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상 대왕의 주제 아는 척 하기 (3편)

12음 기법의 생리화: 음양의 대비와 화해

by 돈 없는 음대생

제4변주: 동양적 시간과 선율의 유영


제4변주는 앞선 변주들과는 다른 차원의 시간 감각을 펼쳐 보인다. 음악은 마치 끝을 알 수 없는 공간 속으로 서서히 떨어지듯 진행되며, 선율은 직선적 전개보다 유영하듯 흐르는 방향성을 띤다. 이 지점에서 동양적 선율 어법이 본격적으로 부상한다. 음과 음 사이의 간격은 단순한 계단식 진행이 아니라 미묘한 굴곡과 장식으로 채워지며, 시간은 측정 가능한 단위라기보다 확장된 장으로 인식된다. 이러한 흐름 위에 바흐(Johann Sebastian Bach)의 주제 선율이 겹쳐지면서, 서구의 대위적 사고와 동양적 선율 미학이 한 공간 안에 놓이게 된다.


이 변주의 선율은 B♭에서 시작하는 전위형이다. 주요음(Hauptton)은 다른 음들보다 현저히 긴 음가로 유지되며 중심을 형성한다. 그 주위를 둘러싼 음들은 빠른 장식음으로 처리되어, 중심과 주변의 대비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잇단음표의 연속과 32분음표, 그보다 더 짧은 음가의 세분화는 주요음을 감싸는 미세한 파동을 만들어낸다. 결과적으로 긴 지속음과 세밀한 장식음 사이의 대비가 시간의 밀도 차이를 형성하며, 청자는 한 음 안에서 다층적 시간을 경험하게 된다. 이 과정은 음 하나하나가 중력 없이 부유하는 인상을 준다.

Yun, Isang - Konigliches Thema (Vn)_Page_2-11.jpg 빨간색으로 표시된 주요음들

악상 역시 세 갈래의 유형으로 구분된다. f에서 시작해 점차 약해졌다가 다시 확대되는 형태와, f에서 mf로 가라앉는 형태가 있다. 이 두 유형이 교차하듯 반복되며 긴장과 이완의 파동을 만든다. 그러나 전위형 반음계 상승이 마무리되는 지점, 즉 E♭에 이르면 이전과 다른 양상이 나타난다. 여기서는 f에서 오히려 ff로 확대되며, 축적된 에너지가 응축된 채 분출된다. 이 대비는 변주의 구조적 절정을 분명히 드러낸다.


주요음을 장식하는 주법 또한 한층 다양해진다. 왼손 피치카토, 트릴, 꾸밈음, 3도 트레몰로 등은 단순한 기교적 효과를 넘어, 중심음을 둘러싼 음향의 결을 풍부하게 만든다. 이러한 세부들은 동양적 선율의 장식성과 서구적 기교가 만나는 지점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결국 제4변주는 전위형 선율을 바탕으로, 긴 지속의 주요음과 세밀한 장식음의 대비, 그리고 점층적 악상 변화를 통해 무한한 시간의 감각을 구현한다. 그 위에 바흐의 주제가 스며들며, 동서양의 음악적 사유가 하나의 흐름 안에서 통합된다. 이는 단순한 양식적 결합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간관과 음향관이 한 공간에서 만나는 순간이라 할 수 있다.


바이올린 주법과 주요음 구현


주요음이 하나의 중심 개념이라면, 그것을 실제의 소리로 구현하는 길은 바이올린 주법에 있다. 윤이상(Isang Yun)은 서양 악기인 바이올린을 통해 한국 전통음악의 시김새를 음향적으로 번역했다. 거문고 농현의 미세한 떨림은 활과 왼손의 섬세한 조절을 통해 새로운 음향 세계로 재탄생한다. 그 결과 바흐의 선율은 고정된 구조물이 아니라, 끊임없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숨 쉬는 존재로 변모한다.


비브라토


서양 고전음악에서 비브라토는 대체로 음색을 부드럽게 하는 장식적 수단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윤이상의 음악에서는 그 의미가 달라진다. 비브라토는 음의 표면을 꾸미는 요소가 아니라, 음 내부의 긴장과 생동을 드러내는 핵심적 표현 수단이 된다.


그는 어떤 부분에서는 비브라토 없이 시작해 음의 중심을 또렷하게 드러내고, 이어 점차 진폭과 속도를 확대하며 음을 안쪽에서부터 흔들리게 한다. 이는 한국 전통음악의 농현과 맞닿아 있다. 음은 고정된 점이 아니라 위아래로 미세하게 요동하는 폭을 지니며, 그 흔들림 속에서 생기를 획득한다. 《대왕의 주제》(Königliches Thema) 악보에는 구체적 지시가 명시되지 않았지만, 이러한 개념을 이해하고 적용할 때 음악은 훨씬 더 윤이상적 색채를 띠게 된다. 왼손은 단순히 음높이를 정하는 역할을 넘어, 음의 에너지를 조율하는 주체가 된다.


글리산도


서구적 선율이 분명한 음과 음의 연결로 이루어진다면, 윤이상의 선율은 그 사이의 미세한 공간까지 포함하는 흐름으로 확장된다. 글리산도는 이 확장의 통로다. 그것은 단순한 효과음이 아니라, 음과 음 사이의 틈을 메우는 연속성의 표현이다. 이는 동양 서예에서 한 획과 다음 획 사이를 보이지 않는 기운이 이어주는 상태와도 유사하다. 이렇게 연결된 선율은 서구적 구조를 유지하면서도 아시아적 유연함을 획득한다.


주요음으로의 수렴과 발산


빠른 음형과 장식음들이 자유롭게 흩어져 있는 듯 보이지만, 그것들은 결국 특정 주요음으로 모인다. 윤이상은 세분화된 리듬과 다양한 장식 주법—왼손 피치카토, 트릴, 꾸밈음, 3도 트레몰로 등—을 통해 중심음을 둘러싼 음향의 층위를 풍성하게 만든다.


결정적인 순간, 빠르게 움직이던 음들은 긴 음가의 주요음에 머문다. 그 주요음은 이미 비브라토와 미세한 흔들림, 글리산도의 잔향을 머금고 있다. 바흐의 주제에서 비롯된 음고는 이 중심 안에서 성격을 바꾸며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 해체된 조각들은 흩어지지 않고, 중심을 통해 새로운 질서를 형성한다.


이러한 과정은 파괴를 위한 해체가 아니다. 윤이상은 바흐의 선율을 구성하는 가장 작은 단위, 곧 '음' 그 자체로 시선을 돌린다. 마디와 리듬의 경계가 흐려지고 세분화가 극단에 이르는 지점에서, 청자는 오히려 소리의 근원적 질서를 경험하게 된다.


서구의 주제는 동양적 시김새를 통과하며 새로운 결을 얻는다. 단단한 구조는 유연한 흐름으로 변하고, 고정된 음은 흔들림 속에서 생기를 얻는다. 이 변용의 과정을 거치며 바흐는 더 이상 하나의 역사적 상징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윤이상의 음향 세계 안에서, 동서양을 가로지르는 새로운 동반자로 자리하게 된다.


서예적 선묘: 음악적 흐름을 이루는 획


제4변주를 이해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미학적 배경은 윤이상이 자주 비유했던 '서예'의 감각이다. 그는 자신의 음악을 "하늘에 그려지는 붓글씨"에 비유했다. 이 말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그의 선율 구성 원리를 드러내는 핵심적 이미지다. 바흐의 주제가 정교한 설계도처럼 치밀하게 짜인 '선'이라면, 윤이상의 변주는 그 선을 붓의 힘과 속도가 응축된 '획'으로 바꾸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선과 획의 차이


서구 음악, 특히 바흐의 대위법적 선율에서 선은 점과 점을 연결하는 명료한 경로다. 균질한 두께와 안정된 흐름을 전제로 하며, 그 가치는 전체 구조 속에서의 균형과 대칭에 있다. 선율은 논리적 질서 속에서 정교하게 맞물린다.


반면 동양 서예의 ''은 시작에서 끝까지의 시간적 운동을 모두 품는다. 붓이 종이에 닿는 순간(기필), 움직이며 힘을 조절하는 과정(행필), 그리고 붓을 거두는 마무리(수필)에 이르기까지, 획은 압력과 속도에 따라 끊임없이 변한다. 굵기와 농담, 긴장과 이완이 한 획 안에서 공존한다.


윤이상은 바이올린의 활을 이러한 붓에 비유했다. 제4변주에 이르면 바흐의 주제는 더 이상 일정한 두께를 지닌 선으로 들리지 않는다. 활의 압력, 속도, 접촉 지점의 변화에 따라 음색과 밀도가 시시각각 달라지며, 선율은 하나의 고정된 윤곽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궤적으로 변모한다. 선은 흐려지고, 그 자리에 운동하는 획이 남는다.


공간을 가르는 기의 흐름


서예에서 중요한 것은 글자의 외형만이 아니다. 획과 획 사이를 흐르는 보이지 않는 기운이 전체의 생동을 좌우한다. 윤이상은 이를 음악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주요음과 그 주변 음형 사이의 관계를 치밀하게 다루었다.


빠르게 분절된 음형들이 흩어지는 듯 보이면서도 결국 특정 주요음으로 수렴하는 구조는, 마치 여러 획이 하나의 중심 기세를 향해 모이는 형상과 같다. 음과 음 사이의 도약은 단순한 간격 이동이 아니라, 서로를 밀고 당기는 긴장 관계를 형성한다. 이 긴장 속에서 선율은 정적인 배열이 아니라, 공간을 가르며 나아가는 운동으로 인식된다.


특히 활의 압력 변화와 음가의 대비는 획의 농담을 떠올리게 한다. 길게 지속되는 주요음은 굵고 힘 있는 획과 같고, 그 주변을 감싸는 빠른 장식음들은 붓 끝의 섬세한 떨림처럼 작용한다. 청자는 더 이상 음의 높낮이만을 듣지 않는다. 허공에 그려지는 소리의 궤적을 감각하게 된다.


수학적 질서에서 심리적 운동으로


이러한 서예적 선묘는 바흐의 주제가 지닌 구조적 엄정함을 다른 차원으로 옮긴다. 본래의 주제가 기하학적 질서를 드러냈다면, 윤이상의 변주에서는 그 질서가 심리적·감각적 운동으로 바뀐다. 선율은 설계된 형태라기보다, 순간의 에너지와 압력에 따라 형성되는 생동하는 형상으로 들린다.


이는 단순한 양식적 혼합이 아니다. 서구적 구조는 유지되지만, 그것을 구성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선은 획으로, 고정은 운동으로, 균질성은 밀도의 변화로 바뀐다.


결국 주요음 기법과 시김새, 그리고 주제의 분해와 재조합은 모두 이 서예적 미학을 향해 모인다. 윤이상은 바흐라는 서구의 텍스트를 가져와, 동양의 필법으로 다시 썼다.


음양의 대비와 교차


윤이상은 서양 12음 기법의 '거울 구조'를 단순한 대칭 원리가 아니라, 동양적 음양 사유로 재해석했다. 음렬의 전위(Inversion)가 서구 이론에서 음정 관계를 상하로 뒤집는 변형에 해당한다면, 그의 음악에서 그것은 서로 다른 기운이 교차하며 균형을 이루는 우주적 질서의 표현에 가깝다. 바흐의 주제는 이러한 대비 속에서 새로운 생명력을 얻는다.


전위를 통한 음양 형상화


윤이상은 곡 전반에 걸쳐 주제의 원형과 전위형을 교차 배치한다. 이 대비는 단순한 기법적 반복이 아니라, 상반된 힘의 상호 보완을 드러낸다.


원형은 상행 도약과 또렷한 윤곽을 통해 외부로 뻗어 나가는 힘을 지닌다. 이는 확장과 발산의 에너지, 곧 '양'의 기운을 상징한다. 반면 전위형은 음정 방향이 뒤집히며 하강과 수렴의 흐름을 강조한다. 안으로 가라앉고 응축되는 이 성격은 '음'의 기운과 맞닿아 있다.


윤이상은 이 두 형태를 기계적으로 나열하지 않는다. 원형이 강하게 치솟으면, 이어 전위형이 이를 감싸며 균형을 이룬다. 상승과 하강, 팽창과 응축이 교대로 나타나며, 선율은 하나의 순환 구조를 형성한다. 이 과정에서 무조적 음향은 방향성을 잃지 않고, 긴장과 안정이 반복되는 호흡을 획득한다.


거울 구조와 순환


서구 12음 기법에서 전위와 역행은 음렬의 통일성을 확보하기 위한 논리적 장치다. 그러나 윤이상은 이 거울 관계를 보다 넓은 세계관 속에 위치시킨다. 원형과 전위형은 서로의 그림자이자 또 다른 자아로 존재한다. 하나가 드러나면 다른 하나가 응답하며, 둘은 끊임없이 서로를 비춘다.


이 교차는 대립을 위한 대립이 아니다. 오히려 상반된 힘이 교대로 나타나며 더 큰 통합을 향해 나아가는 구조다. 이렇게 형성된 선율의 흐름은 단선적 진행이 아니라, 순환과 회귀를 포함한 유기적 운동으로 인식된다.


대비를 통한 화해


윤이상이 설정한 음양의 대비는 긴장을 동반하지만, 파열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상승이 극에 이르면 하강이 시작되고, 수렴이 깊어지면 다시 확장의 기운이 움튼다. 이 반복은 곡 전체를 관통하는 보이지 않는 질서로 자리한다.


특히 《대왕의 주제》에서 원형과 전위형의 교차동서양 사유의 만남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서구적 기법이 동양적 균형 감각과 결합하면서, 12음은 단순한 구조적 실험을 넘어 철학적 함의를 지닌 언어로 확장된다.


이 대비가 절정에 이르는 지점에서는 두 형태가 더 이상 교대로 나타나는 데 그치지 않고, 한 공간 안에서 중첩된다. 그 순간 원형과 전위형은 서로를 부정하지 않고, 하나의 울림 속에서 공존한다. 이는 윤이상이 추구한 조화의 이상을 음악적으로 구현한 장면이며, 음양의 순환이 궁극적으로 하나로 모임을 드러낸다.


제5변주: 원형과 전위형의 결합


전체 변주 구조의 한가운데 놓인 제5변주는 작품의 대칭축이자 정점에 해당한다. 앞선 변주들이 바흐의 주제를 분해하고, 원형과 전위형을 교차시키며 음양의 대비를 탐색하는 과정이었다면, 이 변주에서는 그 상반된 흐름이 하나의 공간 안에서 동시에 울린다. 윤이상은 이를 바이올린의 이중음(Double Stop)으로 구현하며, 서로 다른 두 원리가 공존하는 상태를 청각적으로 드러낸다.


이중음을 통한 동시적 공존


제5변주의 핵심은 두 줄을 동시에 긋는 이중음의 전면적 활용이다. 위 성부에는 주제의 원형(Original), 아래 성부에는 전위형(Inversion)이 배치된다. 두 선율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진행하며 거울 관계를 형성한다.

Yun, Isang - Konigliches Thema (Vn)_Page_3-1.jpg 빨간색으로 표시된 주제의 원형, 초록색으로 표시된 전위형. 파란색으로 표시된 전위형의 오류(?).

서구 대위법에서도 2성부는 익숙한 구성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점은 단순한 화성적 밀도가 아니라, 두 상반된 흐름이 하나의 순간에 겹쳐진다는 사실이다. 앞선 변주들에서 원형과 전위형이 시간차를 두고 등장했다면, 이제는 같은 시간 안에서 동시에 호흡하는, 말하자면 '태극'(太極)의 상태가 된다. 두 선율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며 거울처럼 대칭을 이루는데, 이때 발생하는 음정의 간격은 극도의 긴장감을 형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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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과 음양의 조화

충돌과 수렴의 역학


이 변주에서 G로 시작하는 원형과 D로 시작하는 전위형이 맞물리며 형성되는 단2도, 증4도 등의 간격은 날카로운 긴장을 자아낸다. 윤이상은 이를 완화하지 않고 정면으로 드러낸다. 반진행으로 벌어지는 간격은 극단적 긴장을 만들고, 그 긴장이 완전4도나 완전5도로 수렴하는 순간 강한 해방감을 낳는다.


이 과정은 갈등과 화해의 연속이다. 서로 다른 두 힘은 충돌을 거쳐 균형에 도달한다. 이러한 전개는 단순한 음향 대비를 넘어, 상반된 원리가 더 높은 차원의 통합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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