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협업의 역사 아는 척 하기 (8편)

공간으로 지은 소리: 수학이 건축이 된 순간

by 돈 없는 음대생

크세나키스: 수학적 공학으로 재구성한 소리


1950년대 초, 전후 파리는 재건과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는 시기였다. 현대 건축의 거장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사무소에는 수학과 음악을 동시에 탐구한 이아니스 크세나키스(Iannis Xenakis)가 근무하고 있었다. 낮에는 콘크리트 하중과 건축 구조를 계산하고, 밤에는 동일한 수학적 모델과 확률적 원리를 음악 구성에 적용했다. 그는 감정 중심의 작곡을 거부하고, 통계와 물리학 법칙을 기반으로 소리의 구조를 재구성했다.


크세나키스에게 음악과 건축은 분리된 장르가 아니었다. 그는 소리가 공간 속에서 어떻게 배치되는지가 음악의 본질이며, 건물의 구조가 어떻게 시각적 리듬을 만드는지가 건축의 본질이라고 보았다. 베르누이의 확률 법칙, 가우스 분포 같은 통계학적 모델과 물리적 원리를 작곡에 도입하여, 개별적이고 무작위적인 요소들이 모여 하나의 유기적 음향 질감을 형성하는 현상을 연구했다.


이러한 접근은 그의 스토카스틱(Stochastic, 확률론적) 음악의 시초가 되었으며, 동시에 르 코르뷔지에의 설계 도면에도 반영되었다. 음의 밀도, 리듬적 변화, 높낮이의 패턴은 건물의 구조와 조화를 이루며, 공간과 소리, 시각과 청각이 통합되는 새로운 예술적 경험을 가능하게 했다.


《메타스타시스》: 악보가 건축 도면이 되다


크세나키스의 초기 걸작 《메타스타시스》(Metastaseis)(1953-54)는 음악과 건축의 관계를 명확히 보여준다. 이 곡에서 그는 현악기들이 서로 다른 음높이로 미끄러지는 글리산도(Glissando) 기법을 사용했다. 수십 대의 현악기가 각기 다른 기울기로 상승하거나 하강하며 만드는 이 음향적 덩어리는 악보 위에서 쌍곡 포물면(Hyperbolic Paraboloid)의 형태를 띠었다.

HyperbolicParaboloid.svg.png 쌍곡 포물면
annis-Xenakis-study-for-metastaseis-1953-pencil-o-on-paper-241x317-cm-C-Copyright.png 메타스타시스에서 나타나는 현악기 글리산도 스케치. 크세나키스 - Study for metastaseis, 1953. 출처: iannis-xanakis.org

크세나키스 - 메타스타시스 (그래픽 스코어)


이 악보상의 선들은 단순히 소리의 높낮이를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지탱하는 구조적 하중의 흐름과 일치했다. 이는 건축적 구조 설계와 연결될 수 있는 수학적 근거를 제공했다. 크세나키스는 이 악보를 르 코르뷔지에와 협업 중이던 프랑스의 라 투레트 수도원(Sainte Marie de La Tourette)의 창문 배치 설계에 참조했다.

960px-La_tourette-_arq._Le_Corbusier.jpg 라 투레트 수도원 (남남동쪽 방향)
Kloster_la_Tourette_von_Westen._1997.jpg 라 투레트 수도원 (서쪽 방향)

'음악적 파형에 따른 유리창의 간격'(Pan de verre ondulatoire)이라 불리는 창문 배열은 빛이 실내로 들어오는 패턴을 분절하며, 음악적 파형에서 얻은 음향 밀도(density variation) 개념을 시각적 형태로 전환했다. 짧은 창과 긴 창의 반복적 배열은 내부 공간에서 빛의 강약과 리듬적 변화를 만들어내, 건물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음악적 구조와 유사한 체험을 제공했다.

Couvent-de-la-tourette-façade-ouest-©-Famille-I-Xenakis-1024x714.jpeg 음악적 파형에 따른 유리창의 간격. 출처: iannix-xenakis.org

이 설계는 크세나키스가 《메타스타시스》에서 탐구한 음향의 밀도와 배치 원리를 건축으로 확장한 결과물이다. 악보상의 곡선이 건축적 형태와 맞물리며, 음악과 건축이 동일한 수학적, 공간적 질서 안에서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드러낸다.


필립스 파빌리온: 르 코르뷔지에와의 공간 설계


1958년 브뤼셀 세계 박람회에서 공개된 필립스 파빌리온(Philips Pavilion)은 건축과 음악, 기술이 결합한 몰입형 공간으로 평가받는다. 르 코르뷔지에는 이 건물을 '전자 시'(Poème électronique)라고 명명하며, 실질적인 구조 설계를 크세나키스에게 맡겼다. 크세나키스는 이전 음악에서 실험했던 쌍곡 포물면(Hyperbolic Paraboloid) 구조를 실제 건축물로 옮겨, 내부 공간 전체를 음향적, 시각적 경험으로 설계했다.

realisations-pavillon-philips-exposition-internationale-de-1958-bruxelles-belgique-1958-7.jpg 필립스 파빌리온. 출처: fondationlecorbusier.f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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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빌리온은 평평한 벽면이나 직각 모서리가 없는, 유기적 곡면으로 이루어진 울림통이었다. 관객이 내부로 들어서면, 곡면 벽이 소리와 빛을 반사하며 공간 자체가 하나의 경험 캔버스로 작용했다. 이 공간을 채운 것은 약 350개(기록에 따라 약 300-450개로 상이)의 스피커였다. 천장과 벽, 관객의 상하부를 따라 배치된 이 스피커들은 소리가 머리 위와 발밑을 가로지르게 했다. 관객은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몸 전체로 공간의 곡률을 체감했다.


여기에 빛과 흑백 이미지가 곡면에 투사되었다. 시각적 요소와 음향이 결합하며 몰입감은 극대화되었다. 관객은 단순히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니라, 건물 안에서 소리와 빛,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전체 환경 속을 이동하며 감각적 경험을 체험했다.

realisations-pavillon-philips-exposition-internationale-de-1958-bruxelles-belgique-1958-9.jpg 파빌리온 내부의 이미지 투사 장면벽에 붙어있는 정사각형 형태들이 스피커다. 출처: fondationlecorbusier.fr

르 코르뷔지에가 공간의 형태를 정의하고, 크세나키스는 그 안에 생명을 불어넣는 음악을 설계했다. 이 협업은 건축과 음악, 기술이 결합한 전례 없는 시도로, 현대 미디어 아트의 원형을 제시했다. 한편, 작품과 공간을 둘러싼 저작권 논쟁은 두 사람의 협업 관계에 균열을 남겼다. 르 코르뷔지에는 처음에는 단독 창작을 주장했지만, 결국 크세나키스의 기여가 인정되었고, 이는 1959년 그가 사무소를 떠나 음악에 전념하는 계기가 되었다.


《Concret PH》: 입자적 공간 실험


필립스 파빌리온 내부에서 에드가르 바레즈의 《전자 시》가 시작되기 전, 관객이 입장하고 퇴장하는 동안 울려 퍼진 작품이 바로 이아니스 크세나키스《Concret PH》(1958)였다. 작품 제목에는 두 겹의 의미가 담겨 있다. 'Concret'은 강화 콘크리트구체음악(musique concrète)을 동시에 가리키며, 'PH'는 건물의 구조적 기반이 된 쌍곡 포물면(paraboloïdes hyperboliques)을 상징한다. 단 2분 30초 정도의 짧은 곡이었지만, 공간적 경험과 청각적 몰입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크세나키스는 단 하나의 음원을 선택했다. 타는 숯에서 나오는 금속성 입자음이었다. 그는 이를 1초 내외의 짧은 조각으로 나누고, 속도 변화와 중첩, 레이어링을 통해 점진적으로 변형시켰다.


크세나키스 - Concret PH


이 접근은 당시 구체음악의 주류와 달랐다. 초기 구체음악, 특히 피에르 셰페르(Pierre Schaeffer)의 1940~50년대 작품들은 녹음된 소리를 블록 단위로 배열하고, 급격한 변화와 대비를 중심으로 작품을 구성했다. 각 소리의 성격이 명확하게 구분되고, 서로 이어지는 전환은 최소화되었다.


셰페르 - Étude aux Chemins De Fer


이와 달리, 크세나키스는 소리를 서서히 발전시켜 새로운 질감을 만들어냈다. 극도로 작은 소리를 증폭하고, 오버톤(배음)이 풍부한 음향을 유지하며, 내부적 변화를 지속적으로 쌓아 올리는 방식은 그의 확률적, 입자적 접근법(Stochastic Music)의 특징을 보여준다.

공간적 재현 역시 핵심적이었다. 파빌리온 내부의 스피커 시스템은 소리가 관객의 머리 위와 발밑, 벽과 천장을 종횡무진하며 이동하게 했다. 크세나키스는 이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음이 공간 속을 점에서 점으로 복잡하게 이동하는 선, 어디서든 튀어나오는 바늘과 같다.

(Lines of sound moving in complex paths from point to point in space, like needles darting from everywhere.)

이아니스 크세나키스, Nonesuch 음반 H-71246 프로그램 노트 (Iannis Xenakis, Program notes, Nonesuch H-71246)


관객은 단순히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소리가 만들어내는 공간적 운동과 곡률을 따라 이동하며 파빌리온 내부 전체를 경험하게 된다.

《Concret PH》 는 단순한 입장 음악을 넘어, 필립스 파빌리온을 소리와 공간의 실험장으로 전환하는 작품이었다. 각 소리 입자는 독립적이지만, 전체적으로는 하나의 유기적 질감을 형성하며, 이후 이어질 바레즈의 《전자 시》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공간과 청각의 배경을 만들어냈다.


《전자 시》: 바레즈의 전자적 서사


필립스 파빌리온 내부, 관객이 《Concret PH》의 입자적 질감을 경험한 후, 공간을 가득 채운 주인공은 바레즈《전자 시》(Poème électronique)였다. 1958년 브뤼셀 세계 박람회를 위해 제작된 이 작품은 건축, 조명, 영상, 음악을 결합한 몰입형 설치였다. 바레즈는 전통적 선율과 조성의 제약을 벗어나 전자음과 잡음을 활용하여, 음악을 공간 속에서 재현되는 사건으로 구성했다.


바레즈 - 전자 시


바레즈 - 전자 시 (4D 사운드 재구성 버전)


약 8분 동안, 파빌리온의 스피커 시스템을 통해 소리는 관객 위와 아래, 벽과 곡면을 따라 이동했다. 빛과 흑백 영상이 유기적 곡면에 투사되면서, 청각과 시각 정보가 동시에 전달되었다.


《전자 시》는 구체적 음원, 즉 일상적 소리와 합성 음을 결합하여 구성되었다. 저음의 종소리와 공명, 금속성 타악기, 사이렌, 인간 음성까지 다양하게 섞였으며, 이는 관객의 위치와 주변 환경에 따라 매번 다른 체험을 가능하게 했다. 반복되는 패턴과 갑작스러운 변화가 공존하며, 음악은 고정된 형태로 존재하지 않고, 관객의 위치와 파빌리온 내부 공간에 따라 매번 다른 방식으로 청취되었다. 바레즈의 의도는 단순한 감상이나 서사가 아니라 관객이 공간 속에서 사건을 몸으로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또한 바레즈는 필름과 음악을 정밀하게 동기화하고, 공간의 곡률을 고려한 스피커 배치를 설계하여, 소리의 이동이 시각적 리듬과 긴밀히 연결되도록 했다.


50182375-Varese-Poeme-Electronique-Notes-Score_Page_14.jpg 바레즈의 스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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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 방식과 소리의 경로

이 작품은 파빌리온이 철거된 후 원형 그대로는 남아있지 않지만, 바레즈가 기록한 다중 트랙 테이프와 재구성된 자료를 통해 그 실험을 확인할 수 있다. 《전자 시》는 음악, 건축, 시각예술이 하나로 결합한 초기 시도로, 인간이 공간과 소리를 통합적으로 경험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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