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한 스푼, 푸념 한 스푼
모든 예술을 종합해 보아도, 유일하게 음악, 특히 악기 연주자는 완전한 창조를 하지 못한다.
화가는 그림을 그리고, 조각가는 작품을 조각하고, 시인은 시를 쓰지만, 작곡가는 작곡을 하고도 연주되지 않으면 아무도 그 음악을 들을 수 없다.
요리사조차도 요리를 하면 맛보고 향을 맡을 사람이 있는데.
음악은 그래서 참 특이하다.
연주자는 작곡가가 악보에 적어 놓은 의도를 다시 재해석하여 전달하는 전달자이자 통역사 역할을 한다.
때로는 의역처럼, 자신의 생각을 조금 덧붙이거나 해석을 가미할 수도 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반쪽 창작자, 심하면 그보다도 못한 존재다.
클래식을 벗어나거나, 바로크 시대처럼 작곡가가 직접 연주를 한다면 달라지겠지만, 연주자가 직접 연주할 수 없는 악기의 경우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결국, 연주자가 순수 창작자가 되려면 직접 곡을 쓰거나 즉흥연주를 해야 한다.
대학에서 Artistic Research 같은 예술 연구 분야의 Ph.D., 즉 Doctor Art. 과정에서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야 한다.
단순히 분석하거나 기존 작품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창작 자체가 연구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이 과정을 지원하는 사람들의 99%가 작곡가다.
특히 컴퓨터 음악, 프로그램 알고리즘, 소프트웨어 개발자들.
그렇기에 이 과정의 책임자들도 대부분 작곡가다.
그래서 악기 연주자가 지원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Doctor Art. 과정에서 요구하는 것은 새로운 작품, 형식, 방법론의 개발이다.
그런데 악기 연주자로서는 이게 쉽지 않다. 이유는 간단하다.
연주자는 본질적으로 해석자이기 때문에 작곡가가 만든 악보를 연주하는 역할이 핵심이고, 연주자는 창작의 대부분을 작곡가에 의존한다.
기존 클래식 곡을 연주하는 것만으로는 연구적 새로움을 충족할 수 없다. 즉흥연주나 자신만의 곡 창작, 혹은 연주 환경·형식의 혁신 같은 방법을 찾아야 한다.
윗대가리들 조차 연주자에게 “새로운 것을 만들어라”라고 요구하면서, 작곡이나 즉흥연주를 제외한 다른 방법은 제시하지 못한다.
결국 악기 연주자 입장에서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즉흥연주, 독창적 퍼포먼스, 멀티미디어 결합 같은 연주 형식의 혁신 정도가 그나마 가능한 방법이다.
물론, 대중음악이나 즉흥연주를 비난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전자음악이 없던 시절, 작곡가는 곡이 연주되지 않으면 종이와 잉크를 낭비하는 무쓸모한 직업이었다.
요즘 예술계의 트렌드는 다분야, 즉 분야를 넘어선 통합적 접근이다.
오페라나 발레처럼 여러 예술이 결합된 종합예술을 포함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런 개념보다 비주얼 아트, 소리와 영상의 조화 같은 새로운 시도가 주류다.
작곡가들조차 단순히 작곡만 하지 않고, 미대에서 영상 제작을 배우는 경우가 늘고 있다.
협업보다 스스로 완성하는 것이 더 편리하기 때문이다.
분야를 넘어선 통합적 접근은 자연스럽게 새로운 형식의 공연을 탄생시킨다.
그동안 없었던 새로운 시도들.
새로운 연주 형식에 관한 세미나에서 소개된 사례들 중 일부를 들자면,
코로나 시절 공연장에 올 수 없는 상황에서 영상 송출 플랫폼을 통한 라이브 공연
빈 공연장에 식물을 배치하고 연주
들판에서 현악 사중주를 연주하며 자연과 상호작용
아이디어 중에는 신선한 것도 있었지만, 정말 말도 안 되는 것도 있었다.
최근에는 이런 새로운 연주 형식을 유럽 각국 정부가 지원하기 시작했다.
50% 이상의 지원 비중을 차지한다는 통계도 있다.
문제는 심사 과정이다. 물론 나름대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앉아서 심사를 하겠지만, 예술계 특성상, 결국 지식구 챙기기가 이루어진다.
세미나에서 알려준 새로운 연주 형식 개발 방법은, 연주를 위해 고려해야 할 다양한 파라미터, 즉 장소, 시간, 요일, 날짜, 관객, 관객과의 상호작용 등을 재검토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왜 연주는 꼭 주말 저녁에만 열려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품고, 연주 시간을 일요일 새벽 2시로 바꿔보았다.
그 결과, 젊은이들은 클럽에 놀러 가야 하는 시간에 공연이 잡히면 불만이었지만, 놀고 난 뒤 연주를 보러 갈 수 있어 반응이 오히려 좋았다고 한다.
개풀 뜯어먹는 소리였다.
또 한 가지 가장 황당했던 사례가 있다.
예를 들어 소개된 연주는, 고딕 성당처럼 높지는 않지만 제법 큰 교회에서 진행됐다.
교회의 모든 의자를 뜯어내고 텅 빈 공간으로 만든 뒤, 청중은 교회 중앙에 큰 원을 그리며 앉았고, 연주자는 중앙에서 바이올린으로 바흐의 파르티타를 연주했다.
연주는 중간중간 끊기면서 전자음악이 끼어들고, 원 밖에서는 두 명의 댄서가 춤을 추었다.
교수는 장소 자체, 청중이 전통적인 방식이 아니라 원형으로 앉았다는 점, 그리고 전자음악과 무용이 결합된 방식에서 신선함을 강조하며 예로 들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바로 반문을 했다.
“존 케이지의 4분 33초는 새로운 연주 형식인가?
관객과의 상호작용이 있고, 그 곡에서의 음악은 그 자리에서 발생하는 모든 소리이기 때문이다.”
70년 전 작품이 과연 새로운 연주 형식에 포함될 수 있는가?
교수는 답하지 않았다. 못한 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피한 것이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 질문했다.
루이지 노노의 "La lontananza nostalgica utopica futura"다.
바이올린 솔로지만, 보면대 10개가 필요하고 공간에 무작위 배치된다.
그중 6개의 보면대에만 악보가 올라가 있고, 노노가 미리 녹음한 8개의 파일을 라이브로 믹싱 하여 8개의 스피커로 송출한다.
사운드 엔지니어는 한 명의 연주자처럼 소리를 조정하고, 송출 스피커 위치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다.
연주자는 곡 중간중간 공간을 돌아다니며, 한 보면대에서 다른 보면대로 이동한다.
계단을 오르내리며, 멈추기도 하고 되돌아오기도 하며, 모든 것이 자유롭다.
이미 1989년에 만들어진, 거장의 작품이 존재하는데, 세미나에서 들은 예와 본질적으로 차이가 전혀 없다.
이것 또한 새로운 연주 형식이 아닌가? 이미 이런 작품들이 존재하는데 당신이 얘기하는 예가 과연 새로운 연주 형식이냐고 물었더니, 또 답을 피했다.
직접 연주까지 했기 때문에 누구보다 그 곡을 잘 알고 있었기에 질문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이것이 현실이다.
저들이 얘기하는 새로운 연주 형식이란, 우리가 흔히 말하는 클래식 음악을 하면서 그동안 그들이 겪어보지 못한 신선한 짓을 하라는 것이다.
바하나 모차르트를 연주하면서 가발 쓰고 춤추는 정도만 해도 새로운 연주 형식이라고 할 것이다.
다른 연주자들에게 케이지나 노노의 이야기를 들려주면, 다들 그게 무슨 소리냐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라며 화를 낸다.
결국 저들에게 새로운 연주 형식이란, 클래식 음악을 하면서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자기들에게 신선한 짓을 하라는 의미에 불과하다.
연주자와 탁상행정 사이의 괴리와 간극은 그야말로 극명하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언젠가부터 작곡가들은 혁신이 없고 자신들이 만든 틀 안에 갇힌다. 그뿐만 아니라, 남들의 혁신적 시도마저 막는다.
윗대가리들은 연주자에게 혁신을 요구한다.
아무도 이 괴상한 논리에 토를 달지 않는다.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인가.
분야를 넘어선 통합적 접근은 아주 중요한 개념이다.
이것이 내가 알쓸별잡 시리즈를 좋아하는 이유다.
서로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이 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다 각 분야로 넘어가고, 다시 연결하는 과정이 너무 보기 좋았다.
예술계에서도 이런 통합적 접근을 원한다고 하지만, 실제 하는 짓을 보면 그다지 원하지 않는 것 같다.
아는 척 시리즈를 시작하게 된 계기도 어찌보면 같은 이유다.
음악적 분석은 개나 소나 다 할 수 있다.
수도 없이 널린 게 검증도 안된 조잡한 논문들이다.
90%의 석사논문이 개소리의 향연이고, 박사 논문의 절반은 종이를 낭비하는 환경 오염의 주범이다.
다른 분야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이해해야 발전이 가능하다.
이론 분석보다 중요한 것은 융합적 사고와 새로운 시도다.
개소리도 여러 분야에 통달해서 하는 개소리가 더 멋있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