸과 보이를 찾아 외치는 맬러리. 맬러리는 보이의 외침을 듣고 보이를 구한다. 걸에게 종을 계속 울리라고 소리치는 맬러리. 결국 그들은 다시 함께 만나고 새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길을 떠난다. 그러나 무언가는 맬러리가 눈을 떠 자신을 보라고 유혹하고, 맬러리는 나무에 헛디뎌 굴러 넘어지고 만다. 아이들을 다시 잃어버린 맬러리는 아이들을 찾아 헤맨다. 무언가는 아이들도 눈가리개를 벗으라며 아이들도 유혹한다. 급박한 상황. 맬러리는 눈가리개를 벗지 말라며 소리치며 절망한다. 그때 어딘가에서 들리는 종소리. 종소리를 따라 움직인 맬러리는 보이를 찾고 그를 꼭 안아준다. 


'괜찮아, 다 괜찮아. 걸은 어디 있니? 걸!! 걸!! 걸! 어디에 있니?' 걸을 찾아 외치는 맬러리.

'맬러리를 무서워해요... 걸이 맬러리를 무서워해요' 

그동안 엄마가 아닌 보호자로서 아이들을 생존시키기 위해 통제적이며, 강압적으로 아이들을 대했던 그녀를 걸은 무서워했다.


'너무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얘야. 정말 미안하구나. 내가 잘못했어. 그렇게 엄격하게 굴지 말아야 했는데...(중략)' 


맬러리는 아이들에게 사과하며 톰이 아이들에게 이야기했던 희망을 이야기한다. 


'톰이 커다란 참나무 꼭대기에 올라갔을 때, 가장 아름다운 것을 봤어. 

수백 명의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봤지. 수백 명이었어. 

새들도 봤어. 갖가지 화려한 색깔의 새들 말이야. 

그리고 우리도 봤어. 꼭대기에서 우리를 쳐다봤어. 우리가 함께 있는 걸 봤어. 

그래서 우린 함께 있어야 해. 이건 그냥 예기가 아니야. 아니고 말고. 

너희들에게 보여줄 게 너무 많아. 보여줄게 너무 많단다. 알겠니?

그래서 함께 있어야 해. 그러니까 지금 당장 내게로 와, 제발'


맬러리는 흐느끼며 마치 희망의 노래를 아이들에게 들려주듯 외친다. 이 노래를 듣고 걸은 맬러리를 찾아오고 맬러리는 걸과 보이를 꽉 끌어안고 흐느끼며 말한다.


'너무 사랑한단다. 너무너무 사랑해'


새장 속에 스스로를 가둬 놓고 타인과의 관계를 거부했던 맬러리. 그녀는 사랑한다며 진심으로 아이들을 자신의 마음에 새긴다.  그들은 다시 새소리가 나는 곳으로 길을 떠나고 결국 피난처에 도착한다. 도착한 그곳은 '시각 장애인 학교.' 눈이 보이지 않았던 시각장애인들은 무언가로부터 안전했으며, 사람들은 이곳으로 모였다. 그들은 무언가를 감지하는 새를 키우며 공동체가 되어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그곳에 도착한 맬러리는 그들의 여정을 위해 가져왔던 새장 속의 새를 풀어준다. 그리고 배 속의 아이를 콩알이라고 지칭한 맬러리에게 아이의 소중함에 대해 이야기했던 의사 라팸을 피난처에서 만난다. 아이들의 이름을 묻는 라팸.  맬러리는 라팸의 물음에 아이들을 응시한다. 보이에게는 자신이 사랑이라는 감정을 나누었던 '톰'을, 걸에게는 우정을 나누었던 '올림피아'의 이름을 지어주며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내가 이 아이들의 엄마예요.'


그렇게 맬러리는 관계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가족이 된다. 사람은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타인을 도구로 생각하지 않는다. 관계라는 것이 때로는 힘들지 몰라도 마음을 열고 타인을 받아들이고 함께 살아간다면, 그것이 의미 있는 삶임을 맬러리는 결국 깨닫는다. 어쩌면 코로나로 인해 더욱 각박해지고 서로에 대한 혐오가 가득 한 이 세상이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는 무언가 일지도 모른다. 영화처럼 강제로 무언가를 보게 만드는 나쁜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서로를 좀 더 믿고 서로에게 삶을 나눌 것을 우리에게 영화는 이야기하고 있다. 영화 제목인 버드박스, 즉 새장은 새를 지켜주는 공간이 아니다. 맬러리가 아이들에게 진심을 토해내고 자신의 곁을 아이들에게 내어준 것처럼, 우리에게 영화는 함께 타인과 관계하기 위해 우리의 곁을 조금 내어줄 것을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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