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음악사 시대 구분의 딜레마 아는 척 하기 (2편)

후대 비평가가 만든 음악사

by 돈 없는 음대생

음악사 시대 구분의 구조적 모순은, 그 명칭들이 당대 작곡가나 시대 스스로의 자기규정이 아닌 후대 역사가와 비평가들의 주관적 판단과 때로는 정치적 의도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서양 음악사의 핵심적인 시대 구분인 ‘바로크’와 ‘고전주의’는 모두 후대의 시각에서 붙여진 이름이며, 그 탄생 과정 자체가 시대 구분의 객관성 결여와 자의적 기준을 보여준다. 이러한 자의성은 시대의 경계가 예술적 흐름을 따라 설정되는 것이 아니라, 비평가의 관점과 사조적 이해관계에 따라 임의로 결정되었음을 의미한다.




후대 비평가 중심의 명명


바로크(Baroque)’라는 명칭은 18세기 계몽주의자들이 이전 시대의 과도하고 불규칙한 예술을 비판하기 위해 사용한 포르투갈어 Barroco(일그러진 진주)에서 유래한다. 즉, 시대를 정의하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 아니라, 계몽주의적 미학 기준에서 과거의 음악을 ‘이상하고 기형적’으로 평가하려는 부정적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음악사에서 바로크 시대의 시작과 끝을 설정하는 방식은 이러한 기원과 결합되어 시대 구분의 모호성을 보여준다. 바로크의 시작은 1600년경 이탈리아에서 등장한 오페라와 모노디(Monody), 통주저음(Basso Continuo) 같은 혁신적 양식적 변화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종말은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J.S. Bach)의 사망(1750)이라는 특정 작곡가의 생애 사건을 기준으로 잡는다. 실제로는 이미 1730년대부터 바흐의 아들들(C.P.E. Bach 등)이 추구한 갈랑 양식(Style Galant)과 감정과다 양식(Empfindsamer Stil)이 유럽 전역에서 확산하며 고전주의로 이어지는 과도기적 흐름이 진행되고 있었다. 따라서 1750년이라는 경계는 음악적 변화와 무관하게 후대 역사학자들이 상징적 사건을 근거로 임의로 설정한 것이다.


고전주의(Classicism) 역시 당대 사람들이 스스로를 고전주의자라고 부른 것은 아니었다. 이 명칭은 19세기 낭만주의 비평가들의 관점에서 붙여진 이상화된 이름이었다. 낭만주의자들은 자신의 감정적 표현과 자유로운 형식 실험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전 시대의 하이든, 모차르트, 초기 베토벤의 음악을 ‘완벽한 균형과 명확한 형식, 순수한 이성’을 갖춘 이상적 예술로 바라보았다. 이렇게 이상화함으로써 자신들의 기존 형식 파괴와 확장이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 정당한 혁신으로 보이도록 만든 것이다. 그러나 실제 고전주의 음악은 소나타 형식의 발전이 일정한 틀에 맞춰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고, 오페라, 교향곡, 실내악 등 다양한 장르에서 각기 다른 실험과 변화를 보여주었다. 결국 낭만주의자들의 단일한 기준은 고전주의 음악의 다층적이고 복잡한 실상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이며, 이는 시대 구분이 후대 비평가의 시각에 얼마나 크게 좌우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중세 천년사의 획일화


이러한 주관적 명명의 아이러니를 넘어, 시대 구분의 더 깊고 고질적인 문제는 천년 단위의 시간을 단일한 범주로 묶는 행태에서 드러난다. 후대 중심 명명의 한계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는 중세(Medieval, 약 450~1450년)다. 중세 음악사는 방대한 천년의 역사를 ‘중세’라는 하나의 범주로 묶어, 음악적 변화와 다양성을 단순화했다. 이 단일화는 낭만주의 시대가 약 100~150년의 기간만 다루는 것과 비교해도, 얼마나 과도하고 부당한지 명확하다.


중세 천년 동안 음악은 결코 정체되지 않았다. 오히려 음악사에서 근본적인 혁명들이 일어났다. 초기 로마네스크 시대의 엄격한 단선율 성가(Plainchant)에서 출발하여, 9세기경 등장한 오르가눔(Organum)은 수평적 음악적 사고를 열었고, 12세기에는 파리의 노트르담 악파(Notre Dame School)에서 레오닌과 페로틴이 리듬 선법(Rhythmic Modes)을 확립하며 음악적 복잡성을 크게 향상시켰다. 이 시기에는 이미 양식적으로 뚜렷한 아르스 안티쿠아(Ars Antiqua)의 특징들이 나타났다.


14세기에는 필립 드 비트리(Philippe de Vitry)의 선언과 함께 아르스 노바(Ars Nova)가 등장하며, 박자와 리듬을 자유롭게 다루는 혁신적 기보법이 도입되었다. 기욤 드 마쇼(Guillaume de Machaut)와 같은 작곡가들은 이전 시대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복잡한 다성적 구조와 세속 음악의 발전을 이끌었다. 이렇게 중세 천년은 리듬, 화성, 형식, 기보법 등에서 르네상스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기초를 마련하며, 음악적 변화와 발전의 연속성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사가들이 중세를 단일 범주로 묶은 이유는 자료의 희소성과 교육적 편의성 때문이다. 방대한 시간과 넓은 지리적 범위에 걸친 자료를 학문적으로 분류하고 연구하는 어려움을 단순히 ‘중세’라는 모호한 범주 안에 가두어 회피했다. 이러한 단일화는 내부의 변화와 다양성을 무시하고 학문적 편의를 우선시한 결과이며, 이후 시대 구분에도 영향을 미쳤다. 음악사는 유기적 흐름 대신 후대 비평가들의 자의적 기준으로 형성된 학문적 틀 속에서 출발하게 되었다.




당대 작곡가의 자기 선언과 양식 형성


그러나 시대와 양식이 모두 후대 비평가의 판단으로 결정된 것은 아니다. 당대 작곡가들이 스스로 자신의 음악적 접근을 규정하거나, 기존 양식을 의도적으로 계승, 모방함으로써 자기 선언적 양식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Stile Antico(고전 양식)과 14세기 아르스 노바(Ars Nova)이다.


르네상스 후기 바로크 초기에 많은 작곡가들은 자신들의 작품을 ‘Stile Antico’로 규정하며, 16세기 폴리포니 전통을 의식적으로 계승했다. 예를 들어 조반니 팔레스트리나(Giovanni Pierluigi da Palestrina)는 미사와 모테트에서 Stile Antico를 사용하여 고전적, 규범적 폴리포니를 구현하였다.


14세기 아르스 노바(Ars Nova) 역시 필립 드 비트리기욤 드 마쇼 등 작곡가들이 자신의 음악적 정체성을 선언하며 새로운 리듬과 기보법을 도입한 사례로, 당대 작곡가가 스스로 양식을 규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18세기 후반 고전주의 초기 작곡가들도 때때로 자신의 음악을 '갱신된 바로크' 혹은 특정 학파적 양식으로 정의하며, 당대의 미학적 기준과 구별되는 자기 정체성을 부각했다. 이러한 사례들은 시대와 양식의 구분이 반드시 후대 비평가의 시각에 의해 결정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즉, 음악사의 시대와 양식 구분은 후대 비평가의 명명뿐 아니라, 당대 작곡가들의 자기 선언적 선택을 통해서도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시대 구분을 보다 다층적이고 유기적인 구조로 이해하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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