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번의 계약기간이 끝나간다.
1
봄이면 늘 가벼운 멀미를 느낀다. 그럭저럭 일을 계속하고 있고, 밥도 잘 챙겨 먹고, 분위기 좋은 카페도 종종 간다. 이 모든 것은 낮에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밤이 찾아오면 나는 완전히 자포자기한 사람처럼 군다. 옷은 되는대로 아무렇게나 벗어두고 침대에 누워 배달음식을 먹다 그대로 잠이 든다. 그것만이 스스로를 잃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인 양. 아침이 오면 잔뜩 부은 얼굴로 지하철을 타러 간다. 눈을 감은 것으로도 모자라서 두 손에 얼굴을 묻는다. 창문에, 기둥에 몸을 밀어붙이듯 기댄다.
어쩌면 이 멀미의 원인은 봄마다 방을 옮기는 탓일지도 모른다. 봄마다 이사를 하는 것도 벌써 10년이 다 되어간다. 1년짜리의 삶 여러 개를 벗어던지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셈이다. 삶이 여러 개의 시절을 갖는다는 말은 얼핏 경쾌하고 자유롭게 들리지만 실제론 그 반대다.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이 점점 늘어나다가 그 수가 어떤 임계점을 넘게 되면 여행자의 눈빛엔 기스가 난다. 이제 그는 여행자가 아니다. 돌아갈 곳이 고정되지 않은 자는 여행자가 될 수 없다. 방랑자라면 모를까.
이제 또 한 번의 계약기간이 끝나간다. 지난 1년 동안 지냈던 원룸은 곧 달큰하고 위험한 향내를 풍기는 멜랑콜리의 샘이 될 것이다.
2
이번 이사엔 관계자가 굉장히 많다.
첫 번째 관계자. 원래 살던 집의 주인은 맘씨 좋은 할머니다. 그는 열흘쯤 전에 내게 전화를 걸어 말했다. "세입자를 구했는데 계약금을 좀 보내드리려고요. 계좌번호 불러주세요." 할머니는 내게 50만 원을 보내줬다. 느닷없이 용돈이 생겼다.
두 번째 관계자. 이사 갈 집의 주인 역시 맘씨 좋은 할아버지다. 월세를 2만 원이나 깎아줬다. 다만 입이 좀 싼 것 같다. "원래 사는 부부가 임신을 해서 여자가 직장을 관뒀다나 봐. 남편은 벌이가 별론게지." 세입자를 갈아치우는 게 영 귀찮다는 투였다.
세 번째 관계자. 집을 구해준 중개사는 중개사 치고는 드물게 말을 조곤조곤하고, 어딘지 힘이 없어 보이는 내 또래였다. 그 점이 마음에 들어 계약을 하기로 한 건데, 정작 중개사는 계약 자리에 나오질 않았다. 연락이 통 되질 않자 집주인 할아버지는 욕을 했다. "신의도 없는 놈. 젊은 놈이 신의를 모르나." 부동산 사무소 사장이 벤츠를 타고 등장했다. 믹스커피와 계약서를 내오며 단단히 교육하겠다고 말한다. 다음날 새벽, 마침내 중개인에게 메시지가 왔다. <여태응급실에있었는데공황장애판정을받았습니다.이유불문하고정말죄송합니다.>
네 번째 관계자. 보증금을 빌리려면 은행원을 만나야 한다. 첫 번째로 찾아간 은행은 당연히 주거래 은행이다. 은행원은 모니터에서 눈도 떼지 않고 말한다. "저흰 버팀목은 취급 안 해서요. 다른 곳에서 알아보셔야 할 것 같네요." 두 번째 은행은 처음 가보는 곳이다. "불가능하진 않은데, 주거래 고객이 아니셔서요. 대기가 많이 밀려있기도 하고 통장이랑 카드도 새로 만드셔야 하고 이 주일까지 시간은 촉박하고…." 은행원의 말은 점점 빨라졌다. 그게 꼭 꾸짖는 것처럼 느껴져 그의 말을 끊는덴 약간의 용기가 필요했다. "그래서 된다는 건가요." "아뇨." 같은 대화를 6번 더 한끝에서야 겨우 대출을 내어줄 은행원을 만날 수 있었다.
마지막 관계자는 이삿짐 아저씨다. 집주인 할머니가 준 50만 원도 있겠다, 포장이사를 불렀다. 이삿짐 아저씨는 사람은 한 명 더 써도 되냐고 묻는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5층에 사는 게 미안해 선뜻 그러라고 한다. 아저씨들은 순식간에 방을 정리한다. 사람을 한 명 더 써서 돈이 꽤 많이 나왔다. 아저씨는 40만 원을 핸드폰에 찍어두고 땀을 뻘뻘 흘리며 불쌍한 척을 한다. "짐이 많네. 조금만 더 쳐줘. 너무 힘들어엉" 어차피 공짜로 생긴 돈이겠다 그냥 50만 원을 다 줘버린다.
텅 빈 방에서 집주인 할머니에게 전화를 건다. "그래요. 청소비 빼고, 저번에 50만 원 보내드린 거 빼고, 보내드리면 되겠네"
3
지금은 2주째 친구들 집을 떠돌아다니며 지내고 있다. 이사 갈 집에 살던 세입자가 입주 날짜를 조정해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친구들의 집에 찾아갈 때마다 술을 조금 사 간다. 이사 이야기를 안주 삼아 술을 나눠 마신다. 주인집 할머니를 천사로 착각해 이삿짐 아저씨에게 호구 잡힌 이야기도 들려주고, 대출을 받기가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해서도 얘기한다.
그러면 친구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해준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의 계약이 얼마나 남았는지, 집주인이 전세금을 얼마나 올려달라고 했는지, 대출은 얼마고 월세는 얼마인지에 대해서. 개중에는 나처럼 대출을 퇴짜 맞은 친구도 있고 일하다 병을 얻은 친구도 있고 곧 결혼을 앞둔 친구도 있다. 그 모든 일들이 결국엔 또 이사의 이유가 된다. 모두가, 늘 이사를 염두에 두고 지내고 있었다.
친구들이 잠들고 나면 그네들이 내어준 바닥에 상상의 모닥불을 지핀다. 눈을 감고 모닥불의 온기를 쬐며 친구가 내는 바스락 소리를 듣는다. 우리는 유목민이다. 삶을 방으로 퍼담아 내버리며 옮겨 다니는 유목민. 자의든 타의든, 때가 되면 움직여야 하는 유목민. 빌린 담요 안에서 몸을 웅크린다. 순례자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다. 앞으로도 꾸준히 이사를 하며 살아갈 모든 유목민족의 안녕이나 빌어볼까.
이왕이면 곰팡이가 피지 않은 자리를 찾아낼 수 있기를. 이왕이면 수압이 세고, 싱크대 밑에 바퀴벌레 약이 붙어있지 않은 자리에 머물기를. 벽보다 많은 것을 풍경으로 걸어둘 수 있는 창이 허락되기를. 유목을 피할 순 없더라도 조난은 피할 수 있기를.
(23.04)
이삿짐을 싸다가 계속 방을 옮기며 살아가는 삶의 형식이 꼭 유목민 같단 생각을 했습니다. 이사라는 이벤트 덕분에 인생의 한 시절을 구분해 낼 수 있는 것 같단 생각도 했고요.
오늘은 이사하면서 겪은 풍경들을 이야기로 엮어 보냅니다. 풀칠러님의 지난 이사 이야기도 궁금해지네요. 오늘도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source : https://fullchill.stibee.com/p/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