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금 없는 낙원, 권리 없는 식객

by 무학의통찰

#주유소에서 확인한 지분

주유기 노즐을 타고 전해지는 진동이 손바닥을 툭툭 친다. 탱크가 차오를수록 계기판의 숫자는 경쾌하게 올라가고, 내 카드 한도도 주유기의 숫자만큼 쭉쭉 빠진다. 리터당 가격의 절반이 세금이라는 사실을 영수증으로 확인할 때면 입안이 쓰다. 하지만 이 불쾌한 지출에 저항할 수는 없다. '납세'라는 의무와 이 종이 한 장이 내가 국가라는 공동체의 지분을 가진 주인이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물이기 때문이다.


#종교보다 강력한 공짜밥

나는 오랫동안 중동의 정체가 신정일치 때문이라고 믿었다. 경전의 문구에 갇혀 근대를 거부하는 완고함이 그들을 멈춰 세운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수많은 이유 중 하나일 뿐 유일한 이유는 아니었다. 그들을 침묵하게 만든 건 기도문이 아니라 ‘세금 없는 복지’라는 달달한 뇌물이었다. 민주주의는 열사의 피도 먹지만, 주로 먹는 것은 사실 시민의 성실한 세금이다. 피는 망치가 되어 문을 부수지만, 세금은 그 문이 다시 잠기지 않게 매일 치르는 지루한 유지비인 셈이다. 세금이 사라진 자리에 신의 목소리는 커졌으나 인간의 권리는 쪼그라들었다.


#노르웨이가 스스로 채운 족쇄

노르웨이는 영악했다. 1971년, 기름이 터지자마자 그들은 ‘석유 10 계명’이라는 법적 족쇄를 스스로 채웠다. 기름으로 번 돈의 원금은 단 한 푼도 국내에 풀지 않고 전 세계 주식과 채권에 투자해 격리하는 금욕을 발휘했다. 국민에게는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의 세금을 걷어 정부를 향한 분노 및 감시의 끈을 놓지 않게 만들었다. 복지는 통치자의 하사가 아니라 내가 낸 세금에 대한 당당한 배당금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잊지 않았다. 이 인정머리 없는 설계의 뒤편에는 이방인의 경고가 있었다. 이라크 출신의 지질학자 파루크 알 카심은 노르웨이 정치인들에게 말했다. “석유는 당신들을 폭군으로, 국민을 식객으로 만들 것이다.”


#새똥 위에 쌓은 바벨탑

남태평양의 작은 섬, 나우루의 비극은 산더미처럼 쌓인 새똥에서 시작되었다. 수천 년간 쌓인 새똥이 고급 질산비료의 원료인 인광석으로 변하자, 나우루는 단숨에 1인당 국민소득이 미국을 앞지르는 부국이 되었다. 세금은 폐지되었고 국가는 집과 차, 매달 수천만 원의 생활비를 거저 줬다. 모든 노동은 외국인들이 대신했다. 나우루 사람들은 일하는 법을 잊고 수입 통조림과 설탕에 절여진 채 집안에 머물렀다. 30년 후 새똥이 바닥나자 섬은 구멍 뚫린 폐허가 되었고, 주민들은 전 세계 비만율 1위와 당뇨병이라는 유산을 물려받았다. 주권의 근육을 쓰지 않은 대가는 경제적 파산보다 무거운 신체적 퇴화였다. 스스로 밥 벌어먹는 법을 잊은 식객에게 남은 것은 식당이 문을 닫을 날짜를 기다리는 무력함뿐이었다.



#배고픔이라는 모멘텀

나우루가 공짜 밥에 길들여져 서서히 소멸해 가는 식객의 자화상이라면, 이란은 석유아편이 강제로 끊겼을 때 중독자가 겪는 지독한 금단현상을 보여준다. 1979년 혁명 이후 이란은 만성적인 제재 속에서도 석유 자본을 통한 대규모 보조금으로 국민의 입을 막아왔다. 하지만 2018년 미국의 핵 합의 파기로 원유 수출길이 막히며 이란판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다. 국가 재정이 고갈되어 빵값과 연료비 보조금이 끊기자, 그동안 체제를 지탱하던 아편의 효능도 사라졌다. 이란 시위가 유독 과격하고 끈질긴 모멘텀은 바로 이 지점, 즉 공짜 복지가 사라지고 닥쳐온 생존의 공포와 배고픔에서 나온다. 배가 고파지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들이 주방장의 시혜에 목매던 식객이었음을 깨닫고, 밥상을 엎을 주권자로 각성한 것이다.


#포트홀과 찌그러진 홀을 컴플레인할 수 있는 권리

나우루와 이란의 비극은 복지 그 자체가 독이라는 뜻이 아니다. 문제는 그 재원이 ‘나의 지갑’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데 있다. 국가가 세금을 걷지 않고 자원에 기댄 대책 없는 100% 무상복지를 뿌리는 순간, 그것은 복지가 아니라 시민의 눈과 귀를 가리는 마약이 된다. 내가 낸 세금으로 누리는 무상 교육과 의료는 주권자의 당당한 지분이지만, 거저 주어진 자원으로 얻어먹는 공짜 밥은 나를 비굴한 식객으로 전락시킨다. 내가 아스팔트 위의 포트홀을 밟고 핏대를 세우며 구청에 전화를 걸 수 있는 건, 내가 그 길의 유지비를 지불한 주인이라서다. 만약 그 길이 국가가 내게 준 ‘공짜 선물’이었다면, 나는 찌그러진 휠을 보며 그저 침묵해야 했을 것이다.


#메뉴판을 고치는 주인, 반찬 타령만 하는 식객

우리는 종종 국가가 베푸는 혜택의 양에만 집착하며, 그 혜택을 요구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지는 잊어버린다. 도망갈 곳이 없는 국가라는 운명 공동체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의무 없는 무조건적 복지에 취해 주권의 의무를 잊는 것이다. 내 지갑에서 나가는 악랄한 세금만이 내가 시스템의 심장을 건드리고, 주방장의 멱살을 잡고 메뉴를 바꾸라고 명령할 수 있는 '지분'을 보장한다. 그저 공짜로 차려진 밥상 앞에서 반찬 투정이나 하는 ‘식객’은 식탁의 메뉴를 누가 정하고 이 식당이 언제 헐릴지를 결정하는 청사진에는 결코 손대지 못한다. 식객은 주어진 메뉴를 고를 수만 있을 뿐, 주인은 메뉴판 자체를 다시 쓰고 주방장을 갈아치운다.


#석유복지, 분노의 의무를 잊게 하는 설계

다시 바이크에 올라 주유소를 빠져나온다. 헬멧 속으로 스미는 매연 냄새를 맡으며 문득 중동의 그 뜨거운 거리를 떠올린다. 그들의 혁명이 번번이 길을 잃는 진짜 이유가 신의 이름 아래 굴복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매달 통장에 꽂히는 석유 배당금이라는 정교한 당근에 주권의 근육을 저당 잡혔기 때문일까. 석유 복지는 국민을 위한 시혜가 아니라, 분노의 의무를 잊게 하려는 권력자들의 가장 사악한 설계일지도 모른다. 돈을 안내는 식객의 컴플레인은 그들에게 어떤 경각심도 주지 못한다.


#무상복지

#석유배당금

#중동

#납세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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