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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아보다 Nov 27. 2019

양산형 발라드, 그 찝찝한 열풍

2019년 10월 멜론 월간 톱100.


<이 번호로 전화해줘>(바이브), <헤어져줘서 고마워>(벤), <술이 문제야>(윤민수·장혜진), <사랑에 연습이 있었다면> · <조금 취했어>(임재현), <사랑이란 멜로는 없어>(전상근), <니 소식> · <새 사랑>(송하예), <포장마차> · <이별주>(황인욱), <있어줘요>(장덕철), <오늘도 빛나는 너에게>(마크툽), <이별행동>(이우) 등등, 음원 차트에 발라드들이 잔뜩 깔린지는 이미 꽤 되었다. 이 제목들을 보고, 카페에서 심심찮게 흘러나오는 이 곡들을 듣고서 궁금증이 증폭됐다. 우리는 정말 발라드의 대유행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이런 발라드 열풍 아닌 열풍에 문제는 없는지.


이 노래들의 인기가 아예 이해할 수 없는 정도는 아니다. 차트 위의 발라드들은 기승전결 구조 · 이별 가사 · 절절한 창법 · 고음 배치 등 나름의 색깔을 갖췄고, 일정 수준 이상의 팬층을 확보했다. ‘고음병’이라 비꼴 정도로 한국 가요계가 고음에 막대한 가산점을 부여해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아이돌 위주의 음악 체계에 질린 청자들, 혹은 노래방 애호가들이 이쪽으로 몰린 것 또한 충분히 이해 가능한 흐름이다.


소셜 미디어의 영향력 확대라는 측면으로 파악하자면 딱히 우리나라만의 현상은 아니다. 빌보드 차트 또한 ‘틱톡 시대’를 그대로 담아내고 있으며, 이에 힘입어 <올드 타운 로드 Old Town Road>는 연일 기록을 경신했다. 페이스북 · 유투브 등 온라인 매체와 소셜 미디어에서 추천하는 곡들을 접하고 관심을 갖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다만 이전과는 다른 흐름이 잡힌다. 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사재기 의혹’ 또는 ‘조작 논란’이다. <지나오다>로 유명해진 가수 ‘닐로’의 소속사 ‘리메즈 엔터테인먼트’는 의혹이 억울하다며 문화체육관광부에 조사를 의뢰했고, 문체부는 ‘제한적 표본으로 인한 판단 불가’ 판정을 내렸다. 따라서 ‘사재기라는 증거가 없기에’ 사재기로 부를 수 없다. ‘블락비’ 멤버 ‘박경’이 의혹을 제기했고, 지목당한 해당 가수들은 반박과 동시에 법적 대응을 선언했다. 의심을 받는 가수들 중 억울한 가수가 있을 수 있고, 아예 그런 일이 없었다고 발표가 날 수도 있다. 문체부도 사실로 밝히지 못한 일을, 해당 업계 종사자들도 언급을 조심해왔던 일을, 일개 글쟁이가 ‘맞다’고 경솔하게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다만 사재기로 볼 수 없다고 하여 이 일이 아무런 메시지나 의미 없이 사라져버린 해프닝은 아니다. 그래프를 그려가며 사재기 의혹을 제기하고 이에 동조한 사람들이 다수 발생했다는 사실은 이용자들이 발라드의 차트 점유 현상을 납득하지 못한다는 방증이며, ‘차트에 대한 불신’의 촉매제로 작용했다. 현직 가수들이 직간접적인 경험을 발언하고 있다는사실 또한 이러한 의견에 신빙성을 더한다. 소위 '기계' 논란에 충격받은 아이돌 팬덤이 음원을 포기하고 실물 음반 시장으로 옮겨 갔고, 아이돌 팬덤의 음반 판매량 기록은 대부분 최근 1~2년 안에 수립되었다.


아이돌 음악을 듣지 않는 사람들이 모두 지금의 발라드 시장으로 옮겨갔다는 증거도 없다. 반(反) 혹은 탈(脫) 아이돌 성향을 갖는다고 해서 이쪽으로 전부 쏠릴 만큼 한국 대중가요 산업계가 단순하거나 편협하지 않다. 많은 가수들이 다양한 음악을 만들고 있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옛 노래만 듣거나, 아예 가요를 안 듣는 수도 생긴다. 그렇다고 ‘노래방 가수’와 ‘혼코노족’이 차트를 움직일 거대한 힘을 갖는다고 보기 쉽지 않다. 현재 노래방 산업은 정체기를 겪고 있다. 여전히 많은 노래방들이 성업하고 있으나, 없어지는 노래방의 수는 늘고 신설되는 노래방의 수는 줄고 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기계’나 ‘조작’을 생각하는 이유이다.




지금 차트를 뒤덮은 발라드들의 구조적인 문제는 이른바 ‘양산형’이라는 것이다. 예상 가능한 곡의 구조와 편곡은 고리타분하며, 근원적 고찰 없는 가사와 고음 자랑 위주의 창법으로 청자에게 획일적 감정을 강요한다. 귀에 피가 날 듯 울기 바쁜 고음들은 차라리 소음에 가깝다. 인간으로서의 서정을 녹여내는 것이 아니라 배설한다.


양산형 발라드의 첫 번째 문제는 발라드의 질 하락이다. 파편적 감성과 고음 위주의 음악을, 나아가 이러한 음악이 ‘주류 발라드’로 통용되는 작금의 현실을 청자에게 주입한다. 이른바 ‘치트키’로 통용될 틀을 만들고, 주물을 찍어내듯 반복해서 대동소이한 음악을 양산한다. 인간의 감정에 대한 고찰 · 교감 · 위로, 감성, 음폭과 음량의 조절 등 기존에 알던 발라드의 강점이 모두 사라지고 있다.


두 번째 문제는 가창력의 정의 문제이다. “나는 가수다”를 비롯한 각종 경연 프로그램의 부작용이었던 ‘고음 만능주의’가 이제는 음원 차트에서도 여과없이 드러나고 있으며, 지금의 양산형 발라드들이 이를 부추기고 있다. 고음을 잘 지르면 실력 있는 가수이고, 그걸 못하는 이들은 진정한 가수라고 볼 수 없다는 인식은 이들에게 중요한 양분이 된다. 그러한 척도에 맞춘 곡들 – 지금 손쉽게 접하는 양산형 발라드들이 지속적으로 재생산되니 차트 위 음악들은 개성이 사라지고, 자연스레 고음은 가창력의 척도로 인식된다.


이런 획일적인 잣대가 가창력 또는 음악성의 기준인 것처럼 음악가와 청중 사이에 암묵적인 합의가 이루어지면 사태는 굉장히 위험해진다. 새삼스레 언급하자면, 곡에 필요한 고음과 고음을 지르기 위한 곡은 천양지차이다. 또한, 어떤 가수가 다양한 장르와 음폭을 소화하는 것은 분명 좋은 무기이나, 모든 노래가 고음 위주여야 할 필요도 없을뿐더러 무색무취의 기술 자랑보다는 확고한 자기 색깔을 효과적으로 어필하는 가수가 훨씬 가치 있다.


세 번째 문제는 가요산업의 질적 하락이다. 양산형 발라드가 차트 위에서 승승장구하는 지금의 시장은 가수와 청중 모두에게 좋지 않다. 전도유망한 가수들은 자기 탐구와 성장의 기회를 빼앗기고, 이미지 조기 소진이라는 암초를 맞닥뜨린다. 청중은 그저그런 색깔로 비슷하게 찍어내는 노래를 지속적으로 접하는 동안 정말 좋은 곡과 가수를 접할 기회를 박탈당한다. 따라서 가수들은 개성을 빼앗기고, 청중은 가요산업에서 관심을 거두게 된다.


이는 모든 장르가 매니아화되어 대중가요의 주요 흐름이 희미해지는 것과는 다른 문제이다. 미디어가 발전하고 음악 장르가 다양해지며 소위 ‘유행가’라 부르기 힘든 곡들이 사라지는 현상은 결국 대중의 폭넓은 선택권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지금의 양산형 발라드는 선택권 박탈에 가깝다. 비슷한 곡들이 차트를 점령해버리니 청중이 손쉽게 가요에 관심을 끊게 된다. 음악에 밀접한 삶을 산다면 어떤 방법으로든 음악을 듣겠지만, 그렇게 사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선택권을 박탈당한(그렇게 느끼는) 이들이 가요계를 떠난다면 결국 가요산업은 양적으로 수축하게 되고, 불황의 틈바구니에서 상업적 흥행을 위한 ‘치트키’를 남발하게 된다. 다양한 개성과 취향이 존중받지 못하고 획일적 색깔을 주입하는 가요산업은 당연히 질적으로 하락할 수밖에 없다.


결국 이는 경쟁을 유도하는 현재의 차트 체제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다양한 음악을 접할 기회를 제공하는 대신 자본과 결탁한 음원 사이트들은 실시간 차트에 권위와 대표성을 부여했다. 이 때문에 차트 진입 경쟁은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고, 이른바 ‘줄세우기’ 문화로 이어졌다. 장범준 · 백예린 · 에픽하이 · 아이유 · 악뮤 등 음원에서 강한 모습을 보이는 가수들을 제외하면 줄세우기는 곧 아이돌 팬덤 간 화력 경쟁의 양상을 그대로 드러냈다. 실시간 차트와 아이돌 팬덤에는 ‘그들만의 리그’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그러나 ‘그들만의 리그’라는 비판은, 현재의 양산형 발라드 시장과 음원 차트에도 유효하다. 더군다나 문체부의 ‘열린 결말’로 인해 음원 차트의 신뢰도는 하락했고 무수한 뒷말을 낳고 있다. 생산자들은 법적 조치를 거론하고, 음원 사업자들은 자료를 공개하지 않으며, 소비자들은 불신한다. 과도한 경쟁 체제를 본격화했다는 점에서 아이돌 팬덤 문화 또한 책임을 피할 수 없으나, 그나마 이들은 실구매자들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기계’와 ‘조작’이라는 단어가 공공연한 사실처럼 돌아다닌다. 경쟁을 부추기는 것도 모자라 공정한 경쟁마저 담보되지 않는 박탈감을 안긴다는 점에서 현 실시간 차트 체계에 대한, 나아가 가요 산업 전체에 대한 불신은 꽤 합리적이며, 이는 결코 좌시할 수 없는 현상이다.




물론 모든 발라드들이 지금의 ‘양산형 발라드’의 모습을 갖춘 것은 아니다. 여전히 많은 아티스트들은 확고한 사고와 방향성을 음악에 담아내고 있다. 악뮤 · 박새별 · 아이유 · 볼빨간사춘기 등은 작금의 양산형 발라드들을 훌륭히 반박한다. 30년이 다 되어 가는 경력에도 과감한 시도를 주저 않는 윤종신 같은 이들 또한 존재한다.


수많은 노래방형 가수들이 양산되고, 이들이 엇비슷한 구조의 노래를 들고 나와 하나같이 고음을 질러대는 지금의 시장은 전혀 이상적이지 않다. 이러한 곡들을 좋아한다면 그것 또한 존중받아 마땅하지만, 공정성에 의문이 제기되는 현재의 경쟁적 시장 구조와 더불어 폭넓은 가요 생산 및 소비 기회 박탈이라는 어마어마한 부작용을 낳고 있는 현 가요 산업에 대한 자성이 필요하다.


가수들에게 묻고 싶다. 정말 삶과 사람에 대한 고찰을 바탕으로, 진심을 담은 노래를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스스로의 멋에 취해 소리를 지르기 바쁜 것인지.


음원 사이트 종사자들에게 묻고 싶다. 음원 수익은 챙기면서, 왜 그들을 자기들의 시상식에는 세우지 않는지.


그리고 사용자들에게 묻고 싶다. 정말 노래만 좋으면 되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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