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세기. 십자군의 의료행위라는 것은 그야말로 야만의 극이었다. 썩어가는 살점 위로 성수를 뿌리며 악마를 쫓던 유럽 의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무딘 도끼로 감염된 다리를 단번에 끊어내는 도축업자식 투박함이 전부였다. 비명은 길고 처절했으나 기도는 짧았다. 반면 마주한 아랍의 천막 안은 고요함이 지배했다. 아편을 적신 스펀지가 비명을 잠재우고, 독한 증류주가 상처를 씻어내던 정적. 동물의 창자를 꼬아 만든 실(Catgut)로 찢어진 피부를 한 땀 한 땀 기워내던 그 서늘한 감각을 상상할 때면, 내가 배워온 ‘문명’이라는 단어의 무게가 한없이 가볍게 느껴진다. 승자는 펜을 들어 주인의 얼굴에 ‘야만’이라는 딱지를 붙여 무대 뒤로 밀어냈지만, 무대의 구석에는 여전히 이름을 잃은 아랍의 지혜가 무겁게 가라앉아있다.
유럽이 암흑기를 헤매던 시절,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문장을 지켜낸 것은 바그다드 서고의 사서들이었다. 이들이 낡은 양피지 위로 아랍어를 꾹꾹 눌러 담으며 지식을 옮겨 적지 않았다면, 르네상스의 시작점 자체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럽은 그 서고에서 가져온 생각들로 제국의 기반을 닦고서도, 지식에 붙어 있던 원래 주인들의 이름은 악착같이 떼어냈다.
이것은 명백한 정체성의 탈취였다. 500년 넘게 유럽 의대생들이 밑줄을 그어가며 읽던 『의학정전』의 저자 이븐 시나는 '아비센나'로, 끊겼던 그리스 철학의 맥을 다시 이어 서구 합리주의 사유의 기초를 세운 이븐 루슈드는 ‘아베로에스’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제자가 주인이 되기 위해 스승의 얼굴을 라틴어로 매끄럽게 고쳐버린 이 창씨개명 덕분에, 우리는 오늘날 제자가 남긴 장물을 상식이라 부르며 쓰고 있다. 일상 곳곳에 박힌 알코올(Alcohol)과 알고리즘(Algorithm) 알칼리(Alkali)의 ‘알(Al-)’이라는 표식은 단순히 언어의 조각이 아니다. 그것은 빼앗은 전리품에 남은 서명이자, 지식의 영토를 뺏긴 자들의 선명한 흉터다.
한편 유럽의 활자기가 지식을 전단지처럼 찍어낼 때, 아랍은 과거의 완벽함에 취해 펜을 놓지 않았다. 신성한 글자가 차가운 기계에 박히는 것을 견디지 못한 그 완고한 자존심은 문명의 발목을 잡는 덫이 되었다. 지식의 고결함을 따지다 지식의 속도를 놓쳐버린 셈이다. “더 이상의 질문은 없다(Taqlid)"며 스스로 이성의 문을 닫아버린 순간, 거인은 제 손으로 감각을 잘라내고 스스로 박제가 되는 길을 택했다.
문명이 멈춰 서 있는 사이, 유럽은 스승에게 배운 항해술로 스승의 유일한 밥줄이었던 실크로드를 끊어버렸다. 대륙을 돌아가는 바닷길을 찾아낸 제자들은 더 이상 스승의 앞마당을 지나지 않았고, 문명의 핏줄이었던 중계무역의 부는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한때 세계 무역의 중심지를 퇴락한 어촌으로 몰락시키는 과정은 유럽이 제국으로 성장하기 위한 필수적인 파괴였다. 게다가 무너진 폐허 위에서 뒤늦게 터져 나온 석유는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었다. 폭주하던 열강들이 그 기름진 과실을 원주민들과 나눌 리 없었기 때문이다. 인류의 도서관이었던 곳은 그렇게 세계의 주유소로 내려앉았다. 생각하는 능력을 빼앗긴 거인에게 던져진 석유라는 마취제는, 그들을 사유하는 주체가 아닌 자원을 공급하는 부품으로 만들며 영원히 과거의 영광이라는 꿈 속에 가두어버렸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용광로 옆에서 살점이 다 타버리지 않고 이름을 악착같이 지켜온 우리의 ‘독기’가 오버랩된다. 위태로움이 만든 예민한 주권 감각이 우리를 살렸다면, 너무 오랫동안 세상의 태양이었던 아랍의 ‘방심’은 결국 그들을 스스로 무너뜨렸다. 문명이 너무나도 찬란했기에 자신의 이름을 빼앗길 거라곤 감히 의심하지 않았고, 그 오만함은 결국 자신의 유산을 누리는 후대조차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게 만드는 비참함으로 돌아왔다.
나는 이제 내 책상 앞의 세계지도를 다시 본다. 자로 잰 듯 반듯하게 그어진 국경선을 보며 이 부자연스러움을 상식으로 믿게 만든 역사의 승자들을 생각한다.
이 위화감 가득한 지도 위에서, 나는 여전히 이름이 세탁된 단어들과 몰락한 아랍의 어느 항구와 펌프잭 옆을 무심히 지나는 베두인의 낙타 행렬을 본다. 그리고 이 지도 위에서 당신은 아랍이 아닌 어느 곳의 비명을 듣고 있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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