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상 대왕의 주제 아는 척 하기 (2편)

'주요음'의 미학: 붓글씨의 획으로 다시 쓴 바흐

by 돈 없는 음대생

주요음(Hauptton) 기법: 하나의 음 속에 담긴 생성, 변화, 소멸


윤이상(Isang Yun) 음악에서 핵심적인 개념은 주요음(Hauptton)이다. 서구 전통에서 '음'은 선율을 구성하는 단위적 요소로, 고정된 주파수를 가진 점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윤이상에게 음은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 생성변화, 소멸의 잠재력을 담은 하나의 생명체다. 제2변주부터 등장하는 주요음 개념은 바흐(Johann Sebastian Bach)의 '대왕의 주제'가 아시아적 시간과 호흡 속에서 새롭게 살아 움직이는 방식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생성


주요음은 생성 단계에서 단순히 악보에 그려진 위치에 머물지 않고, 다음 단계인 변화를 향한 잠재력을 지닌다. 《대왕의 주제》(Königliches Thema)에서 각 음은 윤이상의 손길을 거치며 독립적인 음적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


변화


주요음의 핵심적 특징은 한 음 안에서 벌어지는 내적 변화다. 음을 길게 끌면서 미세한 뉘앙스와 비브라토 등을 통해 음의 성격과 울림을 조절하는 것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음 자체의 본질을 형성하는 과정이다. 이는 동양 서예에서 붓을 움직이며 선의 굵기와 번짐을 조절하는 것과 유사하다. 바이올린의 활을 붓처럼 사용하여, 바흐의 선율적 마디들이 살아 숨 쉬는 음의 획으로 바뀐다.


소멸


주요음의 소멸은 단절이 아니라 지속연결의 과정이다. 음은 갑자기 끊기지 않고, 점진적으로 힘을 빼며 사라지거나, 트릴, 피치카토(Pizzicato)와 글리산도(Glissando)를 통해 다음 음으로 기운을 전달한다. 이렇게 하나의 음 속에서 생명 순환이 완결되며, 바흐의 주제는 새로운 시간성과 명상적 깊이를 획득한다.


결국 주요음 기법은 바흐의 조직적 주제를 개별 음 단위로 풀어내면서도, 서구 대위법적 구조 위에 새로운 생명과 호흡을 부여한다. 견고한 바흐의 선율 구조가 윤이상의 손에서 유기체로 변모하며, 이어지는 변주에서 복잡한 시김새와 호흡 강조가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untitled-document-page-001.jpg 파란색으로 표시된 주요음이 변화하는 과정. 앞뒤로 장식음도 많고, 악상도 계속해서 변한다.


윤이상 - 가락 (5:48- 6:16)


제2변주: 16분음표 중심의 세분화와 주제 해체


제2변주는 16분음표 중심의 세분화된 리듬 위에서, 쇤베르크(Arnold Schoenberg)의 12음 기법과 윤이상의 주요음 기법이 바흐의 선율과 결합하며 새로운 음악적 질서를 형성한다. 이전 변주에서 8분음표로만 구성되었던 '대왕의 주제'는 이 변주에서 더욱 분절되고 파편화되어 청중이 원형을 한눈에 인식하기 어려워진다. 주제의 각 조각 사이의 음 하나하나가 독립적인 에너지를 갖고 공기 속으로 퍼져 나가는, 일종의 음향적 원자화가 일어난다. 이러한 세분화는 바흐의 정적인 주제에 강렬한 동적 에너지를 부여한다. 이는 기존 서구 음악에서 선율이 논리적 결론으로 나아가는 발전 개념과 달리, 음들이 자체적 생명력을 지닌 상태로 존재하는 방식이다.


대부분의 음은 한 번씩만 사용되어 12음 음렬과 유사한 원칙을 따른다. 그러나 윤이상은 하나의 음렬을 고정하지 않고, 제2변주를 위해 총 9개의 음렬을 미리 설정했다. 선율마다 음의 수와 배열을 달리하여 변화와 긴장을 만들어내며, 일부 선율은 6개의 음, 일부는 5개 혹은 7개의 음으로 구성되고, 반음계 하행 진행이 이어질수록 4개나 3개로 줄어들다가 마지막에는 다시 6개의 음으로 회복된다. 선율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12개의 음이 모두 포함되어 원형 주제를 완성한다.

Handout_Page_2.jpg 윤이상의 스케치. 9개의 음렬이 그려져 있고, 주제의 음들이 동그라미로 표시되어 있다. 출처: Sparrer, Ssi-ol. Almanach 2004-09, P. 130.

선율이 한 번 진행된 뒤에는 전위형이 같은 방식으로 이어지며, 시작 음이 C에서 G로 이동한다. 원형 음렬은 반복되지 않고 새로운 음렬이 적용되며, 음 그룹(Tongruppe)의 길이와 변화 속에서 선율의 생동감과 유연성이 드러난다. 연주는 ff로 시작하여 강력한 에너지를 유지하다가, 변주 마지막에서 mf로 점차 약하게 연주하며 자연스럽게 제3변주로 이어진다.

Yun, Isang - Konigliches Thema (Vn)_Page_1-2.jpg
Yun, Isang - Konigliches Thema (Vn)_Page_2-1.jpg 빨간색으로 표시된 주제 음들과, 파란색으로 표시된 전위형 주제의 음들. 이것들이 주요음이다.


결과적으로 제2변주는 바흐의 주제를 단순한 선율이 아니라 음들의 독립적 에너지와 연속적 전위로 재구성하여, 제4변주에서 등장할 동양적 시간과 공간 감각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제2변주 중간부부터 나타나는 조표 기호(#나 b)는 바로 뒤의 단일 음뿐만 아니라, 하나의 음 그룹(Tongruppe) 전체에 적용된다. 《대왕의 주제》에서는 전통적 마디선이 존재하지 않으며, 일반적인 현대음악과 달리 조표가 단순히 바로 다음 음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많은 연주자들이 이를 오해하거나 잘못 연주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Tongruppe는 곡 초반 바이올린이 연주하는 바흐의 주제 선율을 기준으로 정의된다. 선율의 각 음에는 악센트가 부여되어 있으며, 이 음이 주요음(Hauptton)으로 놓인다. 한 주요음에서 다음 주요음까지가 하나의 Tongruppe를 이루며, 이 단위 안에서 음들이 서로 연결되고 변화하며 독립적 에너지를 발산한다. Tongruppe 개념을 이해하면 제2변주의 음 배열과 연주 방식, 그리고 주요음 기법의 의미를 명확히 파악할 수 있다.

Yun, Isang - Konigliches Thema (Vn)_Page_1-3.jpg 각각의 네모 칸이 Tongruppe가 된다.

제3변주: 주요음의 강조와 음향적 긴장


제3변주도 제2변주와 마찬가지로 16분음표를 기본 단위로 구성되어 있으며, 12음 음렬을 사용하고 주제는 Eb에서 시작한다. 이전 변주와 달리, 이번 변주에서는 각 주요음이 단순한 악센트 표시뿐만 아니라 악상(dynamic) 지시로도 구별된다. 모든 주요음은 처음에 f로 연주되며, 점차 mf로 감쇠한다.


음정의 폭도 크게 확장되어 옥타브를 넘나드는 음고 차이가 이전 변주보다 훨씬 자주 나타난다. 또한, 대부분의 주요음은 이음줄로 2~4음씩 연결되어 연속성을 갖는다. 이전 변주에서는 모든 음이 거의 동등하게 취급되었으나, 이번 변주에서는 주요음에서 멀어질수록 다른 음들과의 연결감이 점차 사라지며, 이음줄로 연결되지 않은 음은 다이내믹이 점차 줄어들어 상대적으로 약화된다. 이로 인해 주요음이 더욱 두드러지게 된다.

Yun, Isang - Konigliches Thema (Vn)_Page_2-2.jpg 노란색으로 표시된 주요음과, 네모칸으로 표시된 Tongruppe. Tongruppe의 시작은 이음줄과 f로 시작하고, 점점 작아지면서 이음줄이 없어진다.

마지막 주요음 그룹에서는 G의 옥타브 꾸밈음이 등장하며, 이는 다음 제4변주로의 전환을 암시한다. 제3변주는 이렇게 음고, 다이내믹, 연결 방식의 변화를 통해 주요음의 강조와 음향적 긴장을 극대화하면서, 곡의 구조적 흐름과 변주의 연속성을 강화한다.


12음의 재해석: 쇤베르크를 넘어 스크리아빈과의 공명


윤이상은 1950년대 중반 유럽에서 아르놀트 쇤베르크(Arnold Schoenberg)의 12음 기법을 익혔다. 그러나 그는 이를 엄격한 수적 체계로 받아들이기보다, 음에 생명과 호흡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재구성했다. 그에게 12음은 서구 합리주의의 산물이 아니라, 열두 음이 위계 없이 공존하는 하나의 질서였다. 이 질서는 계산의 결과라기보다 감각과 사유가 결합된 음향 세계의 토대였다.


쇤베르크의 음렬이 조성의 중력을 해체하기 위한 논리적 구조였다면, 윤이상은 음렬을 연주자의 신체적 감각 속에서 살아 움직이도록 만들었다. 한국 전통 성악의 선율적 굴곡과 미세한 음의 흔들림은 그의 12음 구성에 깊이 스며 있다. 특히 특정 음을 주요음으로 길게 지속시키고, 그 주변에서 다른 음들이 긴장과 이완을 반복하도록 하는 방식은 음렬을 고정된 배열이 아닌 유기적 흐름으로 바꾸어 놓는다. 이와 같은 접근은 흔히 '유기화된 12음주의'라 불리며, 차갑고 추상적인 체계로 인식되던 12음을 호흡과 맥박을 지닌 음향으로 되살려낸다.


이 지점에서 고트프리트 에버레(Gottfried Eberle)는 윤이상의 12음 운용이 쇤베르크의 직계라기보다 알렉산드르 스크리아빈(Alexander Scriabin)의 음향 사유와 더 가까이 맞닿아 있다고 본다. 스크리아빈은 후기 작품에서 이른바 '신비화음'(mystic chord)을 통해 음을 기능적 화성의 구성 요소가 아니라, 스스로 빛을 발하는 중심으로 제시했다. 그의 '음향 중심'(Klangzentren) 개념은 음이 하나의 중심으로서 에너지를 방출하고, 그 주위에 음향적 장을 형성한다는 사유를 담고 있다.

kgth4gr1.png 스크리아빈의 신비화음

윤이상의 주요음 역시 이와 유사한 중심성을 지닌다. 주요음은 단순히 강조되는 음이 아니라, 주변 음들을 끌어당기고 밀어내며 공간을 형성하는 핵심이다. 이때 12음은 고정된 순열의 총합이 아니라, 열려 있는 가능성의 장으로 존재한다. 에버레가 언급한 "열두 음의 미래가 열려 있는 영역"이라는 평가는, 윤이상의 12음이 닫힌 체계가 아니라 확장 가능한 음향 세계임을 드러낸다.


다만 두 작곡가의 철학적 배경은 상이하다. 스크리아빈의 사유가 서구 신지학과 상징주의적 우주론에 기대고 있다면, 윤이상은 이를 동양적 세계관, 특히 도교적 사유와 접목했다. 스크리아빈에게 음은 무한히 확산되는 빛과 에너지의 상징에 가깝다. 반면 윤이상에게 음은 생성과 소멸, 긴장과 이완이 순환하는 가운데 균형을 이루는 존재다. 협화와 불협화의 대비 역시 단순한 대립이 아니라, 더 높은 차원의 통일을 향한 과정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윤이상의 12음은 쇤베르크의 엄격한 음렬 체계와 분명히 구별된다. 쇤베르크가 전위·역행·역전위 등 구조적 변형을 통해 논리적 완결성을 추구했다면, 윤이상은 음렬을 필요에 따라 분절하고 재조합하며 주요음을 중심으로 유동적으로 조직했다. 12음은 해체의 도구가 아니라, 음 자체를 자율적 존재로 드러내는 매개였다.


예컨대 《대왕의 주제》에서 그는 바흐의 주제를 현대적 음향 속에서 새롭게 조명한다. 여기서 12음은 전통을 부정하는 수단이 아니라, 과거의 음악을 현재의 시간 속에서 다시 숨 쉬게 하는 방식으로 쓰인다.


결국 에버레의 비교가 시사하듯, 윤이상의 12음은 쇤베르크를 출발점으로 삼되 그 경계를 넘어선다. 그것은 스크리아빈 이후의 음향 중심적 사유와 공명하면서도, 동양적 세계관 속에서 재해석된 독자적 미학을 형성한다. 윤이상의 음악에서 12음은 조성의 파괴를 위한 전략이 아니라, 음 하나하나가 스스로 존재하며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열어가는 장으로 자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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