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세계의 만남: 바흐의 '주제'와 윤이상의 '산책'
1976년 독일에서, 현대음악의 거장 윤이상(Isang Yun)은 지극히 서구적이고 동시에 가장 '독일적인' 과제를 맞닥뜨렸다. 라인 바흐 콜레기움(Rheinisches Bach-Collegium)이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의 서거 225주년을 기념하며, 바흐 음악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음악적 헌정》(Musikalisches Opfer, 1747)에 등장하는 '대왕의 주제'를 바탕으로 바이올린 독주곡을 써달라는 요청을 한 것이다.
당시 윤이상은 '동백림 사건'이라는 정치적 고초를 겪은 뒤, 유럽 현대음악의 중심에서 동양적 사유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음악 언어를 구축하고 있던 시기였다. 그에게 바흐의 대위법적 질서가 요구하는 변주는 단순한 창작을 넘어서는 미학적 도전이었다. 서구적 논리와 동양적 직관이 한 작품 안에서 맞서게 되는 순간이었다.
바흐가 사용한 '대왕의 주제'는 원래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가 바흐에게 제시한 선율이다. c단조를 기반으로 한 이 선율은 서구 화성학의 구조적 견고함을 보여주는 3도(Eb), 5도(G), 6도(Ab)로 이어지는 조성적 도약과, G–F♯–F–E–E♭–D–C♯–C–B로 이어지는 반음계적 하행으로 특징지어진다. 이러한 설계 덕분에 주제는 변주와 전위, 역행이 가능하며, 바흐가 추구한 음악적 논리가 온전히 유지된다.
윤이상은 이 견고한 주제를 작품 초반부에 그대로 배치함으로써 바흐의 권위를 인정했다. 동시에, 그 구조를 출발점으로 삼아 자신의 변주적 아이디어를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바흐의 논리적 질서는 해체되는 것이 아니라, 윤이상의 손길을 거쳐 새로운 음악적 공간으로 펼쳐질 준비를 마쳤다.
작품의 초연은 1977년 4월 1일, 뒤셀도르프의 벤라트 성(Schloss Benrath)에서 바이올리니스트 클라우스 페터 딜러(Klaus Peter Diller)에 의해 이루어졌다. 당시 프로그램은 "바흐의 《음악적 헌정》과 현대적 시선"이라는 제목으로 구성되어, 바흐의 선율과 윤이상의 변주가 함께 소개되었다. 이를 통해 곡 전체가 바흐의 주제에서 출발하며, 윤이상이 바흐의 선율적 골격 위에서 새로운 변주적 전개를 펼쳤음을 확인할 수 있다.
윤이상은 이 곡에 대해 스스로 '바흐의 아시아 전통으로의 산책'(A Stroll to the Asian Tradition of Bach)이라는 부제를 붙였다. 이는 단순한 제목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작곡가가 바흐의 주제를 단순히 변주하는 것이 아니라 아시아적 관점에서 새롭게 읽어내려 했음을 보여준다. 윤이상에게 바흐는 서구 음악의 권위적인 전통이 아니라, 동양적 사유 속에서 함께 탐색할 수 있는 동반자였다.
윤이상이 설정한 '산책'이라는 개념은 단순한 은유가 아니라 곡 전체의 구조적 지향을 드러낸다. 서양의 고전적 변주곡이 주제의 씨앗을 논리적으로 발아시켜 거대한 구조를 구축하는 '건축'과 같다면,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이나 브람스(Johannes Brahms)의 변주는 목적지를 향해 질주하는 직선적 과정이다. 반면 윤이상이 선택한 '산책'은 종착역을 전제하지 않는다. 길을 걷는 과정 자체의 즐거움과 주변 풍경과의 교감을 중시하며, 때로는 멈춰 서고 때로는 되돌아오는 유동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음악이 전개된다. 곡 전체는 이러한 유기적 흐름 안에서 하나의 산책처럼 구성된다.
윤이상은 바흐의 주제를 서구적 인과율의 틀에서 벗어나게 하여, 대위법의 엄격한 구조 속에 갇혀 있던 선율을 아시아적 호흡 속으로 풀어냈다. 바흐의 선율은 더 이상 기능적 요소가 아니라,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처럼 자연의 일부로 존재하며, 청중이 그 흐름 속을 함께 거닐 수 있도록 놓인다.
윤이상은 자신의 음악적 근간이 도교 사상에 있음을 밝히며, 음악을 '작곡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소리를 '받아 적는 것'에 비유했다. 브루스 더피(Bruce Duffie)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음악이 우주에서 흘러오며 자신은 그 흐름의 일부를 포착해 음으로 옮긴다고 말하며, 음악을 자연의 일부로 인식하는 관점을 드러냈다. 이러한 관점은 바흐의 주제를 단순한 논리적 구조로만 보지 않고, 명상적·자연적 흐름 속에서 새롭게 이해하려는 윤이상의 시각과 맞닿아 있다.
이 작업은 동양적 감각을 입히는 것을 넘어, 동서양의 화해를 모색하는 과정이었다. 1970년대 유럽에 거주하며 망명자로 살아가던 윤이상에게 바흐는 서양 음악을 대표하는 존재였다. 그는 서구적 기법을 도구로 삼으면서, 한국 전통 음악의 특성을 반영하여 '기술의 서구화와 정신의 동양화'를 이루었다. 바흐의 주제가 아시아적 감수성을 통과할 때, 그것은 국경을 넘어선 '보편적 아름다움'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윤이상의 작품은 첫마디부터 청중에게 바흐의 유산 위에 서 있음을 알리는 '대왕의 주제'로 시작한다.
악보의 초반 10마디에서 바이올린은 《음악적 헌정》의 '대왕의 주제'를 그대로 연주한다. 윤이상은 이 부분에서 자신의 특징적 장식이나 변형을 배제하고 바흐가 구축한 c단조의 조성적 골격을 명확히 드러낸다. 이는 뒤이은 변주부에서 나타날 주제의 변용을 대비시키는 전략적 배치이기도 하다.
제시부의 마지막, 9~10마디에서 바이올린은 세 번의 C음 피치카토(Pizzicato)를 연주한다. 이는 바흐의 원곡에는 없는 윤이상만의 독창적 표현이다.
세 번의 피치카토는 주제를 마무리하는 동시에 곡의 공간적 확장을 강조한다. 실제 연주에서는 처음 강하게(f) 시작한 음이 점차 작아지며(p) 잔향 속으로 흘러가도록 설정되어, 소리가 사라지는 과정과 그 여운이 부각된다.
이 연주 방식은 서구 음악에서 중시하는 조성적 완결보다, 음이 사라지는 과정과 공간성에 주목하는 동양적 미학과 맞닿아 있다. 피치카토로 비워진 공간은 이어지는 변주에서 바흐의 주제가 아시아적 전통 속에서 자유롭게 '산책'하도록 하는 통로가 되며, 동양 수묵화에서 볼 수 있는 '여백'의 미학과 유사한 효과를 만들어낸다. 타종과 같은 울림과 길어진 잔향은 과거 선율의 소멸과 동시에 새로운 시작을 암시한다.
아르코(Arco)로 연주되는 풍성한 선율과 건조한 피치카토의 대비는 연주자와 청중 모두에게 명상적 집중을 요구한다. 제시부의 마지막에서 바흐의 주제는 마치 구름 속으로 사라지듯 음적·공간적 여운 속으로 녹아들며, 윤이상은 이를 통해 바흐의 음악을 새로운 시간적·공간적 차원으로 이끌어낸다.
윤이상의 《대왕의 주제》(Königliches Thema)가 도달하는 최종적인 미학적 지점은 '서로 다른 두 세계의 결합'이다. 바흐로 대변되는 서구의 선율적 엄격함과 윤이상이 지향하는 동양적 공간감이 만나는 찰나의 전이 과정은 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예술적 성취다.
윤이상은 바흐의 선율적 골격을 유지하면서도, 이어지는 변주들에서 점진적으로 동양적 시간감각 속으로 청중을 이끈다. 이전까지 수평적·논리적 흐름을 따르던 주제는 이제 수직적·유연한 호흡 속에서 펼쳐지며, 음 하나하나가 일정한 속도로 이어지기보다는 자연스럽게 늘어나고 줄어드는 시간을 경험하게 한다. 이 전이는 단순한 변주가 아니라, 서구적 직선의 음악이 동양적 곡선과 호흡 속으로 확장되는 순간이다. 이 과정에서 바흐의 구조적 질서와 동양적 유연함이 자연스럽게 겹치며, 곡 전체가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확장하는 체험으로 바뀐다.
서구 음악의 엄격함은 '박자'(Meter)라는 시간적 틀 안에서 구현된다. 윤이상은 제1변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마디줄을 삭제해 심리적 장벽을 허물고, 박자와 마디의 강제적 틀을 느슨하게 처리했다. 원 주제의 길이를 모두 8분음표로 통일하여 청자가 일정한 리듬 속에서 선율을 따라가도록 한 것도 이러한 의도에 따른 것이다.
음악적 구조에서는 바흐의 푸가나 카논, 쇤베르크(Arnold Schoenberg) 등 제2빈 악파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원형과 전위가 나타난다. 반음계적 진행이 옥타브로 확장되어 단7도와 단9도로 연결되기도 하며, 때로는 옥타브로 순차적으로 연주되거나 주제가 잠시 끊기기도 한다. 마지막에는 전위형이 등장하며, 연속된 8분음표 흐름이 5잇단음표로 변하고, 이어질 16분음표의 제2변주를 자연스럽게 예고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완벽한 논리와 규칙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초록색 부분에서는 주제의 4번째 음에서 A♭ 대신 G#을 사용한다. 또한 F# 다음에 나오는 E는 F의 오류로 보인다. 보라색 부분에서는 주제가 제대로 마무리되지 않고 주제의 마지막 다섯 음을 남긴 채로 다른 곳으로 향한다. 마지막 회색 부분에서는 첫음이 C 대신 B로 시작하며, 반음계의 시작인 F가 생략되었다.
윤이상은 바흐를 통해 서양 음악을 이해하고, 아시아의 전통적 감수성을 통해 서양적 질서를 재구성하는 과정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