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협업의 역사 아는 척 하기 (5편)

퍼레이드: 타자기가 오케스트라를 습격한 날

by 돈 없는 음대생

마르셀 뒤샹 - 샘, 1917

1917년의 소음: 일상이 음악이 되다


1917년 5월 18일, 전쟁의 포화가 여전하던 파리 샤틀레 극장에서 서구 예술의 엄숙주의를 뿌리째 흔드는 사건이 발생했다. 발레 뤼스가 무대에 올린 《퍼레이드》(Parade)는 시작부터 관객들을 당혹케 했다. 고결한 현악기와 관악기의 선율 사이로 난데없이 타자기 두드리는 소리, 사이렌 소리, 복권 회전판이 돌아가는 소리, 그리고 실제 권총 소리가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작곡가 에릭 사티(Erik Satie)는 이 작품을 통해 음악의 성역을 파괴하고자 했다. 그는 음악이 심오한 감정을 전달하거나 숭고한 정신을 고양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믿었다. 그에게 소리란 그저 공간을 채우는 '가구'와 같은 것이었다. 사티는 거리의 소음과 기계적 소리들을 음악적 재료로 당당히 편입시켰다.


일상적인 소음의 사용은 발레가 기획되었던 이탈리아에서 영감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프란체스코 발릴라 프라텔라(Francesco Balilla Pratella)의 1911년 선언문 『Musica futuristica 』에 따라 이탈리아 미래주의 음악가들은 기존의 악기를 거부하고 대신 소음으로 작품을 작곡하여 '음향시의 위대한 내면적 모티프에 기계의 영역과 전기의 승리적 지배를 더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관객들은 이러한 소음의 사용에 대해 부정적으로 반응했다. 게다가 콕토, 사티, 그리고 카르네 드 라 세멘(Carnet de la Semaine) 의 음악 평론가이자 《퍼레이드》에 대해 부정적인 평론을 쓴 장 푸에이(Jean Poueigh)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푸에이는 사티의 음악을 비난했고, 이에 분노한 사티가 그에게 모욕적인 엽서를 보냈다가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해 8일간의 징역형을 선고받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 스캔들은 예술적 논쟁이 공적 법적 문제로 번진 이례적인 장면으로 기록된다.


3미터 마천루: 피카소가 가둔 무용수


사티의 소음 실험만큼이나 관객을 경악시킨 것은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가 설계한 무대 의상과 장치였다. 그는 무용수를 생명체가 아닌 ‘움직이는 입체파 조각’으로 변형시켰다.

theatre-curtain-for-parade.jpg 파블로 피카소 - 퍼레이드 무대 커튼, 1931, 출처: pablopicasso.org

특히 '미국인 매니저'와 '프랑스인 매니저' 캐릭터가 입은 의상은 높이가 3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구조물이었다. 피카소는 골판지와 나무틀을 활용해 마천루와 도시 건물의 형태를 형상화했고, 무용수들은 전통적 발레에서 요구되던 신체의 자유를 거의 상실한 채 이 구조물 안에서 움직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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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stumes_du_ballet_Parade_(Les_Ballets_russes,_Opéra)_(4556095224).jpg 중국인 마술사와 말 (복제품)

이러한 움직임의 제한은 작품의 시각적 실험성을 강조하며, 무대 위에서 시청각이 결합된 새로운 경험을 만들어냈다. 이 시각적 요소와 에릭 사티가 도입한 비전통적 소리 요소가 합쳐지며, 《퍼레이드》는 당시 관객들에게 충격적인 공연으로 다가갔다.


콕토: 진짜 쇼는 무대 밖에 있다


이 파격적인 소동의 브레인은 역시 장 콕토(Jean Cocteau)였다. 그는 이 발레를 '현대성의 서커스'로 규정했다. 《퍼레이드》의 줄거리는 매우 단순하다. 유랑 극단의 매니저들이 길거리에서 구경꾼들을 불러모으기 위해 짧은 맛보기 공연(Parade)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하지만 콕토의 진정한 의도는 무대 위 공연보다 '무대 밖의 소음'이 더 진실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있었다.


콕토는 등장인물 설정에 당시 유행하던 문화적 이미지를 적극 활용했다. 중국인 마술사는 실제 유럽에서 공연하던 마술사 청링수(Chung Ling Soo)를 참고했으며, 미국 소녀 캐릭터는 당시 무성영화 스타 펄 화이트(Pearl White)와 메리 픽포드(Mary Pickford)에서 영감을 얻었다. 특히 미국인 어린 소녀 장면에서는 찰리 채플린의 희극적 동작과 무성영화 특유의 과장된 속도감을 차용하여 무대 위 표현에 현대적 리듬을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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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ng Ling Soo, Pearl White, Mary Pickford

콕토는 발레가 전통적으로 갖는 고결하고 우아한 이미지를 해체하고, 서커스와 뮤직홀, 영화관에서 느낄 수 있는 활기와 소음을 무대에 도입하여 고전 예술의 권위를 비웃었다.


사티의 가구 음악: 미니멀리즘의 탄생


사티가 《퍼레이드》에서 보여준 음악적 태도는 훗날 '가구 음악'(Musique d'ameublement)이라는 개념으로 정립된다. 그는 음악이 청중의 영혼을 압도하려는 '권위주의적 음악'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사티 - 가구 음악


《퍼레이드》의 음악 구조는 지독할 정도로 단순하다. 짧은 모티브가 기계적으로 반복되며, 화성은 전개되지 않고 제자리에 머문다. 사티는 오케스트라의 화려한 음색을 지우고, 타자기나 사이렌 같은 '비음악적 소리'에 음악적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음악의 정의를 새로 썼다.


사티 - 퍼레이드 (발레 버전)


사티 - 퍼레이드 (음원)

타자기는 규칙적인 박자를 강조하고, 사이렌은 높은 음역을 담당하도록 배치되는 등, 악보에 따라 소리의 역할이 지정되었다. 이러한 실험은 당시 관객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으며, 후대의 실험 음악과 개념적 예술에 영향을 주었다.


피카소: 입체주의의 공간적 완성


피카소에게 《퍼레이드》는 자신의 입체주의 이론을 3차원 공간에서 실험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였다. 그는 무대 배경막에 거대한 광대들과 유랑 극단의 모습을 그렸는데, 이는 그가 이전에 탐구했던 '장밋빛 시대'의 서커스 모티브를 입체주의적으로 재해석한 것이었다.

피카소의 '장밋빛 시대'(Rose Period, 1904~1906): 이전의 청색 시대의 우울함에서 벗어나 붉은색과 분홍색, 주황색 등의 따뜻한 색조를 사용하기 시작한 시기. 대표 주제는 서커스.
Pablo_Picasso,_1905,_Acrobate_et_jeune_Arlequin_(Acrobat_and_Young_Harlequin),_oil_on_canvas,_191.1_x_108.6_cm,_The_Barnes_Foundation,_Philadelphia.jpg 피카소의 장밋빛 시대 작품에 속하는 작품. 파블로 피카소 - Acrobate and Young Harlequin, 1905

하지만 진짜 혁신은 무대 위 공간의 구성에서 나타났다. 피카소는 3미터 높이의 매니저 의상을 통해 무대의 공간을 장악했다. 관객의 시선은 무용수의 움직임뿐 아니라 의상이 만들어내는 형태와 구조에도 주목하게 되었다. 또한 무대 장치 중 '말'(Horse)의 의상은 두 무용수가 한 몸이 되어 함께 움직이도록 설계되어 입체적 구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 장치는 최종 리허설에서 손상되어 실제 공연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다.

Parade4.bmp 1917년의 '말'. 출처: russianballethistory.com

다다이즘: 전쟁이 남긴 예술의 반란


《퍼레이드》가 발표된 1917년은 제1차 세계대전이 유럽 전역을 휩쓸고 있던 시기였다. 전쟁의 참상은 기존의 가치 체계에 깊은 균열을 남겼고, 이는 미술, 문학, 음악 전반에서 형식과 규범을 의심하고 해체하려는 움직임으로 이어졌다. 예술은 더 이상 질서와 조화를 재현하는 영역으로 남아 있을 수 없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유럽의 전위 예술은 전쟁의 비합리성과 기존 질서에 대한 거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1916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등장한 다다이즘(Dadaism)은 전통적 예술 개념과 논리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며, 반전쟁적, 반권위적 성향을 전면에 내세웠다. 다다 예술가들은 의미와 형식의 안정성을 거부하고, 우연과 파편화된 표현을 통해 전쟁 이후의 인간 조건을 드러내고자 했다.

960px-Duchamp_Fountaine.jpg 마르셀 뒤샹 - 샘, 1917

《퍼레이드》는 다다이즘에 속하는 작품은 아니었지만, 고전 발레와 음악의 관습을 해체하려는 실험적 성격을 분명히 공유했다. 사티가 일상적 소음을 음악 안으로 끌어들인 점, 피카소가 입체주의적 형태를 무대 위에 올린 점은 모두 동시대 전위 예술이 추구하던 방향과 맞닿아 있었다. 이 작품은 발레를 하나의 완결된 예술 형식이 아니라, 충돌과 불협이 드러나는 열린 공간으로 바꾸어 놓았다.


사티는 이후 다다 예술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점점 가까워졌고, 1920년대 초 파리 다다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퍼레이드》는 사티가 다다로 이동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 중 하나로, 그의 미학이 보다 급진적인 방향으로 기울어지는 전환점이었다.


기획, 미술, 음악의 삼위일체


《퍼레이드》의 성공(혹은 스캔들)은 콕토, 피카소, 사티라는 세 명의 예술가가 맺은 완벽한 인과관계 덕분이었다. 콕토는 무대와 극의 구성, 등장인물과 소품을 통해 관객의 기대를 뒤집는 기획을 제시했다. 피카소는 시각적 구조물을 무대 위에 배치해 무용수의 움직임과 공간을 재구성했고, 사티는 타자기, 사이렌 등 비전통적 소리를 음악에 도입하여 청각적 긴장감을 높였다. 서로 다른 매체와 접근 방식이 충돌하고 조화를 이루면서, 관객들은 시각과 청각이 결합된 새로운 형태의 현대적 경험을 체험할 수 있었다.


예술의 권위를 죽이고 탄생한 현대 미학


제1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 관객들은 프랑스적이지 않은 것과 독일과 관련된 것에 민감했다. 입체주의 작품이 독일과 연결되고, 일부 파리 갤러리가 독일 소유였으며, 몽마르트와 몽파르나스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전통적 프랑스 관념과 충돌하면서, 관객들은 《퍼레이드》를 적국과 연관된 문화적 위협으로 받아들였다. 이 때문에 작품은 '독일놈들의 예술'이라는 비난과 격렬한 야유를 불러일으켰다.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는 1917년 초연 프로그램 북에서 《퍼레이드》를 'Parade et l’Esprit Nouveau'라는 제목으로 소개하며, 이를 '초현실주의적 성격'(sur-réalisme)이라고 평가했다. 이후 1924년, 앙드레 브레통(André Breton)은 아폴리네르를 기리는 글 『Hommage à Guillaume Apollinaire』에서 이 단어를 차용하여 첫 번째 초현실주의 선언문을 발표했고, 현대 예술의 중요한 사조로 정식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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