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첫 만남, #2 분홍 니트의 아이
수많은 우연과 선택의 결과가 지금이고,
그중 단 하나라도 달랐다면
우리는 만나지 못했을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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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여행 전에 나는 이미 여러 번의 혼자 한 여행 경험이 있었다.
스마트폰이란 문명의 이기 없이 지도책을 들고 여행하던 시절. 패기 가득한 20대 남자의 여행수첩 안에 외로움이란 단어는 없었고, 유럽의 어느 도시에선 숙소를 찾지 못해 노숙을 했던 경험이 있을 정도로 겁이 없던 여행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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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여행은 준비부터 난항이었다.
여행카페에서 공동 구매한 4인 할인 항공권을, 나의 갑작스러운 태국 출장으로 나머지 3명의 수수료까지 대신 물어주고 깊은 원망을 들어가며 취소해야 했다. (4인 -> 3인 변경이 되지 않았다.)
그 후로 한 달이 지나서야 도착한 이스탄불 공항.
첫 버스가 운행할 시간까지 공항 벤치에서 잠을 자다 구시가지에 도착했고,
아직 인적이 거의 없는 거리를 따라 유일하게 예약을 해둔 첫 숙소를 찾아가는 길에, 한 늙은 노숙자(로 보이던 이)에게 영문도 모른 채 폭력을 당했다.
멀리서부터 주문을 외우듯 중얼거리며 내쪽을 향해 걸어오던 노숙자는, 대뜸 내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아마도) 욕을 하며 내 가슴을 세게 한 대 치고는 또 큰 소리로 화를 내며 지나쳐 갔다.
바로 옆 상점 앞에서 빗자루 질을 하던 유일한 목격자 아저씨는, 황당하고 어이없이 그 자리에 멈춰 있던 내게 '안타깝지만 네가 참아'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 일을 시작으로 이스탄불 여행은 외로움의 연속이었다.
내가 있던 유스호스텔은 매우 저렴한 숙박비 덕에 한국과 일본인 장기 투숙객들이 많았는데,
사람들은 밖에도 나가지 않고 종일 삐걱대는 이층 침대에서 시간을 보냈다.
돈을 아껴야 했기에 식사도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듯했고, 저녁이 되어도 맥주 한잔 즐기는 분위기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하루는 내가 마트에서 여러 캔의 맥주를 사 와서 친해지려 해 보았지만, 파티가 끝나자마자 그들은 다시 어두운 침대 속으로 사라져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비가 이틀 째 내리던 날,
우산도 소용없는 폭우 속에 이스탄불 신시가지에서부터 숙소가 있던 구시가지까지
물이 찬 신발을 신고 터덜 터덜 걸으며 다짐했다.
'나는 다시는 절대, 혼자 여행을 하지 않겠다.'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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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라도 이 도시를 벗어나고 싶었다.
군중 속의 외로움 보단 한적한 시골에 혼자인 편이 나을 것 같단 생각도 컸다.
결국 예정보다 이르게 카파도키아행을 마음먹고,
다음 날 일찍 야간 버스 당일 티켓을 예매하기 위해 시내에 있는 티켓 구매소로 들어섰다.
한국인 직원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티켓을 예매하러 온 다른 한국인 남자아이와 한참을 이야기 중이었다. 앳돼 보이는 얼굴이 누가 봐도 스무 살이었다.
그 아이는 내가 본인과 같은 버스를 타게 된 걸 알고는,
'이따 밤에 봐요 형!' 이란 부담스러운 인사를 남기며 사라졌다.
그렇게 의도치 않은 동행은 카파도키아 터미널에 도착하기까지, 바로 뒷자리에서 밤새 내게 말을 걸어오며 피곤하고 귀찮게 했다.
열 번쯤 다짐했다.
‘버스에서 내리는 즉시 이 애랑 찢어져야겠다.’
터미널에서 각자 인증샷을 한 장씩 남긴 후에
그 아이는 내게 숙소를 정했느냐고 물었다.
자신은 한국인이 많은 A 숙소로 갈 것이라 하길래,
(그곳은 내게도 후보였지만) 얼른 머릿속에 있는 다른 곳을 말했다.
'난 한국인 많은 숙소는 별로야.
우리 이만 찢어져야겠다.'
아이가 말했다.
'형 사실 저도 그래요.
전 그냥 형 따라갈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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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찾아간 숙소엔 아무도 없었다.
주인도 투숙객도 쥐새끼 한 마리도 없었다.
30분쯤 입구에 앉아 기다리다가
'네가 말한 곳으로 가보자. 거긴 방이 있으려나?'
우리 숙소는 아담했다.
체크인 데스크를 겸한 식당에는
마침 아침 식사를 하고 있는 한국 여성들이 가득했다.
나는 '이쪽으로 오길 정말 잘했다' 생각했고,
흘끔흘끔 훑다 보니 혼자 온 것으로 보이는 (이쁜) 또래 여자아이도 보였다.
남자 여행객은 셋 뿐이어서 방 하나에 나, 아이 그리고 호주에서 온 잘생긴 남자애랑 셋이서 룸메이트가 되었다. 난 지금도 잘 모르지만, 호주 케빈에게 아이들은 프리즌 브레이크의 스코필드를 닮았다고 했다.
둘째 날 잠에서 깨자마자 케빈에게 물었다.
'우리는 오전에 그린투어를 하고 올 건데,
오후에 다 같이 스쿠터 빌려서 돌아다닐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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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투어는 썩 마음에 들었다.
그렇지만 투어 내내 나의 시선을 방해하는 사람이 있었다.
우리 숙소의 혼자 온 그 이쁜 여자아이는 다른 조에서 투어를 하고 있었고, 동선이 같으니 자꾸만 마주쳤다.
내 시선은 하루 종일 그 아이의 꽁무니만 좇다 투어가 끝이 났고,
'오늘 저녁에 숙소에서 꼭 친해져야지' 생각하며 약속 장소로 향했다.
우리 셋은 시내로 나가 스쿠터를 한 대씩 뽑았다.
약도 수준의 시내 지도를 들고 주유소 위치 정도만 확인한 후,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 중 하나였다.
우리는 배가 아프도록 웃었고, 주행 중 수많은 영상을 남겼으며 지나치는 도보 여행객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며 이곳저곳을 신나게 달렸다.
생각보다 일찍 해가 진다고 느꼈을 때 꽤나 멀리까지 와 있다는 걸 알았고,
당황해진 우리는 한동안 산길을 헤매다 간신히 제시간에 스쿠터를 반납하고는,
숙소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숙소로 가는 동안 머릿속은 온통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어서 들어가서 그 분홍 니트를 입은 여자 아이에게 말을 걸어야지..'
"마치 꿈속의 세계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어.
난 네 꿈속에, 넌 내 꿈속에.
- 비포 썬라이즈, 1995
전날 밤 분홍 니트의 여자 아이는 식당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날 밤에도 늦도록 식당에 나타나지 않았고,
나는 다음 날 저녁이면 떠나야 했다.
나는 아이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카파도키아는 터키 중부의 아나톨리아 지역을 말하는 지명이다. 한때는 지역적으로 동서양 문명이 교류되는 활발한 곳이었으며, 초기 그리스도교 시에 로마의 탄압을 피해 온 그리스도 교인들이 이곳에 숨어 살았다.
아직도 굴을 뚫어 만든 수도원과 집들이 기암이 되어 곳곳에 남아 있다.
카파도키아 숙소들의 방은 보통 개별채로 이루어져 있고, 카파도카아의 기구한 역사를 재현한 동굴 숙소들도 많이 있다.
우리 숙소의 방들과 식당도 별채로 이루어져, 여행객들은 식당에 모여 늦도록 여행 이야기도 나누고 맥주도 한잔씩 하면서 서로에 대해 알아갔다.
'분홍 니트의 여자아이'는
전날 밤 식당에 나타나지 않았다.
같은 도미토리 방을 쓰는 아이의 말에 의하면,
몸이 좋지 않다고 했다.
아이들은 분홍 니트-사실은 카디건- 아이를
'이쁜 언니'라 불렀다.
전날 밤 나는,
'왜 이쁜 언니는 안 데리고 너희끼리만 놀아?'라며 진심 섞인 장난을 쳤고,
아이들은 관심 있냐며 '얼레리 꼴레리' 놀려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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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역시 식당에 나타나지 않았다.
아쉬움이 가득했지만 티는 내지 않은 채
호주에서 온 석호필과 따로 자리를 잡고 한참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분단 국가에 대한 깊은 호기심을 보이며 내게 많은 질문을 해댔다.
서로 영어 실력이 부족한 사람들끼리의 대화보다,
native와의 대화가 오히려 수월할 때가 많다.
개떡 같이 말을 해도 찰떡 같이 알아들으니깐..
(종종 못 알아듣는 '척' 하는 사람들은 있다)
석호필과 따로 마시다 보니 어느새 꽤나 취해 있었다.
석호필이 방으로 돌아가고,
대여섯 명의 여자애들 사이에서 혼자 희희낙락 대고 있는 룸메 동생 옆에 앉았다.
이미 전날 여러 동생들과 친해졌기에,
나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
'이쁜 언니도 데려 오는 게 어때?
어쩌면 우리가 불러 주기를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
잠시 후에 '이쁜 언니'가 나타났다.
그 아이는 'J'의 성을 가졌고
나보다 한 살이 어렸으며,
경상도 사투리를 조용하고 나긋하게 쓰는
약간은 진지하고 차가운 느낌의 아이였다.
나는 계속해서 즐거운 분위기를 이끌었지만
정작 'J'와는 거의 이야기를 못 하고 있었다.
상황은 예기치 않은 곳에서 급물살을 탔다.
'J'는 혼자 여행이 처음인데 외롭기도 하고
아직 두려움도 가시지 않아 남은 일정이 걱정이라 말했다.
내 다음 일정을 이미 알고 있는 아이들이
로또라도 맞은 것처럼 환호하며 말했다.
'우아! 여기 이 오빠도 똑같은 일정이에요 언니~ 같이 다니면 되겠다!'
사실 그리 놀랄 일도 아닌 게
우리의 루트는 당시 직장인 여행객들에게 가장 흔한 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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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파도키아에서 파묵칼레행 야간 버스는 몇 군데의 회사에서 운행을 하는데,
보통 카파도키아 도착과 동시에 터미널에서 예약을 한다.
나의 버스 시간은 'J'의 시간보다 한 시간이 느렸고,
나는 다음날 아침 일찍 터미널로 가서 버스 시간을 한 시간 당겼다.
'J'는 내게,
'괜히 저 때문에 일정에 차질 생기시는 거 아니에요? 죄송해서...'
'아니에요 아니에요. 저도 일행이 생겨서 좋은데요?
이번 여행은 왜인지 더 외롭더라고요..'
내가 말했고, 200% 진심이었다.
더 진실은,
달라진 건 버스 시간이 한 시간 당겨진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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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파도키아는 참 매력이 많은 도시였다.
특히나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즐거운 시간들 때문에 더욱 '행복한 도시'로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또한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은 단연 '음식'.
터키 하면 케밥.
현지에서의 케밥은 수십 종류가 있었다.
이스탄불 명물 중엔 갈라타 다리 앞 고등어 케밥이 유명했고, 카파도키아에선 항아리 케밥이 유명했다.
카파도키아에서의 마지막 날.
남자 도미토리에 새로 온 일본 아이,
그리고 우리를 소개시켜 줄 겸 함께 한 젊은 숙소 사장까지 남자 다섯은 항아리 케밥을 먹으러 갔다.
작은 항아리 안에 재료들을 넣고 구운 다음
손바닥 만한 손망치로 항아리를 깨서 먹는다.
카파도키아에서의 마지막 식사였다.
저녁을 먹고 돌아와 급하게 짐을 쌌다.
그새 정든 카파도키아를 떠나는 것이 꽤 아쉬웠다.
'J'만 아니면 하루 더 연장할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반대로 그렇게나 아쉬운 이별도 'J'와의 동행을 위해 기꺼이 선택할 수 있었다.
숙소의 한국인 동생들이
터미널까지 나와서 J와 나를 배웅해줬다.
버스 출발 직전,
스무 살 여자 아이 한 명이 창가로 달려와
창문을 두들기며 말했다.
'오빠! 언니 잘 부탁해요!'
파묵칼레로 가는 야간 버스에서
우리는 편하게 앞뒤로 앉았다.
중간에 휴게소를 들렀을 때,
내가 뻘쭘하게 건넨 과자를 'J'가 사양한 것 외에는 거의 대화가 없었다.
나는 'J'의 뒷자리에 앉아 있었고,
간간히 마주오는 차량의 라이트가 창가에 스칠 때
의자와 창 사이의 틈을 통해 창에 비친 'J'의 옆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 찰나를 놓치고 싶지 않아,
나는 밤새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