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를 넘어선 감각의 영역

삶을 이식하는 시뮬레이터

by 무학의통찰

작가는 모름지기 글을 많이 읽어야 하며 영감의 원천은 활자여야 한다는 명제가 있다. 이 고전적인 문법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동시에 작가를 안주하게 만드는 함정이기도 하다. 타인이 이미 소화해 낸 결과물을 다시 씹어 삼키는 행위에만 매몰될 때, 글은 자칫 생명력을 잃고 '활자의 근친상간'에 빠지기 때문이다. 영감이란 본래 정제된 문장이 아니라, 날것의 감각이 뇌를 직접 타격할 때 폭발한다.


세상을 받아들이는 수많은 감각 수용체 중, 나는 현대 작가에게 단연 돋보이는 도구로 '콘솔게임'을 꼽는다.


책이 삶을 설명하고 영화가 삶을 보여준다면, 게임은 삶을 이식한다. <레드 데드 리뎀션 2>를 플레이하며 나는 주인공 아서 모건과 완벽하게 동화되는 경험을 했다. 서부의 황혼이 저물어가는 들판에서, 병마에 시들어가는 그의 거친 숨소리는 스피커를 넘어 내 폐부로 스며들었다. 컨트롤러의 진동은 단순한 신호가 아니라, 죽음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필멸자의 맥박이었다. 어떤 매체가 이토록 선명하게 '죽어가는 법'을 체감하게 할 수 있을까. 나는 글자를 읽는 대신, 한 남자의 생애를 내 근육과 감각에 직접 새겨 넣었다.


할리우드 키드로서 품었던 오랜 로망 역시 게임이라는 수용체를 통해 비로소 실현되었다. <언차티드>의 네이선 드레이크가 되어 무너지는 기차를 기어오를 때, 나는 관찰자가 아니라 모험 그 자체가 되었다. 시리즈의 마지막, 모든 풍파를 뒤로하고 평온한 일상을 맞이한 주인공이 과거의 흔적을 보며 짓는 미소는 나에게 단순한 엔딩 그 이상이었다. 그것은 뜨거웠던 젊은 날을 지나온 중년의 내가 나 자신에게 보내는 긍정과도 같았다. 관찰만으로는 도저히 닿을 수 없는, '체험자'만이 느낄 수 있는 일체감이었다.


게임은 때로 우리를 가장 밑바닥의 결핍으로 밀어 넣으며 실존을 묻는다. <데이즈 곤>의 밤길, 오토바이 기름이 떨어져 도로 한복판에 멈춰 섰을 때의 그 긴박한 당혹감은 압권이었다. 모든 것이 안전하게 픽스된 현실의 도로와 달리, 가상의 도로는 살벌한 생존의 전장이었다. 좀비의 비명과 들개의 하울링 사이에서 기름 한 칸을 구하기 위해 폐가를 뒤지는 사투는, 현대 사회가 제거해 버린 생존 본능을 일깨웠다. 결핍이 극대화될 때 비로소 '내가 지금 여기 살아있음'이 선명해지는 역설을, 나는 게임이라는 가장 현대적인 도구를 통해 배웠다.


일본의 서브컬처가 세계를 지배하는 방식 또한 체험을 통해 목격했다. <고스트 오브 쓰시마>와 <세키로>가 보여준 압도적인 미장센은 논리가 아닌 감각의 폭력이었다. 흩날리는 단풍잎 속에서의 결투, 칼과 칼이 부딪칠 때 터지는 불꽃과 패링의 손맛. 이것은 활자가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포장의 기술'이자 '미학적 설득'이다. 직접 칼을 휘둘러보지 않고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그 싸늘한 아름다움이 게임이라는 그릇에 담겨 있었다.


물론 활자가 지닌 고유한 가치와 그 질서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작가에게 독서는 건너뛸 수 없는 필수적인 '기본 베이스'다. 게임을 통해 아무리 밀도 높은 체험을 이식받았다 해도, 그것을 유려하게 풀어내어 독자의 심장에 꽂는 능력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활자의 바다에서 문법을 연마하고 단어를 고르는 일은 단순히 지식을 쌓는 과정이 아니라, 내 몸에 새겨진 그 거대한 전율을 타인에게 납득시키기 위한 기술적 훈련에 가깝다.


결국 작가는 활자라는 플랫폼을 통해 독자와 대면한다. 내가 게임 속에서 목격한 그 숱한 삶의 비명과 통찰을 '단단한 문장'이라는 그릇에 담아내기 위해, 나는 다시 정적인 활자의 세계로 돌아와 문장을 벼린다. 체험이라는 최고의 재료를 언어라는 정교한 수단으로 번역해 내는 것, 그 두 세계를 자유롭게 오가며 나만의 항해도를 그려나가는 것이야말로 독자를 마주하는 작가가 짊어져야 할 본질이자 축복이다.


#작가

#게임인문학

#글쓰기훈련

#플레이스테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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