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제 불가능한 것들에 대하여

통제 불가능한 것들에 대하여

by 파주


요즘 저는 ‘붓다의 말씀’을 듣습니다. 듣는다기보단 켜둔 채 잠든다는 쪽에 가깝지만요. 종교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아닙니다. 그저 통제 불가능한 것을 한참이나 미워하다가 지쳐버려서, 이제는 그것들을 품는 방법을 배우고 싶어졌습니다.


누워서 잠에 들기까지 2시간 30분. 붓다가 전하는 말씀은 결국 이 한마디입니다.


‘고통이 너를 찾아오는 게 아니라 네가 고통을 붙잡고 있는 것이다’


애초에 고통이라는 건 공기처럼 항시 떠다니는 존재이고, 내가 그 고통이란 걸 구태여 쥐고 있기에 괴롭다는 말이죠. 그러니 힘을 들여 쥐고 있는 고통을 놓으면 된다는 게 결론입니다.


그래, 힘들게 고통을 쥐고 있을 필요는 없지. 결론을 내곤 이너피스 하려던 찰나에 또다시 고통이 밀려옵니다. 괜히 열받아 벽을 치고 씩씩거리다 지쳐 잠에 들죠. 고통을 놓으라고요? 그게 됐으면 제가 이러고 있겠습니까? 벌써 열반에 이르렀다면 이미 꿀잠에 들었겠죠. 저 같은 인간들이 그 단계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을 성인이라 부르며 아직까지 칭송하는 거 아닐까요.


자, 이제 제가 쥐고 있는 고통을 돌아보겠습니다. 이사를 준비하는 요즘 저를 괴롭히는 건 불확실성입니다. 정확히는 나의 통제를 벗어났기에 확실하지 않은 것들이죠. 대부분의 일은 동일한 프로세스를 거쳐야 합니다. 일단 1단계가 정해져야 2단계로 → 2단계가 갈무리되어야 → 비로소 3단계에 착수할 수 있죠. 딱딱 들어맞을 필요는 없지만 어느 정도 예상은 가능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일이 그렇듯 이 프로세스가 정확히 지켜지는 일은 드뭅니다. 분명 며칠 안에 끝난다는 공사는 사전 작업에만 약속한 며칠이 지났고요. 당연히 그 뒤에 진행해야 하는 일(청소, 이사, 배송 등…)은 예약과 취소를 반복하며 잔뜩 꼬여버렸습니다. 날마다 뒤바뀌는 일정에 정말이지 미쳐버릴 것만 같았죠. 두피를 긁어대다가 바닥에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보면서 또다시 스트레스를 받는 악순환도 겪었습니다.


‘내 인생인데, 어째서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로만 가득한 거지?’ 이사 하나 하면서 이 모든 것을 야기한 세상의 탓을 하기까지 이르렀습니다. 이렇게 못난 마음으로 하루를 꽉 채우고 나면 심신이 누더기가 된 채 침대에 눕습니다. 괜히 억울해서 잠도 오지 않죠. 그럴 때마다 저는 다시금 부처님을 찾아갑니다.


다시,

-고통이 너를 찾아오는 게 아니라 네가 고통을 쥐고 있는 것이다…

-그래, 쥐고 있던 고통을 놓아주자

-아니… 근데 진짜!

의 반복이 반복됩니다.


결국 이사 문제가 뜻대로 풀리지 않으면서 오갈 곳 없는 신세가 되어버렸습니다. 부득이하게 열흘 정도를 빌린 방에서 지내야 했죠. 여러 개의 가방을 온몸에 걸친 채 방문을 여는 순간, 오래된 건물에서 나는 특유의 지린내가 풍겨왔습니다. 이것은 필시 사람의 것은 아니고 쥐의 오줌 냄새일 거라고. 맡아본 적도 없으면서 단번에 직감할 수 있었죠. 갈 곳을 잃은 인간이 자기연민에 빠지기에 너무나 적합한 장소였습니다.


꿉꿉한 이불에 몸을 넣자마자 온갖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이사 일정을 여유롭게 잡았더라면. 아니, 애초에 이사를 선택하지 않았더라면… 눈을 감자 퀴퀴한 냄새가 선명해졌고, 억울함의 농도는 실시간으로 짙어졌습니다.


마음의 평안을 찾기 위해 다시 붓다를 찾았습니다. 2시간 30분 짜리 분량의 영상이 재생되는 동안 입으로는 욕설을 내뱉고 주먹을 벽에 내질렀습니다. 왜 내가 선택하지도 않은 것들 때문에 고통을 받아야 하지? 적어도 내가 선택한 것이 이 결과를 초래했다면, 나는 이만큼 괴롭지 않았을 거란 확신까지 들었습니다.


그렇게 곰팡이와 동침한 지 일주일째. 일 년 주기로 만나는 (사회인 기준으로는 꽤나 가까운 사이인) 전 직장 동료가 있습니다. 저는 그를 ‘북촌의 현자’라 부르는데요. 세상 시니컬해 보이지만 본인과 함께 사는 고양이에게는 누구보다 스윗한 분이죠. 철없는 이야기 전문인 저는, 이따금씩 그분에게 조언을 얻곤 하는데요. 그럴 때마다 늘 그럴듯한 답을 던져주시곤 했습니다.


최근 제가 겪고 있는 사건사고를 숨 쉴 새도 없이 털어놓았습니다. 빌어먹을 이사와 망할 숙소의 상태. 요즘 제 삶을 둘러싼 통제 불가능한 것에 대한 모든 것들. 왜 제가 선택하지도 않은 것들 때문에 이렇게 고통받아야 하는지를요.


그러자 상대는 질문을 질문으로 받았습니다.


‘그것이 왜 파주씨의 선택이 아니라고 생각하시죠? 모든 선택은 패키지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꼭 필요한 한마디였습니다. 원래 맨홀에 빠진 사람은 내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는 법이니까요.


만약 이사를 하지 않았더라면? 그 이전에 같이 살기를 결심하지 않았더라면? 그보다 더 이전에 이 사람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감당할 수 없는 선택지에 다다르자 머리가 깨끗해졌습니다. 곰팡이방에 잠시 머무르는 게 선택의 패키지라면 기꺼이 감수할 수 있겠단 결론에 이르렀거든요.


사실 따지고 보면 곰팡이 향이 풀풀 풍기는 그 방을 고른 것도 전부 저의 선택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여러 숙소 중 여기가 베스트 초이스라 자신하며 결제까지 일사천리로 마쳤죠. 제가 선택한 것임을 망각한 건 왜일까요? 잘못된 선택으로 벌어질 일을 두고 스스로를 책망하기보단, 세상을 탓하며 마음 편히 분노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릅니다.


대환장파티였던 이사는 무사히 마무리했습니다. 큰 변화가 생겼다면 앞으로는 이 집에 물건 하나 들이는 것도 모두 협의가 필요한 상황이 됐다는 거겠죠. 더이상 나 혼자만의 공간이 아니니까요. 사소한 물건들을 고를 때도 고민이 필요합니다. 둘이 머리를 맞댄 채 물티슈의 평량이 어떻고, 변기세정제의 용량은 또 어떻고... 선택에 제약이 생기고 통제하지 못하는 것들도 분명 많아질 테지만, 더 재미있는 삶이 펼쳐지리란 확신이 듭니다.


통제 불가능한 것들로 인해 괴로워질 때면 모든 선택은 패키지라는 말을 떠올립니다. 결국 나의 선택이 벌일 일로 괴로운 것일 뿐, 통제불가능한 코스믹 호러 같은 게 아니라고. 이 사실을 자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한결 나아지네요. ‘패키지’라는 단어의 어감 때문인지 간혹 찾아오는 괴로움도 기꺼이 감당해야 할 썸띵이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바라보게 되기까지 합니다.


‘아, 이제 열반의 초입쯤에 다다른 것 같다’라는 헛소리를 쓰려던 찰나, 스마트폰 자판에 집중하며 천천히 걷느라 눈앞에서 지하철이 떠나고 있네요. 지각 확정입니다. 이런 망할 일이! 10초만 일찍 나설걸. 걸음을 조금만 빠르게 할걸. 폰을 만지지 말걸. 하지만 이 또한 풀칠을 쓴다’라는 보람찬 선택에 패키지로 딸려오는 고통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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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건 배팅을 했던 시기가 있습니다. (강원랜드나 마카오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건 아니고요.) 벌이는 일의 규모가 커질수록 제가 원하지 않던 방향으로 일이 흘러갈 때가 많더라고요. 그래서 요즘 저의 통제를 벗어난 것들에 대해 분노와 우울감에 휩싸였는데요. 지나보니 그렇지 않지만, 당시에는 통제되지 않는 것들을 향한 울분이 가득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우스꽝스러운 이야기가 되어버렸네요. 모쪼록 재미있게 읽어주셨기를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source: https://fullchill.stibee.com/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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