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가화만사성
결혼 직후 시댁에 들어가 남편의 가족들과 같이 살았다. 시할머니, 시부모님, 시누이까지 있는 대가족이었다. 나름 사정이 있어 시작은 그렇게 했다. 같이 살면서 첫 아이를 낳고 아이가 돌이 되기 전 분가를 했다. 분가한 지 한 달 즈음 남편은 얼굴이 심각해져 퇴근을 했다. 그리고 식탁에 나를 앉히더니 "프랑스로 몇 년 주재원으로 가게 될지도 모르겠어."라고 말한다.
난 당연히 가족 모두 간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기만 가게 될 것 같다며 아주 좋은 기회라 놓치고 싶지 않다고 한다. 아니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었고 이제 갓 태어난 아기도 있는데 가족과 떨어져 혼자 저 멀리 가야 한다니 갑자기 머리가 멍해졌다. 안된다고 하면 남편 출세길 막는 여자가 될 것 같았다. 잠시 생각을 한 후 남편이 원하는 대로 하라고 했다.
혼자 간다고 생각을 하고 회사 사장과 이야기를 나눈 남편. 그런데 사장이 "당연히 가족 모두 가야지 무슨 소리를 하냐, 혼자 간다고 하면 보내지 않겠다"라고 했다고 한다. 당시 남편 회사 사장은 프랑스 사람이었고 회사보다 가족이 먼저라며 오히려 혼자 갈 생각을 한 남편을 나무랐다.
7,80년대에 많은 한국 남자들이 중동으로 돈을 벌러 갔었다. 그 영향 때문일까?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집안의 가장이 가족과 멀리 떨어져 타국에서 돈을 버는 것에 어쩌면 익숙해져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남편 또한 프랑스에 가서 일을 하라고 할 때 자신만 가야 된다고 자연스럽게 생각했으리라. 하지만 프랑스 사장은 오히려 펄쩍 뛰면서 가족이 함께 가는 것이 당연함을 강조했다.
나중에 프랑스에 살면서 경험한 바로 그 사람들은 가족이 중심에 있었다. 명심보감에 나오는 가화만사성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그만큼 가족이 중요하다는 말이겠다. 우리도 그들처럼 그런 가족 중심 문화가 자리 잡았으면 한다. 그래야 가화만사성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프랑스로 가야 한다는 말이 나온 후 거의 8개월이 넘어서야 남편의 비자가 나왔다. 바로 가는 줄 알고 있었던 우리의 생각과 달리 프랑스로 가는 길은 느렸다. 그리고 뭐든 천천히 기다려야 했다. 빨리빨리 처리하는 우리와는 정말 다른 나라였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프랑스 작은 마을 콩비에뉴에서의 생활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