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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아보다 Dec 21. 2019

[2010년대 리뷰] 음원 강자 편



2010년대의 마지막을 담당하는 2019년이 저물어 간다. 이런저런 씁쓸한 이유로 리뷰할 맛이 나지 않는 2019년 대신, 특별판으로 2010년대 가요계 전체를 리뷰하려 한다. 단순 인기나 판매량 등으로만 정리하면 음원 강자들과 아이돌 음악들로만 수렴할 것으로 판단되지만, 한국 가요계의 양상이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았으므로 시대와 상황에 맞는 키워드를 선정하여 각 키워드 별로 정리하려 한다.


첫 주자는 ‘음원 강자’들이다. 2010년대는 음원 차트와 스트리밍 시장의 힘이 막강해진 시기이며, 이후 그 부작용 또한 논의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2010년대 초에는 ‘음원형 가수’나 ‘음원 강자’의 지위가 본격적으로 확립되기 시작하고, 2010년대 중반에는 협업(콜라보) 음원들이 홍수처럼 쏟아졌으며, 2010년대 말에는 음원 차트가 갖는 권위의 당위성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었다. (물론 이 시기 전반에 인기 아이돌 가수들은 음원과 음반을 가리지 않고 높은 성적을 기록했으나, 아이돌 음악은 따로 다루기로 한다.)






옴므 Homme <밥만 잘 먹더라>

작사 · 작곡: 방시혁 / 편곡: 원더키드(Wonderkid)

디지털 싱글 “Homme by ‘Hitman’ Bang”(2010.07.28.)


지금에야 ‘방탄소년단 프로듀서’로 더 유명하지만, ‘방시혁’은 1990년대 말부터 박진영 사단에서 활동한 작곡가이자 프로듀서였다. 2000년대 중반 ‘빅히트 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하고 2000년대 중·후반부터 프로듀서로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2000년대 말에는 <총 맞은 것처럼>(백지영), <심장이 없어>(에이트), <죽어도 못 보내>(투에이엠) 등 파격적인 가사와 애절한 멜로디의 곡들을 연달아 히트시키며 주목 받았다.


옴므’는 이른바 ‘유닛 그룹’의 새로운 방향이었다. 방시혁의 곡들로 성공한 ‘에이트’의 ‘이현’과 ‘투에이엠’의 ‘창민’으로 이루어졌다. 두 그룹 모두 아이돌보다는 가창력을 갖춘 보컬 그룹의 이미지가 강했기에 옴므는 ‘건강미를 앞세운 남성 그룹’의 이미지를 획득했다. 서정적인 멜로디, 두 보컬의 거친 목소리 톤, ‘죽는 것도 아니더라’는 식의 가사, 근육을 앞세운 육체미 마케팅 등이 더해져 ‘그룹의 결성도, 그룹과 곡의 방향성도 잘 맞았다.’는 평가를 들었다. 워낙 미디엄 템포의 발라드가 넘치다 못해 흐르던 시기였기에 이 곡 또한 한계를 맞고 식상하게 잊힐 거라 생각한 이들도 있었으나, 그러기엔 비 아이돌 성향의 소비자가 차트에서 들을 곡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라라라>(에스지 워너비)와 더불어, 오랫동안 폭넓은 청자들을 수용하며 음원 차트 · 컬러링 · 벨소리 등에서 널리 수용된 곡. 아쉽게도 이듬해 발매한 <남자니까 웃는거야>가 <밥만 잘 먹더라>의 아성을 넘지 못하며, 가창력과는 별개로 ‘옴므’라는 그룹의 마지막 히트곡이 되었다.






버스커 버스커 Busker Busker <벚꽃 엔딩>

작사 · 작곡: 장범준 / 편곡: 장범준, 배영준

정규 1집 “버스커 버스커”(2012.03.29.)


버스커 버스커’의 의미는 꽤 다양하다. 엠넷의 경연 프로그램 “슈퍼스타 K” 시리즈 전성기의 상징이자 관련 출연자 중 가장 성공한 케이스이며, ‘음원형 가수’의 상징이기도 하다. 대중에게 각인된 ‘1인 주도형 밴드’의 전형을 벗어나지 못한 경우이자, 밴드의 인기가 ‘그 주도적 1인’에게 그대로 계씅된 경우이기도 하다.


<벚꽃 엔딩>은 사실 모두가 아는 곡이라 설명이 힘든 곡이다. 단순한 전개와 대중적인 멜로디, 싱그러운 감성과 나긋한 악기 편성이 조화를 이루어 ‘봄’과 ‘벚꽃’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버스커 버스커의 정규 1집이 단숨에 모든 음원 사이트에 줄을 세웠고, 그 정점에 <벚꽃 엔딩>이 서 있었다. 이 음반에 수록된 <여수 밤바다>, <이상형>, <꽃송이가> 등도 버스커 버스커의 대표곡으로 자리 잡았고, 음원 차트의 성장 이후 음반의 활동곡만 히트하던 흐름을 뒤집어 음반 전곡이 대중적인 인지도를 거두었다.


이러고 끝날 줄 알다. 그러나 <벚꽃 엔딩>은 2010년대 초반의 히트곡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부담감 없이 청취 가능한 전개와 멜로디로 인해 생각보다 오랫동안 차트에 남았고, 봄마다 다시 차트 상위권에 오르며 ‘연금’ 혹은 ‘좀비’라는 별명까지 획득하며 ‘음원 강자’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또한 ‘계절 음악(시즌송)’ 시장의 전통적 분야였던 여름과 겨울이 모두 약화하는 추세였는데, 단숨에 ‘봄 캐럴’이라는 새로운 트렌드를 열어 버렸다. 2010년대 후반 기준으로 봄마다 흥행하는 <봄 사랑 벚꽃 말고>(하이포, 아이유), <봄이 좋냐?>(십센치), <벚꽃이 지면>(프로듀스 101) 등도 결과적으로는 <벚꽃 엔딩>의 후발 주자들이며, 여전히 ‘봄 음악’ 안에서도 압도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소유, 정기고 (피처링. 릴보이) <썸>

작사: 릴보이, 에스나, 정기고, 민연재, 제피

작곡: 에스나, 김도훈, 제피

편곡: 김도훈, 용배

디지털 싱글 “썸”(2014.02.07.)


2010년대 초반에는 특히 협업 싱글들이 많이 발매되었고, 2014년에는 그 흐름이 절정으로 치달았다. 비 아이돌 가수들은 아이돌 팬덤의 강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이돌 가수들은 그룹에서의 음악과 달리 개별 멤버의 가창력과 매력을 어필하기 위해 협업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씨스타’ 멤버 ‘소유’는 이미 2012년 <오피셜리 미씽 유, 투 Officially Missing You, Too>를 히트시키며 콜라보 트렌드의 중심에 섰다.


<썸>은 협업 흐름의 절정에 달한 곡이었다. 같은 해 발매된 <한여름밤의 꿀>(산이 X 레이나) · <봄 사랑 벚꽃 말고>(하이포 X 아이유) · <사람냄새>(정인 X 개리) · <나는 달라>(하이 수현) · <애타는 마음>(울랄라 세션 X 아이유) 등의 협업곡들은 물론, <야생화>(박효신) · <눈 코 입>(태양) · <미스터 츄>(에이핑크) · <200%>(악뮤) 등 쟁쟁한 곡들을 모두 제치고 연간 음원 차트 1위(가온, 멜론 기준)에 올랐다. 인디에서 나름의 인지도를 쌓고 있던 ‘정기고’가 누구인지 대중에게는 중요치 않았고, 단지 각자의 역할을 다해 최선의 결과를 뽑아 내었다는 사실만으로 대중에게 강하게 어필했다. 물론 그 어필의 기회를 얻은 것은 ‘소유’라는 브랜드의 역할이 강하게 작용했다.


‘소유’의 주요 협업 싱글


2012.11. <오피셜리 미싱 유, 투> with 긱스

2013.04. <굿바이> with 홍대광

2013.09. <착해 빠졌어> with 매드 클라운

2014.02. <썸> with 정기고, 릴보이

2014.09. <틈> with 권순일, 박용인

2015.01. <팔베개> with 기리보이, 기현

2015.10. <어깨> with 권정열

2016.08. <잠은 다 잤나봐요> with 유승우

2017.02. <비가와> with 백현






태연 (피처링. 버벌진트) <아이 I>

작사: 태연, 버벌진트, 마플라이, 라이언 전, Myah Marie Langston, Bennet Armstrong, Justin Armstrong, Cosmopolitan Douglas, David Quinones, Jonathan Asher

작곡 · 편곡: 라이언 전, Myah Marie Langston, Bennet Armstrong, Justin Armstrong, Cosmopolitan Douglas, David Quinones, Jonathan Asher

미니 1집 “I”(2015.10.07.)


태연’이 ‘소녀시대’ 메인 보컬로 이름을 날린 시간이 꽤 길다. 따라서 솔로 출격이 이르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나 ‘솔로 가수’ 태연에게 기대되는 이미지는 <만약에> · <사랑인걸요> · <들리나요> · <별처럼> 등의 발라드나 <달라> 류의 알앤비 쪽에 조금 더 가까웠다. 소녀시대 음악으로 범위를 넓히더라도 팝 록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았고, 그래서 <아이>는 의외였다. 대단하지만 위험한 도전이었다.


결론적으로 태연은 솔로 가수로서 크게 성공했다. 청량하고 시원한 음악적 이미지, 명확하고 또렷하게 음과 가사를 짚어내는 능력, 범용성이 큰 태연의 음색, 오랜 활동의 경륜 등이 더해져 소녀시대와는 다른 계열의 커리어를 만들었고, 의외로 성공하기 힘든 ‘그룹 출신 솔로 아이돌’로는 드물게 성공을 거두었다. <레인 Rain> · <와이 Why> · <11:11> · <섬띵 뉴 Something New> · <사계> 등으로 커리어를 쌓으며 성공 가도를 이어갔고, 태연은 에스엠 시스템 내 가장 이상적인 솔로 아티스트가 되었다.






백예린 <바이 바이 마이 블루 Bye bye my blue>

작사: 구름, 백예린 / 작곡 · 편곡: 구름

디지털 싱글 “Bye bye my blue”(2016.06.20.)


어느 순간부터 여성 솔로 가수들의 성공 방향이 바뀌었다. 비디오 음악의 시대임에도 ‘디바’류의 여성 솔로 가수들이 예전만큼 화려한 행보를 이어가지는 못하는 반면, 음원 차트의 득세로 인해 음악(특히 음색)만으로 주목받으며 강세를 보이는 가수들이 생겨났다. 화려한 치장과 적극적인 어필이 없어서 가시적인 이목을 끌지 못했을 뿐, 분명 그 현상은 큰 줄기를 이루고 있었다. 그 음원 강자형 여성 솔로의 맨 위에는 ‘아이유’가 있다. 그 다음은 ‘헤이즈’, ‘이하이’, ‘박보람’, ‘백아연’ 같은 이름들이 떠오른다. 그 흐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가 ‘백예린’이다.


통통 튀는 감성과 캐릭터성 중심의 ‘박보람’, 공감대 짙은 가사와 솔직한 음색의 ‘백아연’에 비해 ‘백예린’은 보다 장르 지향적이며, 몽환적인 분위기를 앞세운다. 음색 안에 감성을 눌러 담아 강하지 않은 어투로 전달하여 곡의 정서를 확장하고, 튀지 않지만 탄탄한 가창력으로 알앤비 · 재즈 · 어쿠스틱 등 다양한 장르와 위화감 없이 결합한다. <바이 바이 마이 블루>는 <우주를 건너>에서 출발해 <그건 아마 우리의 잘못은 아닐 거야>에 이르는 과정을 잘 설명하고, 백예린이 청중에게 어필할 방향을 설정하는 데에 큰 힌트가 되었다. ‘치즈’ 출신의 프로듀서 ‘구름’의 존재가 서로에게 시너지가 되었고, 결국 백예린만의 ‘트렌디하고 우아한 정서’가 담긴 곡들이 음원 차트에서 힘을 받았다. 결국 2019년의 피날레는 <포포 Popo>와 <스퀘어 Square>를 앞세운 백예린의 몫이 되었다.






볼빨간사춘기 <우주를 줄게>

작사: 안지영, 우지윤 / 작곡: 안지영, 바닐라맨 / 편곡: 바닐라맨

정규 1집 “Red Planet”(2016.08.29.)


2010년대 초 ‘버스커 버스커’에 대한 2010년대 후반의 대답


음악적인 색채나 이미지는 굉장히 다르지만, ‘볼빨간사춘기’는 여러모로 버스커 버스커와 공통점이 많다. “슈퍼스타 케이” 시리즈 출신이고, 스스로 곡을 쓰고 부르며, 음원 차트 및 스트리밍 시장에서 압도적으로 강하다. 누가 들어도 알만한 음색을 가졌으며, 대체로 어쿠스틱한 분위기가 강하다. 우승은 못했으나, 압도적인 성적과 폭넓은 지지도를 바탕으로 각 시리즈 최대 성과라는 평을 듣는다. 자기 색깔이 너무 강해 ‘자기 복제’라는 비판이 따른다는 점까지 비슷하다. 볼빨간사춘기가 상승세를 타던 당시 많은 이들이 버스커 버스커를 끌어와 설명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볼빨간사춘기를 떠올릴 때 ‘팬덤’보다 ‘대중성’이라는 단어가 먼저 떠오르는 것은, 이들이 폭넓은 다수 대중을 끌어안는 저력을 보였기 때문이다. 인디 레이블 ‘쇼파르 뮤직’ 소속이면서도 대중 지향적인 색깔을 선택했고, 이는 음원 및 스트리밍 시장의 성장과 맞물리며 손에 꼽을 성공으로 이어졌다. 정규 1집 활동곡 <우주를 줄게>는 볼빨간사춘기 성공의 시작을 알린 곡이다. 2016년 8월 발매했으나 10월 경에 본격적으로 터졌고,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노래를 수상하기도 했다. 1년 만에 1억 5천만 건이 넘는 스트리밍과 2천 7백만 건 이상의 다운로드를 기록했는데, 이때 차트에는 임창정 · 박효신 · 에일리 · 다비치 · 태연 · 크러쉬 · 방탄소년단 · 에이핑크 · 레드벨벳 · 트와이스 · 비투비 · 블랙핑크 등이 있었다. ‘대중가요’라는 개념이 흐릿해지고 각 장르 혹은 가수의 강력한 팬덤을 지향하는 현 대중음악 산업의 빈 곳을 절묘히 파고든 것이다. 가요 산업에서 거대 자본의 힘이 강해지는 바, 인디 밴드로는 다시 기록하기 힘든 성공을 이루어 냈다.






아이유 IU <밤편지>

작사: 아이유 / 작곡 · 편곡: 제휘, 김희원

디지털 싱글 “밤편지”(2017.03.24.)


201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처음과 끝


솔직히 <좋은 날>과 <너의 의미> 사이에서 많이 고민했다. 아이유를 ‘음원 강자’ 카테고리에 넣는 게 맞는지도 고민했다. 어쿠스틱 보컬로 시작해 아이돌 이미지로 돌아섰다가 다시 뮤지션으로 방향을 선회했고, 이 과정에서 많은 곡을 성공시켰다. <좋은 날>을 통해 이른바 도제 시스템을 벗어난다데 실력까지 갖춘 아이돌 이미지를 형성했고, <너의 의미>는 아이유가 아이돌 이미지에서 벗어나 폭넓은 세대와 계층을 포용하는 가수로 도약하게 이끈 곡이다. 본연에 내재된 어쿠스틱하고 복고적인 감성을 발현한 리메이크 음반 이후로 아이유는 ‘작사가’ 아이유를 등판시켰다. 가사를 쓰며 본격적으로 자신의 시각과 사고를 음악에 투영하기 시작했고, 곧 음악을 넘어 모든 분야에서의 활동을 자기 계획 아래에 두기 시작했다.


<밤편지>는 작사가 아이유가 지금까지 쓴 곡 중 가장 큰 성과이다. 동시에 음원 차트 롱런의 한 축이다. 무엇보다 아이유가 삶과 음악을 대하는 방식, 그리고 대중이 아이유와 그 음악을 받아들이는 방식의 표상이다. 오래된 포크 음악의 분위기와 따뜻한 정서, 시적인 노랫말을 담은 이 곡은 트렌디한 요소가 없으며, 다소 심심하다는 우려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트렌디한 요소가 없어 시기를 타지 않았고, 잔잔하게 청중에게 스며들어 오랫동안 사랑받았다. 작사가 아이유가 등장한 뒤 이전만큼 대중적이거나 쉬운 노래가 나오지 않는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표하는 의견도 있었는데, <밤편지>를 통해 대중은 아이유의 음색과 가사에 더 주목하면서 아이유가 지향하는 방향을 더 잘 이해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아이돌의 색채가 지워졌고, 성숙한 태도로 청중과 교감하며 성장하는 뮤지션이 남았다. 어쩌면 ‘음원 강자’는 아이유의 정체성이 아니라, 아이유라는 현상의 수많은 결과 중 하나가 아닐까.






헤이즈 Heize (피처링. 신용재) <비도 오고 그래서>

작사: 헤이즈 / 작곡: 헤이즈, 다비 / 편곡: 다비

미니 3집 “/// (너 먹구름 비)”(2017.06.26.)


'헤이즈'가 처읍부터 잘된 것은 아니다. 2014년에 발표된 데뷔곡 <조금만 더 방황하고>를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나름의 색깔은 갖췄으나 성공은 요원해보였다. “언프리티 랩스타 2”는 부진했으나, ‘헤이즈’라는 이름을 대중에게 알리는 면에서는 성공적이었다. ‘엑소’의 ‘첸’과 함께 한 에스엠의 협업 프로젝트 싱글 <썸타>가 차트에서 어느 정도 흥행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돌아오지마>가 제대로 터지며 헤이즈에게 일종의 기대가 생기기 시작했고, <비도 오고 그래서>는 그 기대에 부합했다.


헤이즈의 음색은 ‘한 끗 차이’로 특별하다. 아이돌 가수들처럼 아주 어리지도 않고, 걸출한 기성 보컬들처럼 아주 성숙하지도 않은 어딘가에서 헤이즈는 ‘커버린 외면 속 어린 자아’의 내밀한 감정선을 가장 솔직히 표현한다. 하고 싶은 말을 속 시원히 뱉어버리는 종류의 솔직함이 아닌, 그러지 못하는 상황 속 복잡한 생각과 감정을 차곡히 잘 챙겨 묘사하는 종류의 솔직함. 헤이즈의 노랫말은 보편성을 갖춘 일기장과 같다.


<비도 오고 그래서>를 통해 헤이즈는 비 오는 시기의 우울을 탁월히 조명했다. 흐느끼는 울음은 신용재에게 맡기고 자신은 이전보다도 절제된 톤으로 그리움의 감정을 짚었는데, 이 조합이 묘하게 맞아 떨어졌다. 노래 속에서 감정을 모두 소모해버리는 종류의 발라드가 아니라, 비로 인해 생성된 감정을 끝끝내 머금음으로써 이 곡은 비가 올 때마다 되살아났다. 2주 간격을 두고 발매된 <빨간 맛>(레드 벨벳)이 이상적 여름의 이미지를 선명한 색감으로 표현했다면, <비도 오고 그래서>는 흐리고 비가 자주 내린 현실의 감정과 분위기를 담당했다.






악뮤 <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어, 널 사랑하는 거지>

작사 · 작곡: 이찬혁 / 편곡: 이현영

정규 3집 “항해”(2019.09.25.)


2019년 연예계, 특히 가요계는 각종 어두운 이야기가 속출했다. 버닝썬 게이트, 불법 촬영 및 유포 사건, 마약 스캔들, 과거(학교폭력) 논란, 프로듀스 시리즈 투표 조작 사건 등. 이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격론을 불러 일으킨 사건이 바로 ‘음원 사재기 및 조작 논란’이다. 이 사건은 ‘프로그램 및 인력을 동원한 스트리밍 수 올려치기’와 ‘양산형 발라드에 대한 논란’이 혼재되어 있다. 전자는 음원 및 스트리밍 차트에 대해 사용자들이 느끼는 위화감으로 인해 촉발되었고, 후자는 현재 한국 발라드 장르에 대한 논의로 이어졌다. 전자가 ‘조작이 맞다면 노래가 좋더라도 소비하면 안 된다.’는 식의 논리라면, 후자는 ‘정말로 그런 노래들이 좋은가’에 대한 물음이다.


후자의 논의와 맞물려 악뮤의 신곡은 ‘양산형/도제식 발라드’의 훌륭한 반례를 제공한다. <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어, 널 사랑하는 거지>는 흔히 말하는 ‘지르기 창법’을 위해 곡이 설계되지도 않았고, 감정에 과몰입하여 표현을 놓치지도 않았으며, 청자를 감정적으로 무너뜨리기 위한 억지 열창도 없었다. 대신 ‘악뮤’라는 기존의 브랜드 파워, 그리고 성숙한 음악적 철학으로 청자에게 서서히 스미는 음악을 만들어 청중을 천천히 설득했다. 청중이 예상했던 재기발랄한 모습은 없었지만, 어느덧 시간이 가고 이들도 차근히 성장해간다는 사실이 잔잔하게 어필하며 음원 차트 올킬에 성공했다. 흔히 거론되는 ‘성공 공식’ 하나 없이 빚어낸 결과였다.


악뮤가 성장하는 모습이 대중과 충분히 공유됐고, 그렇게 형성된 브랜드 파워는 다른 이들이 갖기 힘든 ‘대중성’을 갖게 됐다. 나름의 철학을 차곡히 담았지만 청중에게는 다소 낯설 수 있는 도전과 변화는 그 ‘대중성’으로 보완했다. 흔히 말하는 히트 공식이나 치트키 없이도 음악적 내실을 쌓으며 청중을 설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악뮤가 잘 보여줬다. 음악적 고찰이나 주제 의식 없이 비슷비슷한 곡을 찍어내는 사람들은 악뮤의 성장과 발전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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