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협업의 역사 아는 척 하기 (9편)

불의 전차: 시가 찬가로, 다시 전자음악으로

by 돈 없는 음대생

《경이로운 섬》: 대니 보일의 영국적 유머


2012년 7월 27일 저녁 9시, 런던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개막식이 시작되었다. 예술 감독을 맡은 인물은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대니 보일(Danny Boyle)이었다. 그는 개막식 전체를 《경이로운 섬》(Isles of Wonder)라는 제목 아래 구성했는데, 이는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의 《템페스트》(The Tempest)에 등장하는 캘리번의 대사, '두려워 말라, 이 섬은 소음으로 가득하다'(Be not afeard; the isle is full of noises)에서 가져온 표현이었다.


보일이 가장 집요하게 붙들고 있었던 질문은 단순했다. '무엇이 영국적인가?'

베이징 올림픽이 압도적인 규모와 정밀한 동시성으로 국가 이미지를 구축했다면, 보일은 전혀 다른 방향을 택했다. 그는 영국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관통하는 특유의 유머 감각을 전면에 내세우고자 했다.


개막식은 전원 풍경에서 시작해 산업혁명, 국가보건서비스(NHS) 창립, 디지털 혁명으로 이어지는 영국의 역사를 서사적으로 그려냈다. 케네스 브래너(Kenneth Branagh)가 산업혁명 시대의 엔지니어 이삼바드 킹덤 브루넬(Isambard Kingdom Brunel) 역을 맡아 셰익스피어의 대사를 낭독했고,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제임스 본드(다니엘 크레이그, Daniel Craig)와 함께 헬리콥터를 타고 등장하는 필름이 상영되는 등 영국 문화의 상징들이 무대를 채웠다.


음악은 전자음악 듀오 언더월드(Underworld)가 제작한 《칼리반의 꿈》(Caliban's Dream)을 중심으로 70년대부터 현대까지 영국 대중음악사를 관통하는 곡들이 사용되었다.


2012 런던 올림픽 개막식


블레이크의 시: 영국 정체성의 근원


개막식에서 정서적 중심을 이룬 텍스트는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의 시 《And did those feet in ancient time》이었다. 이 시는 블레이크가 1804년경 자신의 서사시 《밀턴: 두 권의 시집에서 시》(Milton: A Poem in Two Books)의 서문으로, 이후 영국에서 국가적 상징성을 지닌 노래 《예루살렘》(Jerusalem)의 가사가 된다.

And did those feet in ancient time 전문

And did those feet in ancient time
Walk upon England’s mountains green?
And was the holy Lamb of God
On England’s pleasant pastures seen?

And did the Countenance Divine
Shine forth upon our clouded hills?
And was Jerusalem builded here
Among these dark Satanic Mills?

Bring me my Bow of burning gold:
Bring me my Arrows of desire:
Bring me my Spear: O clouds unfold:
Bring me my Chariot of fire.

I will not cease from Mental Fight,
Nor shall my Sword sleep in my hand:
Till we have built Jerusalem,
In England’s green & pleasant Land.
Milton_preface.jpg 블레이크가 직접 그린 채색 삽화


블레이크의 시는 영국의 기원과 현재를 동시에 불러낸다. 첫 연에서 그는 예수가 과연 '잉글랜드의 초록 산들'을 밟은 적이 있는지, 신의 어린 양이 '즐거운 초원'에 나타난 적이 있는지를 묻는다. 이는 아리마대 요셉이 어린 예수를 데리고 글래스턴베리를 방문했다는 전설을 암시하며, 영국을 신성한 잠재력을 지닌 땅으로 상상하게 만든다.


이어지는 연에서 분위기는 급격히 전환된다. '저 어두운 사탄의 공장들 사이에 예루살렘이 세워졌는가?'라는 질문은 산업화된 현실 속에서 그 신성함이 훼손되었는지를 되묻는다. ‘어두운 사탄의 공장들’은 산업혁명기의 공장으로 읽혀 왔으며, 인간의 삶과 상상력이 자본과 제도에 의해 억압되는 상황을 비판하는 표현이다. 블레이크에게 문제는 특정 대상이 아니라, 정신을 가두는 모든 형태의 권력이었다.


시의 후반부에서 그는 질문을 멈추고 요청으로 나아간다. '불타는 황금 활을 가져다오, 욕망의 화살을 가져다오.' 여기서 등장하는 '불의 전차'(Chariot of fire)는 구약성경 열왕기하에 등장하는 이미지로, 초월적 힘과 정신적 상승을 상징한다. 이 구절은 훗날 1981년 영화 《불의 전차》(Chariots of Fire)의 제목으로 이어지며 영국 문화의 중요한 상징이 된다.

두 사람이 길을 가며 말하더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더라

열왕기하 2:11 (개역개정판)


마지막 연에서 블레이크는 '잉글랜드의 초록하고 즐거운 땅 위에 예루살렘이 세워질 때까지' 싸움을 멈추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이는 폭력적 혁명을 촉구하기보다는, 영국이 어떤 방향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를 묻는 윤리적 요구에 가깝다.


대니 보일이 이 시를 개막식의 핵심 텍스트로 선택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블레이크의 언어는 영국을 찬미하는 동시에 의심하고, 전통을 호출하면서도 현재를 비판한다.


《예루살렘》: 패리의 찬가


블레이크의 시는 1세기 이상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1916년, 제1차 세계대전 중 영국의 계관시인 로버트 브리지스(Robert Bridges)가 휴버트 패리(Hubert Parry)에게 이 시에 곡을 붙여달라고 요청했다. 전쟁으로 떨어진 국민의 사기를 끌어올리기 위한 목적이었다. 브리지스는 이 가사를 '국가가 요구하는 희생을 기꺼이 감내하도록 정신을 북돋울 수 있는 글'로 보았다.


패리는 블레이크의 시에 청중이 쉽게 받아들이고 함께 부를 수 있는 단순한 선율을 붙였다. 이후 에드워드 엘가(Edward Elgar)가 관현악 편곡을 더하며 곡은 널리 퍼졌다.


오늘날 《예루살렘》은 영국을 대표하는 애국적 노래로 자리 잡았다. 프롬스(Proms) 마지막 밤의 단골 곡이며, 영국 여성 협회와 노동당, 잉글랜드 럭비 팬들 등 서로 다른 집단이 이 노래를 자신들의 상징으로 사용해왔다. 크리켓과 럭비 리그 결승전에서도 불리고, 2011년 윌리엄 왕자와 케이트 미들턴의 결혼식에서는 찬송가로 연주되었다.


패리/엘가 - 예루살렘 (2018년 Proms)


패리 - 예루살렘 (2011년 왕실 결혼식)


《불의 전차》: 영국 영웅과 그리스 작곡가


1981년 영화 《불의 전차》(Chariots of Fire)는 1924년 파리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두 영국 육상 선수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독실한 기독교인 에릭 리델(Eric Liddell)은 신의 영광을 위해 달렸고, 유대인 해럴드 에이브러햄스(Harold Abrahams)는 반유대주의와 계급 편견을 넘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달렸다.

리델은 100미터 예선이 일요일에 열린다는 사실을 알고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출전을 거부했다. 그는 대신 200미터와 400미터에 집중해 훈련했고, 200미터에서 동메달, 400미터에서 금메달을 따며 세계 기록을 세웠다. 에이브러햄스는 케임브리지 대학 재학 중 전문 코치를 고용해 훈련했고, 1924년 파리에서 100미터 금메달을 획득했다.

영화의 제목 《불의 전차》는 블레이크의 시에서 가져온 것이다. 영화는 승리와 신념, 인간 정신의 고결함을 그린 작품으로, 영국의 국가적 자부심을 상징하는 서사로 받아들여졌다. 아카데미 작품상을 포함해 주요 부문에서 수상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런데 이 영국적 이야기의 음악을 만든 것은 그리스 출신 전자음악 작곡가 반젤리스(Vangelis, 본명 Evangelos Odysseas Papathanassiou)였다. 정규 음악 교육을 거의 받지 않은 그는 록과 전자음악을 넘나드는 경력을 쌓았고, 1970년대 런던에 정착해 독자적인 음악 세계를 구축했다.

영화 감독 휴 허드슨(Hugh Hudson)은 반젤리스의 앨범 《Opera Sauvage》와 《China》에 감명받아 그를 음악 감독으로 선택했다. 반젤리스는 시대극에 전통적인 관현악 대신 전자음악을 사용했다. 그는 과거를 재현하는 음악이 아니라, 영화의 시간과 감정에 공명하는 소리를 원했다고 설명했다.

나는 시대극 음악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영화의 시대와 어긋나지 않으면서도 동시대적으로 들리는 음악을 쓰고자 했다. 그렇다고 전자음만으로 채운 소리를 택하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다.

(I didn't want to do period music. I tried to compose a score which was contemporary and still compatible with the time of the film. But I also didn't want to go for a completely electronic sound.)

반젤리스 - 『American Film』 매거진 인터뷰, 1982년 9월 (Vangelis - American Film, September 1982)


해변을 달리는 슬로우 모션 장면을 위해 새로 만든 곡이 바로 타이틀 트랙 〈타이틀즈〉(Titles)였고, 이 선율은 영화의 상징이 되었다.


반젤리스 - 불의 전차 - 타이틀즈


이 음악은 예상 밖의 성공을 거두었다. 반젤리스는 아카데미 음악상을 받았고, 오프닝 테마는 1982년 빌보드 싱글 차트 1위에 올랐다. 이후 수십 년간 이 자리를 차지한 Instrumental 곡은 극히 드물었다.


흥미롭게도 사운드트랙에는 패리의 《예루살렘》 합창 편곡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이 곡은 영화 속 에이브러햄스의 장례식 장면에 사용되며, 영화의 시작과 끝을 감싸는 역할을 한다. 블레이크의 시에서 출발한 언어는 패리의 찬가를 거쳐, 반젤리스의 전자음악과 함께 다시 울려 퍼졌다.


반젤리스 - 불의 전차 - 예루살렘


즉, 《불의 전차》는 영국의 시와 찬가, 그리고 그리스 작곡가의 현대적 소리가 하나의 이야기로 엮인 결과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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