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권력 - 기득권의 역사와 현재 (2편)

역사적 사례

by 돈 없는 음대생

륄리: 궁정 음악의 권력자


장-밥티스트 륄리(Jean-Baptiste Lully, 1632~1687)는 17세기 프랑스 바로크 음악계에서 권력과 기득권이 어떻게 형성되고 유지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단순한 작곡가를 넘어, 루이 14세 왕실의 후원을 받아 궁정 오페라와 발레에서 중심적 지위를 확보하고, 자신의 음악적 영향력을 강화함으로써, 왕실 중심 음악 체계에서 권력과 예술을 결합한 모델을 구축했다. 륄리는 당대 프랑스 궁정 음악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으며, 경쟁자와 후임에게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를 통해 그는 궁정 음악에서 전략적 위치를 확보했다.


륄리의 권력 장악 방식은 오늘날의 음악계 기득권 전략과 유사한 면이 있다. 그는 왕실 후원과 궁정의 공식 지위를 통해 재정적 안정과 공연 독점권을 확보했다. 1672년 'Académie Royale de Musique' 운영권을 부여받아, 주요 오페라와 음악극의 공연을 독점할 수 있었으며, 자신의 음악이 프랑스 궁정의 '표준'으로 자리 잡도록 했다. 왕실과의 긴밀한 결탁은 단순한 재정 지원을 넘어, 음악적 영향력을 구조적으로 강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는 후임과 경쟁자의 궁정 무대 진입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자신의 제자와 친분 있는 연주자에게 기회를 집중시키고, 궁정과 협력하지 않는 음악가에게는 활동 기회가 제한되기도 했다. 일부 경우에는 왕실 칙령을 활용해 경쟁자의 작품 공연을 조정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그는 궁정 음악 내 영향력과 후계 구조를 안정적으로 유지했다.


륄리는 음악적 독점뿐 아니라 사회적 관계망도 전략적으로 활용했다. 자신의 제자와 가까운 연주자에게 기회를 집중시키고, 궁정과 협력하지 않는 음악가에게는 제한적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권력과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재생산했다.


그의 방식은 단순히 작품을 만들고 연주하는 것을 넘어, 제도와 권력을 활용해 음악적 영향력을 강화하고 경쟁자의 활동을 조정함으로써, 예술적 영향력을 장기간 유지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오늘날 일부 기득권층이 자신의 파벌을 형성하고, 재정적 후원과 제도적 권한을 결합해 후대 신예와 경쟁자를 구조적으로 제한하는 전략과도 흡사하다.




바그너: 국가와 결합한 예술 권력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 1813~1883)는 예술과 국가 권력이 결탁했을 때 나타나는 기득권 구조의 완벽한 형태를 보여준다. 그는 단순한 작곡가가 아니라, 국가와 정치 권력의 후원을 받으며 자신의 음악적 영향력을 확대하고 이를 제도화했다. 바그너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Bayreuth Festival)이라는 독점적인 플랫폼을 통해 자신의 작품을 공연하고, 이를 제도적으로 정착시킴으로써 경쟁자가 활동할 수 있는 범위를 제한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이는 정치적, 사회적 후원과 결합된 예술적 영향력의 전형적 형태로 평가된다.


바그너의 권력 장악 전략은 륄리의 모델을 국가적 차원으로 확장한 것과 유사하다. 먼저, 그는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 2세의 개인적 후원을 받아 정치적 후원 기반을 확보했다. 왕실과의 긴밀한 관계는 그에게 재정적 안정뿐만 아니라, 작품과 음악적 영향력을 국가적, 사회적 맥락에서 제도화된 권위로 확립할 수 있는 힘을 제공했다. 그 결과, 바그너의 작품이 공연되는 과정과 평가가 그의 영향력과 연계되었으며, 작품 해석과 공연 기획에서도 그의 입장이 중심이 되는 구조가 형성되었다.


둘째, 바그너는 자신의 음악적 철학과 독일 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를 결합하여 권력 기반을 강화했다. 그의 작품은 단순한 예술 표현을 넘어 독일 민족주의와 연결되었고, 예술은 국가 권력과 결합하는 방식으로 기능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바그너의 미학은 ‘국가적 정통’으로 자리 잡으며, 작품 선택과 공연 기준에서 중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셋째, 바그너는 자신의 후임과 협력자 중심으로 공연과 제도 운영을 조직했다.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을 중심으로 친분 있는 제자와 연주자에게 공연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그의 음악적 영향력이 세대와 제도를 통해 지속될 수 있도록 했다. 바그너 체제에서 예술적 권력은 창작력과 더불어 정치적 후원과 제도적 운영을 통해 유지되었다.


결과적으로, 바그너의 경우는 현대 예술계의 기득권 구조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패턴을 보여준다. 국가와 예술 권력의 결합은 단순한 후원이 아니라, 제도적 독점과 중심적 영향력 유지를 포함한 권력 구조를 형성하며, 그 안에서 신진 음악가나 독립적 예술가의 활동은 제한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 과정에서 당대 비평가들과 맞물려, 바그너와 다른 음악적 경향은 ‘시대적 기준과 다른 작품’으로 평가되는 경우가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단순한 미학적 논쟁을 넘어, 특정 미학과 공연 기준이 중심으로 자리 잡는 구조로 이어졌으며, 그 영향은 오늘날까지도 바이로이트 중심주의와 BMW, 즉 브루크너(Bruckner), 말러(Mahler), 바그너(Wagner) 중심의 전통적 레퍼토리 구조로 남아 있다. 이는 어떤 음악이 ‘중요한 음악’으로 남아야 하는가를 결정해 온 권력의 선택이 아직도 유효하기 때문이다.




슈트라우스: 예술과 정치의 복합적 결합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 1864~1949)는 20세기 초중반 음악계에서 권력과 예술적 지위를 동시에 추구했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뛰어난 작곡가이자 지휘자로서 업적을 남겼지만, 동시에 정치적 권력과의 복잡한 결탁을 통해 자신의 기득권적 지위를 유지하고 강화했다. 특히 나치 독일 시기, 슈트라우스는 체제와의 협력을 통해 음악적 영향력을 확장했으며, 이는 예술가가 단순한 창작 활동을 넘어, 정치적 권력과 결합했을 때 발생하는 구조적 문제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슈트라우스의 권력 전략은 자신의 예술적 위상과 정치적 필요성을 결합하는 데 있었다. 그는 나치 정권의 공식적 지지를 받음으로써, 자신의 작품은 공식 공연과 음반 제작에서 우선권을 확보했고, 일부 경쟁 작곡가와 연주자는 활동 기회가 제한되기도 했다. 그는 음악적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권력과 결합한 네트워크를 활용했으며, 후임과 협력자의 활동을 중심적으로 조직했다. 이러한 방식은 륄리와 바그너의 방식과 유사하게, 예술계에서 권력이 반복적으로 구조화되고 재생산되는 방식을 보여준다.


슈트라우스 사례에서 주목할 점은 그의 개인적 복합성이다. 그는 나치 정권의 '제국 음악원장'이라는 직책을 수락하고 협력하는 동시에, 유대인 며느리와 손자들을 보호하고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노력을 병행했다. 이는 기득권층의 전형적 행동 패턴, 즉 권력과 이익을 유지하면서도 도덕적 책임을 고려하는 전략을 보여준다. 슈트라우스는 체제와 협력하며 영향력을 유지했지만, 동시에 개인적 양심과 최소한의 보호 의무를 실천하며 자신의 이미지를 관리했다. 이 지점에서 예술계에서 권력과 양심, 기득권과 도덕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가 드러난다.


그는 생애 대부분 동안 권력과 기득권의 중심에서 구조적 불평등을 유지했음에도, 전후에는 자신의 행보를 일부 회고하며 이미지 관리를 시도했다. 이는 영향력이 약화된 시점에서 반성과 성찰을 내세우는, 예술가의 생애 말기 자기 고백 패턴과 맞닿는다. 이 과정에서 구조적 책임은 개인적 선택과 고뇌로 축소되며, 기득권 체제 자체는 크게 문제 삼지 않은 채 역사 속으로 남았다.


'나치에 굴복한 것이 아니라, 시대 상황상 그렇지 않으면 생활이 불가능했다'라는 식의 변명은 오직 권력을 잡은 정권이 몰락하거나, 사후에만 가능한 말이다. 이는 생존을 이유로 권력에 협력했다는 자기합리화에 불과하다. 체제에 불응하거나 협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미 제거되고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현실을 몰라서 그러지 않았던 것일까. 더 나아가, 나치에 협력하고 싶었으나 그 권력의 주변부에조차 접근할 수 없었던 사람들 또한 분명히 존재했을 것이다. 이러한 사후적 정당화는 결국 권력에 복무했던 행위를 미화하고, 그 책임을 희석시키는 후대의 서사일 뿐이다.


결국 슈트라우스는 뛰어난 음악적 재능으로 분명한 역사적 업적을 남겼지만, 동시에 정치 권력과 결탁해 권력 구조를 활용한 인물이기도 하다. 슈트라우스를 통해 우리는 현대 예술계의 기득권 구조가 어떻게 형성되고 유지되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푸르트뱅글러: 권력과 회색지대의 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뱅글러(Wilhelm Furtwängler, 1886~1954)는 20세기 음악계에서 예술적 권위와 정치적 압력 사이의 회색지대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는 베를린 필하모닉을 이끌며 당대 최고의 지휘자로 평가받았지만, 동시에 나치 정권 하에서 자신의 위치를 유지해야 하는 복잡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푸르트뱅글러는 권력에 무조건적으로 굴복한 인물은 아니었으나, 동시에 완전한 저항자로 보기에도 어렵다. 그는 나치 정권의 공식적 요구와 감시 속에서도 가능한 한 자신의 음악적 기준을 유지하려 했고, 유대인 동료 예술가들에게 실질적인 지원을 제공한 사례도 존재한다. 그러나 정권의 요구를 전면적으로 거부할 경우, 자신이 이끄는 오케스트라와 연주자들에게 즉각적 피해가 발생할 수 있었기에, 그는 협력과 독립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이 딜레마는 특정 시대의 특수한 문제가 아니라, 권력과 기득권이 결합된 환경에서 예술가가 반복적으로 마주하는 구조적 문제다.


푸르트뱅글러의 선택은 단순히 개인의 도덕적 판단이 아니라, 예술과 권력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보여준다. 그는 나치 정권 하에서도 공연을 지속하며, 가능한 한 자신의 연주와 지휘 방식으로 예술적 독립성을 유지하려 했다. 이는 기득권층이 권력을 독점하는 방식과는 다른 형태로, 제도적 압력 속에서 형성된 예술적 실천의 회색지대를 보여준다.


이 회색지대는 완전히 중립적이진 않았다. 그는 나치 공식 행사와 선전 프로그램에서 지휘를 맡았고, 그 연주는 체제의 문화적 활동과 연결되기도 했다. 그러나 예술적 의도와 체제적 역할은 분리하기 어려우며, 회색지대는 결국 권력 구조 안에서 허용된 범위 내의 예술적 선택을 보여준다.


푸르트뱅글러는 자신의 영향력과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오케스트라 구성과 공연 기회를 전략적으로 관리했다. 이는 륄리, 바그너, 슈트라우스가 보여준 기득권 유지 방식과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다만 그는 이를 노골적 권력 장악이 아니라, 도덕적 이미지와 예술적 권위를 병행 관리하는 방식으로 수행했다. 신예 연주자에게 제한적 기회를 제공하면서도, 최종 결정권은 자신의 손에 남겨두는 방식은 오늘날 지휘자와 교수 중심의 기득권 구조와도 닮아 있다.


특히, 자신의 지위를 위협할 수 있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과의 관계에서 이러한 전략이 드러난다. 푸르트뱅글러는 예술적 경쟁 속에서도 인맥과 영향력을 활용해 카라얀이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는 상황을 조정했다. 그는 단순히 체제의 희생자라기보다, 권력 구도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인식하고 이를 유지하는 전략을 선택했다.




제도화된 예술 권력: 아카데미와 다비드 사례


예술계에서 권력과 기득권이 개인적 영향력을 넘어 제도화되는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7~18세기 유럽의 아카데미(Académie)와 에콜 데 보자르(École des Beaux-Arts), 그리고 이를 대표하는 인물 자크-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들은 단순한 예술가나 교육자가 아니라, 예술적 권위를 제도와 시스템 속에 정착시키는 데 성공한 권력 집단이었다. 이 단계에서 예술 권력은 더 이상 개인의 카리스마에 의존하지 않고, 세대를 넘어 지속되는 구조로 전환되었다. 이는 륄리나 바그너의 개인 독점 모델보다 발전한 형태였다.


아카데미는 예술 교육, 심사, 후원과 연계된 조직적 시스템을 갖추어, 작품의 기준과 양식을 규정하며 특정 예술적 관행을 ‘정통’으로 공고히 했다. 학생과 신진 예술가는 아카데미의 교육과 심사 과정을 거쳐야만 인정을 받을 수 있었으며, 이는 권력과 권위의 세대 간 전승 구조를 형성했다. 에콜 데 보자르 또한 루브르 박물관을 중심으로 학문적, 예술적 권위를 제도화하여 예술가와 후진을 체계적으로 관리했다. 그 결과, 다양성과 혁신은 구조적으로 제한되고, 아카데미가 정한 특정 양식과 기준이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다비드는 이러한 제도적 권력의 대표적 상징이었다. 그는 프랑스 혁명기에는 혁명의 화가로, 이후에는 나폴레옹 체제의 공식 예술가로 자리 잡으며, 권력이 바뀔 때마다 유리한 위치를 확보했다. 다비드는 국가 권력과 결합한 예술적 권위를 바탕으로, 작품 활동을 넘어 교육자, 심사위원, 제도 운영자로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의 제자들은 제도를 통해 등용되었고, 그의 미학은 ‘공식 미학’으로 자리 잡았다. 이는 개인의 재능을 넘어, 예술 권력이 제도 속에서 영속화되는 구조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권위는 정치 권력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나폴레옹 체제에 복무하던 그는, 체제가 몰락하자 벨기에로 망명하여 여생을 보냈다. 혁명과 제국의 미학을 설계한 인물이, 권력 구조 변화 이후 책임을 지지 않은 채 사라졌다는 점은, 제도화된 예술 권력이 권력과 상황에 따라 운영되는 방식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구조적 문제는 명확하다. 제도화된 예술 권력은 다양성과 혁신을 제한하며, 권력 구조에 순응하지 않는 신진 예술가는 구조적 장벽에 의해 배제된다. 예술적 기준과 권위는 공정한 평가나 창의성보다 기득권 유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시대를 바꾼 혁신적 예술가 상당수는 이러한 제도적 네트워크 밖에서 활동했다. 학교를 나오지 않았거나, 특정 학파에 속하지 않았고, 제도적 언어에 능숙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카데미 안에서 ‘미래’로 평가받기보다 부적응자나 문제아로 낙인찍히는 경우가 많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영향력을 갖게 되면, 뒤늦게 제도가 그들을 흡수하고 신화를 만들며, 새로운 추종자 집단이 형성된다. 그리고 그 집단은 이전과 유사한 기득권 구조를 재현한다.


결국 문제는 예술 권력이 제도화되는 방식 자체다. 개인이 사라져도 권력은 남고, 혁신은 소비된 뒤 다시 제한된다. 이것이 아카데미 이후 예술계에서 반복된 구조이며, 오늘날 예술 대학, 콩쿠르, 오디션 시스템에서도 거의 변형 없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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