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하' 미니 5집 "Unstable MIndset" 리뷰
<비밀번호 486>과 <혜성>이 히트치던 시절을 뒤로한 '윤하'는 점점 아티스트스러운 면모를 부각했다. 정규 2집(2008)에서는 폭넓은 장르 소화력을 부각하고, 정규 3집 파트 B(2009)에서는 단순히 '잘하는' 정도가 아니라 자기만의 오롯한 감성을 표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어필했다. 소속사와의 갈등과 오랜 공백 끝에 발표한 정규 4집(2012)에서는 평론가와 매니아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윤하의 록 포텐이 제대로 터졌고, 미니 2집(2013)은 다양한 뮤지션과의 콜라보를 통해 독자적 영역 구축을 기치로 삼았다. 다소 힘이 빠졌던 미니 3집(2013)과 수많은 싱글곡들, 그리고 감각과 감정의 심연으로 들어가버린 정규 5집(2017)을 거치며 윤하는 여전히 '아티스트'임을 증명하고 싶어 했다.
그러는 사이 윤하의 이미지도 <비밀번호 486>에서 조금은 멀어져 있었다. <텔레파시>와 <원 투 쓰리>가 실패한 이후 더 이상 그런 곡을 타이틀로 내세우지 않았고, <기다리다>를 비롯해 <첫눈에> · <오늘 서울은 하루종일 맑음> · <그 거리> · <오늘 헤어졌어요> · <편한가봐> · <내 남자친구에게> · <괜찮다> · <우산> · <아니야> 등이 스테디 셀러로 남았다.
'아티스트'의 존재감과 책무를 잠시 내려놓고 '보컬'로 돌아온 윤하의 미니 4집(2019)의 자연스럽고 친숙한 모습에 대중은 호의적으로 반응했다. 수많은 유사 발라드들이 점령한 차트 위에서도 <비가 내리는 날에는>은 대중의 힘을 받았고, 따뜻한 분위기의 <사계>와 쓸쓸한 온도의 <론리 Lonely> 등 수록곡들도 차트 중·상위권에서 힘을 받았다.
전작 미니 4집이 호평받은 이유는 보컬리스트 역할에 집중하면서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다가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호평의 또 다른 이유는 음악적 완성도 때문이었다. 음악적 고찰과 완성도를 놓지 않음으로써, 발라드 홍수 시대에도 발라드 장르로 경쟁력을 확보했다. 삶과 사랑에 대한 다양한 소재를 포착하고, 이를 밀도 있게 다룸으로써 윤하가 누구인지를 충실히 입증했다.
이번 미니 5집은 미니 4집에서 다루었던 소재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녹여내어 연작 시리즈를 완성했다. 미니 4집이 대중에게 '편안한(stable)' 분위기인 발라드 위주라면, 미니 5집은 윤하가 심적으로 '불안정했던(unstable)' 시기를 떠올리게 하는 록 색채가 굉장히 뚜렷하다. 미니 4집을 좋아했던 대중들보다는, 정규 4집을 좋아했던 오랜 팬들에게 조금 더 가깝다.
(음반 소개글 中)
'존재성'과 '살아감'에 대해 다루며 계절적 이미지를 차용한 것은 <사계>와 <윈터 플라워 Winter Flower (피처링. 알엠 RM)>의 공통점이지만, 이 둘은 전혀 다른 색채를 담고 있다. 윤하의 미니 4집이 여름과 비에 초점을 맞춘 것에 비해 <윈터 플라워>는 철저히 겨울에 집중하고 있으며, <사계>의 따뜻함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출사표적 성격이 강했던 <슈퍼소닉 Supersonic>의 존재 증명, 하이브리드 장르의 오묘한 분위기와 협업이 두드러졌던 <저스트 리슨 Just Listen (피처링. 스컬)>의 또 다른 합집과도 같은 <윈터 플라워>는 ‘그럼에도 살아가겠다’는 의지적 선언이다.
<먹구름>은 <비가 내리는 날에는>과 마찬가지로 '비'를 차용해 그리움을 표현했다. '먹구름'은 여전히 그늘을 드리우고 있으며, 화자는 그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미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음을 암시하는 <비가 내리는 날에는>과는 시차가 존재한다. 다만 먹구름과 비의 순서는 절대적이지 않다. 두 곡의 감정선을 오락가락 할수도 있고, 사람에 따라 그 순서를 달리 맞이할 수도 있다. '마인드셋' 시리즈는 뚜렷한 정답을 지정해놓지 않았다.
'외로움'에 대한 반응도 분명한 대조를 이룬다. <론리 Lonely>는 타인의 언어를 지양하고 내면에 집중할 시간을 요구하지만, <다음에 봐>는 그 '타인'을 그리워한다.
<스무살 어느 날>은 꽤 의미심장하다. <어려운 일>에서 사랑의 어려움을 두려워하고 애태웠던 것과 달리, <스무살 어느 날>은 가장 열정적이던 스무살을 떠올린다.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는 현실 직시인 동시에, 그때의 열정을 그리워하며 회복을 소망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즉 <어려운 일>은 사랑의 어려움을 앓지만, <스무살 어느 날>에서는 외려 그 사랑을 향해 적극적으로 투신해버린다.
'후유증'을 다룬 <레이니 나잇 Rainy Night>과 <이륙 26>의 상반된 이미지는 이 연작의 방향성을 상징한다. <레이니 나잇>은 비 오는 밤이면 떠오르는 상대와 그 기억에 끝없이 매몰된다. 악기도 최소화되었고, 어떠한 주체적 방향성 없이 증상만 남아 있다. 반면 <26>은 전체 곡들 중 속도도 가장 빠르고, 악기의 음량도 가장 풍성하다. 청량하게 질주하며 상승의 이미지를 그리고 있으며, '이별'을 '행성으로부터의 탈출'로 설명하며 큰 그림을 그렸다. 비 내리는 밤에 침전하는 상태로 남은 <레이니 나잇>과 과감히 우주로 벗어나는 <26>의 스케일 · 방향성 대조는 이번 연작 시리즈의 백미인 동시에 윤하의 음악적 기량의 훌륭한 증명이다.
동일한 소재를 상반된 방향으로 풀어낸 것은 윤하가 굴곡을 겪으며 내린 나름의 결론이 아니었을까. 앞서 언급한대로 윤하가 <비밀번호 486>과 <혜성>으로 성공을 맛봤을 때가 한국 나이로 20세였고, 33세를 맞이한 2020년에 이르기까지 윤하는 누구 못지 않은 풍파를 겪었다. 그 끝에 윤하는 ‘대중이 원하는’ 모습을 찾아 미니 4집으로 돌아왔고, 다시 한 번 ‘팬들이 원하는’ 색채의 미니 5집을 내놓았다. 무엇도 뚜렷한 정답은 아니지만 동시에 어떤 것도 답이 될 수 있다는, 불안정해 보이고 뜬구름 잡는 듯한 이 명제가 사실은 가장 안정적인 삶이 받아들일 수 있는 태도임을, 이번 연작에서 윤하가 말하려던 것은 아닐까.
지난 시간들은 차곡차곡 쌓여 무게와 깊이를 획득했고, 이를 통해 윤하는 삶에서 마주하는 ‘중심잡기’의 순간들을 양가적으로 포착하며 삶의 본질을 확인했다. 음악적으로 가장 호평받은 정규 4집이 떠오른다는 평은 단순히 모던 록 성향을 띠기 때문만은 아니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증명하려던 시기는 지났지만, 자신의 지난 행보가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윤하는 이번 연작에서 강하게 증명했다.
2020.01.06.
01 Winter Flower (雪中梅) (피처링. RM of 방탄소년단) *추천
02 먹구름 *추천
03 다음에 봐
04 스무살 어느 날
05 26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