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르담 대성당과 음악 아는 척 하기 (5편)

프랑스 혁명과 황제의 등극

by 돈 없는 음대생

혁명기 성당의 격하와 성물 파괴


앙시앵 레짐의 몰락과 노트르담


1789년 프랑스 혁명은 절대왕정과 가톨릭교회의 결합 구조를 근본에서 뒤흔들었다. 파리 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을 때, 분노의 대상은 국왕 개인을 넘어 왕권을 신성시하던 정치·종교 질서 전반이었다. 프랑스 왕권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국가적 전례와 상징적 의식을 담당해 온 노트르담 대성당은 자연스럽게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의 상징으로 지목되었다.


1790년 성직자 시민헌장 제정 이후 교회 재산은 국가 소유로 편입되었고, 1793년에 이르러 성당은 사실상 종교 기능을 중단당했다. 그해 11월, 성당은 ‘이성의 신전(Temple de la Raison)’으로 개칭되었으며 가톨릭 전례는 금지되었다. 이는 단순한 명칭의 변경이 아니라, 수 세기 동안 성당을 지배해 온 기독교적 가치관을 인본주의이성주의로 대체하려는 급진적인 시도였다. 성당 제단은 철거되었다. 이 과정에서 노트르담은 성스러운 예배의 공간에서 정치적 선전의 장으로 전락하는 전대미문의 수난을 겪게 되었다.


유다 왕 조각상의 파괴와 성물 손실


혁명 광풍이 몰고 온 파괴의 손길은 성당의 외관과 내부에 치명적인 상흔을 남겼다. 1793년 가을, 성당 정면의 ‘유다 왕들의 갤러리’에 놓여 있던 28개의 석조상이 파괴되었다. 혁명 군중은 이 조각상들을 프랑스 국왕들의 형상으로 오인하고 끌어내려 훼손했다. 실제로는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유다 왕들을 묘사한 것이었으나, 당시에는 왕권의 상징으로 간주되었다. 이 조각상들은 훗날 19세기에 일부가 재발견되었고, 현재는 클뤼니 미술관에 보존되어 있다.

5_of_the_28_Heads_of_the_Kings_of_Judah_(7179084166).jpg 훼손된 석조상들


내부 역시 큰 손실을 입었다. 금속 성물과 장식품은 녹여 군수 물자로 전환되었고, 스테인드글라스 일부는 파손되거나 철거되었다. 다만 모든 창이 완전히 파괴된 것은 아니며, 상당수는 이후 복원 과정을 거쳐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성당은 일정 기간 혁명정부 지시로 식량과 와인 창고로 사용되었고, 관리 부재 속에서 건축물의 훼손이 가속화되었다. 이 시기는 중세 고딕 유산이 체계적으로 보존되지 못한 채 방치된 시기로 평가된다.


이성의 축제와 전통 음악의 전환


1793년 11월 10일, 성당 내부에서는 가톨릭 미사 대신 ‘이성의 축제(Fête de la Raison)’가 열렸다. 임시로 설치된 인공 산과 자유의 상징물이 공간을 채웠고, 배우들이 등장해 혁명 이념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다. 전통적인 라틴어 미사곡 대신, 혁명기를 대표하는 작곡가 프랑수아 조제프 고세크(François-Joseph Gossec)등 동시대 음악가들의 민중적인 선율계몽주의적 가사가 성당의 아치 아래를 채웠다.

Charles-Louis_Müller,_La_fête_de_la_raison_à_Notre-Dame_de_Paris_le_10_novembre_1793.jpg Charles-Louis Müller - 1793년 11월 10일 파리 노트르담 성당의 이성 축제

이 행사는 종교적 신성을 부정하고 이성을 새로운 공적 가치로 제시하려는 정치적 시도였다. 성당의 음향은 더 이상 전례 음악을 위한 것이 아니라, 혁명적 메시지를 확산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공간의 상징성은 유지된 채, 그 의미만이 급격히 전환된 것이다.


이 시기 노트르담은 단순히 종교 시설이 아니라, 정치적 격변 속에서 상징의 의미가 재해석되고 변형된 장소였다. 파괴는 왕권과 교권을 향한 상징적 단절의 표현이었으며, 동시에 중세 예술 유산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오르간과 혁명기 음악


대오르간의 생존과 구조적 존속


프랑스 혁명기, 수많은 교회 오르간이 해체되거나 금속 파이프가 징발되었다. 종교적 상징물은 구체제의 잔재로 규정되었고, 파리의 주요 성당들 또한 그 격랑을 비켜 가지 못했다.


노트르담 대성당 역시 세속화되었으며 내부 장식과 제단은 크게 훼손되었다. 그럼에도 대오르간은 완전한 해체를 면한 채 구조적으로 존속했다. 이는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결코 자명한 결과가 아니었다.


혁명가요로서의 오르간 연주


후대에 전해지는 이야기 가운데 하나는, 혁명기 오르가니스트가 혁명가요를 연주함으로써 오르간의 존재 의미를 새롭게 드러냈다는 전승이다. 그 레퍼토리로 흔히 거론되는 곡이 〈라 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와 〈Ah! ça ira〉다. 1792년 이후 이 노래들은 공공 축제와 정치 집회에서 반복적으로 울려 퍼지며 공화국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라 마르세예즈

Ah! ça ira

이 전승에 따르면, 성당의 거대한 파이프를 통해 울려 나온 혁명가요는 더 이상 전례 음악이 아니었다. 그것은 새로운 정치 질서를 표상하는 소리였으며, 오르간은 왕정과 가톨릭의 상징에서 벗어나 공화국의 이상을 담아낼 수 있는 음향 매체로 재인식되었다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장면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동시대 문헌은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를 역사적 사실로 단정하기보다는, 혁명기 음악가들이 급변하는 정치 환경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재정립해야 했던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서사로 이해하는 편이 타당하다. 2019년 인터뷰에서 노트르담 오르가니스트들은 혁명기 오르간이 살아남은 배경으로 〈라 마르세예즈〉 연주 전승을 언급했다.

Michael Cooper, “Notre-Dame Musicians Rejoice That Cathedral’s Organ Was Spared” (The New York Times, 2019년 4월 24일)
https://www.nytimes.com/2019/04/24/arts/music/notre-dame-organ-fire.html

예술적 변신과 생존의 맥락


노트르담 대오르간이 혁명기를 통과해 존속할 수 있었던 이유를 단일한 영웅적 결단으로 환원하기는 어렵다. 행정적 판단, 재산 분류의 변화, 실용적 고려 등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혁명기에도 오르간이 연주되었고, 때로는 새로운 정치 질서를 상징하는 곡들이 그 울림을 채웠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한 악기가 특정 체제의 상징에 머무르지 않고, 시대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담아낼 수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결국 노트르담의 대오르간은 파괴의 시대를 지나며 종교적 악기에서 공공적 상징으로, 그리고 오늘날에는 문화유산으로 의미를 확장해 왔다. 〈라 마르세예즈〉 연주에 관한 이야기는 그 극적인 변화를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상징적 일화로 남아 있다.


나폴레옹 대관식과 성당의 복권


제국적 무대로서의 노트르담


1804년 12월 2일,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은 혁명기 파괴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벽면은 그을려 있었고, 일부 조각상은 손상되었으며, 내부는 오랫동안 방치되어 황량한 상태였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éon Bonaparte)는 자신을 황제로 선포할 장소로 프랑스 왕들의 전통적 대관식 장소인 랭스 대성당(Reims Cathedral) 대신 파리의 노트르담을 선택했다. 이는 혁명의 중심지에서 새 질서를 선포하겠다는 정치적 의도이자, 구체제의 권위를 계승하면서도 이를 능가하겠다는 전략적 행보였다.


대관식을 앞두고 건축가 샤를 페르시에(Charles Percier)와 피에르 퐁텐(Pierre-François-Léonard Fontaine)은 성당의 파손된 외관을 가리기 위해 임시 구조물과 장식을 설치했다. 파사드와 내부의 거친 돌벽은 천막과 황금빛 장식으로 덮였고, 내부 공간은 고딕적 구조 위에 신고전주의적 장엄함을 덧씌운 ‘제국의 전당’으로 변모했다. 단 하루 만에 노트르담은 황량한 건축물이자 창고에서 제국적 무대이자 권력의 상징으로 탈바꿈했다.


임시 구조물과 장식


다비드의 회화와 권력 시각화


나폴레옹의 수석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는 이 장면을 거대한 캔버스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Le Sacre de Napoléon, 1807)에 담았다. 가로 9.7m, 세로 6.2m의 회화는 단순한 기록을 넘어 사건을 신화적 서사로 격상시켰다. 다비드는 실제 장면을 교묘히 재구성하여, 나폴레옹이 교황 비오 7세(Pius VII)의 손에서 왕관을 빼앗아 직접 머리에 쓰는 장면 대신, 황후 조제핀에게 왕관을 씌우는 장면을 강조함으로써 권위와 엄숙함을 시각적으로 강화했다.


회화 속 성당 내부는 화려한 조명과 붉은 벨벳, 금빛 장식으로 채워졌고, 고딕 구조물은 배경으로 밀려났다. 관람객과 사절, 제국 귀족들의 복식과 위치 배치는 권력과 정치적 질서를 강조한다. 다비드의 시선 속 노트르담은 중세 유물이 아니라 나폴레옹이라는 새로운 권력이 반사되는 장치로 재탄생한다.

Jacques-Louis_David_-_The_Coronation_of_Napoleon_(1805-1807).jpg 자크 루이 다비드 -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교황의 굴욕과 성당의 복권


대관식에서 교황 비오 7세의 참석은 형식적 의미에 그쳤다. 나폴레옹은 교황을 불러 신의 승인을 상징화했으나, 실제로는 자신의 권력을 강조하기 위해 교황 위로 손을 뻗어 스스로 왕관을 썼다. 이는 성당의 주인이 더 이상 신이 아니라 인간 황제임을 명시하는 행위였다.


그럼에도, 이 의식은 노트르담에 다시 국가적, 종교적 권위를 부여했다. ‘이성의 신전’으로 격하되었던 성당은 대관식을 통해 다시금 프랑스의 상징적 전당으로 자리 잡았으며, 이후 체계적 보수와 관리가 진행되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나폴레옹은 성당을 자신의 제국을 정당화하는 무대로 사용했지만, 그 과정에서 성당은 물리적 파괴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 다시금 국가의 보호를 받는 '성채'의 지위를 회복했다.


나폴레옹 대관식 음악


음악가와 편성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거행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éon Bonaparte)의 대관식은, 프랑스 역사상 종교적 의식과 정치적 권위가 결합된 음악 행사 중 가장 웅장한 사례로 평가된다.


당시 음악에 깊이 관여한 인물로는 프랑스 종교 음악의 권위자 장-프랑수아 르 쇠르(Jean-François Le Sueur)와 나폴레옹이 총애한 이탈리아 작곡가 조반니 파이지엘로(Giovanni Paisiello)가 있다. 르 쇠르는 프랑스 전통 의식 음악의 모테트 작곡가로서 대관식 의식에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으며, 파이지엘로는 이탈리아적 선율미와 극적인 오페라적 표현을 통해 당시 프랑스 음악계와 나폴레옹의 취향을 결합했다.


대관식 음악은 여러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대오르간이 함께 동원된 대규모 연주로 전해진다. 후기 음악사 저술에서는 약 400여 명 규모의 연주가 동원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는 후대 재구성에 따른 수치일 가능성이 크다. 당시 연주에서는 두 개의 오케스트라와 여러 합창단, 그리고 대오르간이 결합되어 입체적 음향을 창출했으며, 각종 축하 의식 음악과 전례 음악이 복합적으로 배치되었다는 점이 일관되게 전해진다.


의식별 연주곡


의식은 먼저 교황 비오 7세가 성당에 입장할 때 르 쇠르의 모테트 〈Tu es Petrus〉가 연주되며 시작되었다. 이 곡은 교황의 입장과 함께 성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하는 역할을 했다.


미사 본곡에서는 파이지엘로의 편곡판 미사 오디너리가 사용되었다. 이 곡은 전통적인 성가와 결합되어 연주되었으며, 현장에서 즉석으로 편곡이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있다. 이어지는 성유 도유식에서는 르 쇠르가 작곡한 〈Unxerunt Salomonem〉이 연주되며, 나폴레옹과 조제핀의 안수 의식을 장엄하게 장식했다. 대관 의식에서는 르 쇠르의 〈Accingere gladio〉가 연주되었는데, 이 곡은 샤를마뉴의 왕관과 검을 제시하는 순간을 음악적으로 강조한 작품이었으나, 현재 일부 악보는 분실된 상태다.


대관 후에는 전통 찬미곡 〈Te Deum laudamus〉가 사용되어 제국적 축하의 분위기를 더욱 강화했다. 마지막 클라이맥스에서는 아보 로제(Abbot Roze)가 작곡한 〈Vivat in aeternum〉이 울려 퍼지며 즉흥적 황제 찬가로 군사적, 제국적 위엄을 강조했다. 이처럼 대관식 음악은 각 의식과 상황에 맞춘 다양한 모테트와 성가, 그리고 제국적 축하 음악이 체계적으로 결합된 형태로 연주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프로그램은 악보와 1차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으며, 후대 문헌과 음악사적 추정을 기반으로 한 재구성이다.

출처: 나폴레옹 제단
https://www.napoleon.org/en/history-of-the-two-empires/articles/the-music-at-the-coronation-of-napoleon-and-josephine/

르 쇠르 - Tu es Petrus

르 쇠르 - Unxerunt Salomonem

아보 로제 - Vivat in aeternum

성당의 광활한 공간과 긴 잔향은 이러한 대규모 음악을 가능하게 한 중요한 환경이었다. 고딕 건축의 거대한 석조 구조 속에서 합창과 관현악, 오르간 소리가 서로 어우러지며 성대한 음향적 효과를 창출했다. 이는 단순히 전례적 기능을 넘어, 제국의 권위를 시청각적으로 드러내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1804년 대관식 음악은 이후 19세기 음악사에서도 중요한 전통적 기반이 된다. 후기 낭만주의 시대대규모 합창관현악 편성은 이러한 제국적 규모의 음향 전통을 계승하며 발전하였다. 엑토르 베를리오즈(Hector Berlioz) 같은 작곡가들이 거대한 진혼곡서사적 작품을 발표할 수 있었던 것은, 나폴레옹 시대부터 이어진 '거대 음악적 공간' 전통의 연장선에서 가능했다.


기록 부재와 후대 재구성


대관식 음악은 당시 프랑스에서 유례없는 규모와 화려함을 자랑했지만, 현재 남아 있는 악보와 기록은 매우 제한적이다.


첫째, 상당 부분 기존 전례 음악모테트를 활용하여 구성되었다. 입장 음악으로 연주된 〈Tu es Petrus〉와 대관 찬미 〈Te Deum laudamus〉, 미사 본곡의 미사 오디너리 등은 당시 성가 전통과 연계되어 있었다. 루이-뤼크 루아조 드 페르쉬스(Louis-Luc Loiseau de Persuis)의 지휘 아래 연주자와 합창단은 성당의 음향과 행사 진행에 맞춰 실시간으로 조율하며 연주했으며, 일부 곡은 즉흥적 편곡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둘째, 나폴레옹 제국의 붕괴기록 파괴가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1815년 워털루(Waterloo) 패전 이후 왕정 복고 시기에는 제국 관련 문서가 조직적으로 폐기되었고, 나폴레옹과 제국을 찬양하는 자료는 “반역 문서”로 분류되어 음악 악보도 함께 소실될 가능성이 높았다.


셋째, 성당 음악의 특성상 구전 중심 전승 문화가 일반적이었다. 19세기 초 성당에서는 오케스트라 파트가 임시 필사본으로 제공되거나 즉석에서 배포되었고, 합창 파트는 지휘자가 암기하거나 현장에서 나누어 연주했다. 단발성 행사였던 대관식에서는 악보 보존이 우선순위가 낮았다.


후대 연구와 재구성 과정에서 규모와 구성이 과장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1820~30년대 회고록에는 연주 인원을 약 400명으로 기록했지만, 실제 참여자는 200~300명 수준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르 쇠르의 모테트 작품만 구체적 기록으로 남아 있으며, 나머지 오케스트라와 합창, 즉흥 편곡의 대부분은 후대 추정과 재구성을 통해 복원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1804년 대관식 음악은 실시간 조율, 즉석 편곡, 구전 전승, 정치적 기록 파괴 등 여러 요인이 겹쳐 악보와 구체적 자료가 거의 남지 않았으며, 후대 연구자들은 이를 종합해 규모와 구성, 음향적 특징을 재구성할 수밖에 없었다.


제국의 음향이 남긴 유산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울려 퍼진 대관식 음악은 혁명으로 훼손된 성당의 권위를 제국적 권위와 결합하는 효과를 발휘했다. 나폴레옹은 성당을 자신의 정치적 무대로 삼았지만, 그 덕분에 노트르담은 최고의 음악가들이 참여하고 대규모 연주가 가능한 장소로 다시 부활했다. 이를 통해 성당은 단순한 종교 공간을 넘어, 제국적 권위와 문화적 위상을 동시에 상징하는 장소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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