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음악이론 아는 척 하기 (4편)

스펙트럴 음악: 자연 질서로의 회귀

by 돈 없는 음대생

메시앙은 제한적 전위 모드배음적 울림통합하여 12음 기법인위적 구조조성자연적 울림 사이의 간극을 좁혔다. 이 유산은 이후 배음 스펙트럼을 음악 구조의 근본 모델로 삼아 새로운 문법을 확립한 스펙트럴 음악으로 이어졌다. 스펙트럴 음악은 조성이나 음렬과 같은 인위적 규칙 대신, 음향학적 자연 질서를 기반으로 현대 음악의 조직 원리를 제시했다.




현대 음악의 구조적 대립과 스펙트럴의 등장 배경


20세기 중반의 구조적 교착 상태와 한계


20세기 중반의 서양 아방가르드 음악은 두 가지 극단적 구조적 접근 사이에 놓여 있었다.


쇤베르크총렬주의인위적이고 이성적구조를 통해 조성적 배음 위계를 배제했다. 이 접근은 음악적 통일성을 확보했지만, 청감적으로 난해하고 자연스러운 울림을 상실했다. 구조가 지나치게 복잡해 청중이 인지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반면, 전통적 조성이나 구조적 통제에 대한 회의와 기존 질서의 해체를 배경으로 등장한 우연성 음악(존 케이지, John Cage)은 모든 구조적 통제포기하고 우연확률에 의존했다. 이는 작곡가의 의도를 배제했지만, 결과적으로 음악적 형식과 일관성을 상실하게 했다.


두 흐름 모두 소리 자체의 풍부함과 청감적 안정성을 희생했다. 음악 구조는 청중에게 이해되지 않거나, 아예 무의미한 우연으로 치부되었다.


스펙트럴 음악의 근원: '소리의 내부'로의 회귀


1970년대 초, 프랑스의 작곡가 제라르 그리제(Gérard Grisey)와 트리스탄 뮈라이(Tristan Murail)를 중심으로 스펙트럴 음악이 등장했다. 이들은 기존의 인위적 구조와 우연적 접근의 한계를 넘어, 소리의 내부 구조(배음 스펙트럼)를 음악의 근본 구조로 삼았다. 이를 통해 자연적 질서와 구조적 치밀함을 동시에 추구했다.


스펙트럴 음악은 작곡의 모델을 음정이나 음렬이 아니라, 음향학적 분석에서 찾았다. 메시앙의 공명 화성과 1960년대에 등장한 전자 음악의 음향 분석 기술이 직접적인 기반이 되었다. FFT(Fast Fourier Transformation) 등을 이용해 소리 속 배음 구조(스펙트럼)를 시각화하고, 이를 음악적 구조에 적용함으로써 작곡가들은 소리의 미시적 구조를 탐구하고 이를 작품에 직접 반영했다.


fourier_series-011.jpg 소리를 분석하는 FFT의 형상화 그림


스펙트럴의 정의: 배음 스펙트럼의 '확대 투영'


스펙트럴 음악에서는 음색과 화성을 분리하지 않고, 배음 구조를 그대로 화성 구조로 전환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단일 음을 들을 때는 기본음만 뚜렷하게 인지되지만, 실제로는 기본음과 함께 여러 배음이 동시에 발생한다. 이 배음들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음색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스펙트럴 작곡가는 FFT 등 전자 분석 장치를 사용해 각 배음주파수강도를 수치화하고, 이를 악기가 재현할 수 있는 형태로 변환한다.


fourier_flute_violin.png 플룻과 바이올린 음의 분석. 우리 귀에는 1번 기본음만 인지되지만, 실제로는 여러 배음들이 동시에 발생한다.
Timbre1.png 악기별로 다른 배음 구조


분석된 배음 구조를 그대로 연주할 때, 음색의 미시적 구조가 화성의 거시적 구조가 되며, 실제 연주에서는 배음 구조와 화성 구조가 동일하게 작동한다. 이렇게 배음 분석을 화성으로 구현함으로써, 스펙트럴 음악에서는 ‘음색 = 화성’이라는 원리가 성립한다.




스펙트럴 음악의 구조적 원리: 음향학적 모델링


스펙트럴 음악의 구조적 원리는 음향학적 모델링에 기반한다. 이는 20세기 전반의 작곡가들이 유지해 온 음악적 이성주의를 인위적 규칙이 아니라 자연과학적 현상으로 대체한 접근이다. 스펙트럴 작곡가들은 소리를 푸리에 분석(Fourier Analysis)을 통해 정현파(Sine Wave)들의 합으로 분해하고, 여기서 얻은 배음(Harmonics)의 주파수강도를 악보의 음정 배열과 셈여림으로 전환했다. 배음의 주파수음정(Pitch)과 화성 구조로, 배음의 강도악기 편성음량(Dynamics)으로, 위상(파동의 시작 지점)은 아티큘레이션(Articulation)과 음색 변화로 대응되었다.


licensed-image.jpeg FFT를 통해 정현파로 소리를 분해하는 이미지


화성 구조의 모델링: 부분음렬 (Partial Series)


스펙트럴 음악의 화성은 전통적 조성이나 12음 기법의 규칙으로 구성되지 않고, 특정 음향체가 가진 부분음렬(Partial Series)을 직접 모델로 삼아 구성된다. 협화적 스펙트럼(Harmonic Spectrum)을 사용하는 경우에는 현악기관악기처럼 정수배 관계를 갖는 배음을 기반으로 하므로, 화음은 공명감이 높고 자연스러운 협화성을 띤다. 이는 조성적 울림을 과학적 원리에 따라 복원한 결과다. 반대로 종이나 탐탐(Tam-Tam)처럼 비정수배 관계를 가진 불협화 스펙트럼을 사용할 경우, 화음은 불협화적이고 밀도가 높아지며 조성적 중심을 완전히 배제하게 된다. 그럼에도 부분음렬이라는 일관된 모델을 따르기 때문에 구조적 통일성은 유지된다.


inharmonics.jpg 기본음과 정수배 (검정), 비정수배 (회색) 관계의 배음들


그리제"Partiels"은 이러한 개념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트럼본의 낮은 E음을 푸리에 분석하여 얻은 배음 스펙트럼을 여러 악기에 분산시키고 확대하여 화성 구조로 전환했다. 이 작품의 화음은 트럼본 음색의 내부 구조를 해부해 악기군 전체로 재구성한 결과다. 이를 통해 그리제는 스펙트럴 음악의 핵심 방법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img-4.jpg 낮은 E음의 배음
img-5.jpg 그리제 - Partiels의 첫 페이지와 배음의 표기


그리제 - Partiels


드뷔시가 피아노로 종소리를 모방한 것처럼, 과학적 분석 장비가 없던 시대에도 작곡가들은 음색의 내부 구조를 직관적으로 모사하려 했다. 스펙트럴 음악은 이러한 시도를 과학적, 수학적 분석을 통해 체계화하고 발전시켰다.


드뷔시 - La Cathédrale engloutie



미분음의 구조적 활용


스펙트럴 음악은 평균율의 고정된 반음 체계에서 벗어나 마이크로인터벌(Micro-Intervals, 미분음)을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단순한 실험적 음향 효과가 아니라, 배음 스펙트럼의 실제 주파수를 악보에 정확히 반영하기 위해서였다. 12평균율은 배음의 주파수를 근사적으로만 표현하기 때문에, 고차 배음으로 갈수록 평균율 음정과 실제 배음의 주파수 사이에는 점점 큰 오차가 발생한다. 메시앙은 이러한 오차를 평균율 내에서 가장 가까운 음정으로 대체했지만, 스펙트럴 작곡가들은 분석된 주파수를 그대로 음악 구조에 사용하기 위해 미분음을 도입했다.


Serie-harmonique.jpg 보라색으로 표시된 미분음을 표기하는 임시표들 (13번은 -59c여야 한다)


스펙트럴 음악의 음정 체계는 무분별하게 기존의 반음 단위를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소리의 자연적 스펙트럼을 가능한 정확하게 재현하기 위한 방법이다. 예를 들어 7차 배음은 12평균율의 단7도보다 약 31센트 낮게 나타나며, 스펙트럴 작곡가들은 이 차이를 악보에 표기하여 연주하게 했다. 미분음은 이러한 실제 배음과의 일치를 위해 사용되며, 음악적 음색과 화성 구조를 더 정밀하게 구축하는 핵심 수단이 되었다.




스펙트럴 음악의 시간 조직: 변형과 시간의 해부


스펙트럴 음악은 음정 조직뿐 아니라 시간 조직 역시 소리의 물리적 성질에서 도출했다. 작곡가들은 특정 음향이 실제 공간에서 유지되고 사라지는 데 필요한 공명 시간(Resonance Time)을 형식적 모델로 삼아, 소리의 변화 과정을 음악적 시간의 흐름과 직접 연결했다. 스펙트럼의 구성 요소가 변화하는 방식이 곧 음악의 진행이 되는 구조다.


이 접근에서 중요한 개념이 변형(Morphing)이다. 스펙트럴 음악에서 형식은 하나의 스펙트럼이 다른 스펙트럼으로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으로 구성된다. 이는 주제-발전-재현 같은 전통적 형식 대신, 소리 내부의 연속적인 변화를 중심으로 음악을 조직하려는 방식이다. 그리제는 "Les espaces acoustiques" 연작에서 소리가 발생한 이후 어택–감쇠–지속–해제로 이어지는 물리적 경과를 작품 전체의 시간이자 구조로 확장했다. 어택에 해당하는 부분은 짧고 밀도 높은 음향으로, 지속 단계는 느린 스펙트럼 변형으로, 감쇠 단계는 음색의 점진적 소멸로 나타난다.


ADSR.png 어택, 감쇠, 지속, 해제를 표현한 ADSR 그래프
ADSR1.png 악기별 다른 ADSR 형태


그리제 - Les espaces acoustiques 연작


리듬 조직에서도 스펙트럴 음악은 기존 체계와 다른 접근을 취했다. 총렬주의가 리듬을 고정된 단위로 엄격히 분할하려 했다면, 스펙트럴 음악은 리듬스펙트럼의 변화 속도에서 파생되는 현상으로 보았다. 화음이 변화하는 속도, 특정 배음의 강도 변화, 스펙트럼의 밀도 변화 등이 리듬적 움직임을 결정하며, 이는 일정한 박자의 존재 여부와 무관하게 소리 자체가 시간을 형성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뮈라이는 이러한 관점을 지각된 시간(perceived time)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스펙트럼이 빠르게 변하면 시간이 압축된 것처럼 느껴지고, 변화가 느리면 시간이 늘어난 것처럼 지각된다. 따라서 스펙트럴 음악에서 시간은 객관적 단위가 아니라, 스펙트럼 변화의 속도에 따라 청자가 경험하는 심리적 시간으로 구성된다.


그리제 - Modulations

스펙트럼이 거의 변하지 않는 장면에서는 시간이 ‘멈춘 듯한’ 인상을 준다.


뮈라이 - Gondwana

이 작품은 금속 종소리 스펙트럼이 트럼본 스펙트럼으로 서서히 변형하는 과정을 묘사한다.

종소리의 불협화 스펙트럼은 빠른 미시적 움직임, 불규칙 리듬, 음형의 빈번한 변화를 유발한다.

금관의 안정된 스펙트럼으로 진행할 때는 리듬이 느려지고 긴 지속음, 넓은 음의 공간이 등장한다.




스펙트럴 음악의 철학적 의미: 자연 질서로의 회귀와 '듣는' 작곡


스펙트럴 음악은 20세기 음악에서 이성적 구조자연적 소리 현상 사이의 간극을 좁히며, 음악 구조에 대한 근본적 전환을 가져왔다.


인위적 규칙에서 자연적 필연성으로의 전환


조성 음악자연적 배음인위적으로 체계화하고 화성적 위계부여했다. 12음 기법은 반대로 자연적 배음무시하고 인위적 음렬 규칙으로 음악을 조직했다. 스펙트럴 음악배음의 내부 구조를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악곡 전체의 구조로 투영했다. 배음주파수(f, 2f, 3f, …)를 기반으로 화음을 설계하고, 시간적 변화를 악곡의 형식으로 구현했다.

스펙트럴 음악은 과학적 분석을 통해 자연적이고 물리적인 소리 현상을 구조적 기초로 삼았다. 이렇게 음악적 이성주의자연 과학과의 조화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았다.


'듣는 작곡'의 복원


총렬주의가 작곡을 논리적 계산 중심으로 만들었다면, 스펙트럴 음악은 청각 경험을 작곡 중심에 두었다. 스펙트럴 작곡가들은 총렬주의 음악처럼 아무리 정밀하게 계산된 구조라도, 실제로 들리는 소리가 구조의 의도를 반영하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분석된 소리를 실제로 들으며, 청각적 효과를 기반으로 악보를 수정했다. 또한 음색과 화성의 미묘한 변화에 집중하여, 조성적 중심 없이도 깊은 울림과 색채를 제공했다. 이런 접근 방식은 작곡과 청각적 지각을 직접 연결하여, 음악적 의미를 청중이 실제로 인지할 수 있도록 했다.


스펙트럴의 유산: '음향학적 사유(Acoustical Thinking)'의 확산


스펙트럴 음악의 원리는 1980년대 이후 현대 서구 작곡가들에게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쳤다.

포스트-스펙트럴: 스펙트럴 방식을 직접 사용하지 않더라도, 음색, 배음 구조, 시간의 유기적 변화를 중시하는 경향은 현대 음악의 기본 패러다임이 되었다.

전자 음악 및 라이브 일렉트로닉스: 스펙트럴 작곡가들은 음향 분석 기술에 기반했기 때문에 전자 음악과의 협업에 개방적이었다. 이로써 라이브 일렉트로닉스(Live Electronics)를 오케스트라 작품에 통합하는 현대 음악의 중요한 흐름이 형성되었다.


동양 음악의 유동적 시간과 스펙트럴의 접점


스펙트럴 음악과 일부 현대 전자 음악에서 나타나는 시간 개념의 변화동양 음악시간 감각과 유사성을 가진다. 기존 서양 음악에서는 시간과 리듬이 객관적 박자 단위에 의해 결정되었으나, 스펙트럴 음악에서는 소리의 변화 속도, 배음의 강도, 스펙트럼 밀도소리 자체의 특성이 리듬과 시간의 지각적 구조를 결정한다. 이러한 시간의 지각적 구성은 전통적 박자에 의존하지 않으며, 소리의 변화가 곧 시간 경험을 형성한다.


동양 음악에서도 유사한 시간 감각을 발견할 수 있다. 인도 음악의 라가에서는 선율과 장단이 유연하게 흐르며 즉흥적으로 변하고, 가멜란에서는 여러 악기가 상호 작용하며 유동적 시간을 만들어낸다. 한국 전통 음악에서는 장단과 리듬이 표현과 상황에 따라 탄력적으로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특징이 있다. 스펙트럴 음악에서 시간은 소리의 변화 속도로 구성된다는 점에서, 동양 음악적 시간 감각과 구조적, 지각적 유사성을 가진다.


인도 라가 음악

가멜란 음악


종묘제례악

윤이상 - 예악


이러한 변화는 역사적, 문화적 배경과도 관련이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서양 작곡가들은 기존의 조성적, 리듬적 체계가 한계를 가진다는 것을 인식하고, 비서양 음악자연 소리, 전자음악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탐색하였다. 그리제와 뮈라이의 작품에서는 소리의 물리적 변화를 음악 구조로 확대하며, 시간이 소리의 변화 속도로 결정되도록 구성하였다. 이는 가멜란이나 인도 음악에서 음악적 패턴이 흐름 속에서 ‘호흡’하는 방식과 유사하며, 박자 중심의 서양 전통 음악 관념을 넘어서는 새로운 시간 구조를 제시하였다.




현대 음악이론의 구조적 완성


현대 음악이론은 조성의 붕괴 이후, 12음 기법(인위적 구조)과 스펙트럴 음악(자연적 구조)이라는 두 흐름을 중심으로 구조적 사고를 완성했다.

쇤베르크는 이성적 규칙으로 자연적 화성 위계를 제거했지만, 그리제와 뮈라이는 과학적 분석을 통해 배음 구조를 연구하고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질서를 구축했다.


이 과정을 통해 현대 음악이론은 음악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를 구조적으로 조직하는 방법론을 확보했다.

이 최종적 구조적 사고는 이후 미니멀리즘, 뉴 컴플렉서티다양한 음악적 흐름결합하며, 현대 음악의 복잡하고 다층적인 구조를 발전시키는 기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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