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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i Dante Nov 16. 2018

노교수의 해거름 시간

 정년을 맞아 머지않아 대학을 떠나게 되는 노교수는 해거름에 연구실 책장을 정리하다가 삼십여 년 전 학회에 제출한 논문에 눈을 멈추었다. 논문은 그의 학문 여정과 인생의 진로를 바꿔버린 연구다. 한국 고대사가 전공인 그는 고조선의 위치와 강역을 규명하는 논문을 쓰면서 통설을 뒤집는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연구의 토대가 된 문헌은 <사기>, <한서>, <위서>, <진서>, <삼국지 동이전> 등이었다.  


 그는 논문에서 중국 문헌에 등장하는 고조선 관련 기록들을 새롭게 해석해, 고조선 역사에 대한 기존 학계의 오류를 지적하고, 고조선의 위치와 강역을 다시 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주장은 일제강점기 이후 우리나라 고대사에 대한 기술을 정면으로 수정하는 것이었다. 이 연구는 고조선사 연구의 전환점이라는 평가를 후에 받게 된다.


 논문 발표를 계기로 그는 스승이 이끌고 있던 주류 역사학계에서 멀어졌다. 그가 인용한 문헌의 해석과 관련해 연구내용을 합리적으로 비판하는 주장은 거의 없고 오직 기존의 학설 수성을 위한 맹목적 비난만이 그에게 쏟아졌다. 그의 연구업적은 소수설로만 남을 뿐 다른 연구자들의 활발한 토론과 추가 연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기존의 통설을 따르는 주류 사학의 흐름은 한 연구자의 탁월하고 치밀한 논리구성으로도 바뀌지 않았다. 그의 최초 연구에서 추가 연구로 이어지는 몇 년의 과정에서 동료 연구자들은 그에게 등을 돌렸고, 그의 학문적 성과를 논문에 인용하는 학자는 거의 없었다. 오히려 중국과 일본의 학자들이 소수설로 그의 연구를 인용하였다.


 스승의 기존 학설을 뒤집는 연구를 뒷받침하는 문헌으로 이루어진 논문을  쓴 날 밤, 그는 어느 누구보다 그를 아끼던 스승을 찾아뵈었다. 그 시대에 스승의 연구 성과를 뒤집는 주장을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는 학문의 대척점에 스승을 두는 행위를 용납하지 않는 연구풍토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연구 성과와 다른 기존의 학설을 학계의 통설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따를 수는 없었다. 문헌 해석 방법의 최고 권위자인 스승은 그에게 최상의 역사연구 기술을 연마시켜준 분이다. 그 기술을 무기 삼아 스승의 평생의 업적을 부정하는 연구결과를 낸 그에게 그 밤의 스승과의 대좌처럼 고통스러운 일은 없었다.


 스승은 자신의 연구 성과를 뛰어넘는 연구를 했다며 기꺼워한 뒤, 논문이 일으킬 파문과 그가 받게 될 학계에서의 차별과 외면을 걱정했다. 그는 스승과 통음한 그날 이후 10여 년을 죄송스러운 마음에 스승을 찾아뵙지 못했다. 그가 논문을 발표할 때는 반드시 스승의 선행연구에 대한 평가와 비판으로부터 시작해야만 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당연히 그의 연구에서 스승의 연구 성과는 가장 많이 등장하였다.


 그가 다시 스승을 찾은 것은 스승의 정년기념 논문집에 수록할 논문으로 그의 최근 연구 성과를 넣으라는 스승의 부름을 받고서였다. 쟁쟁한 제자들이 내놓은 논문들과 함께 싣게 될 논문을 쓰면서 그는 스승에 대한 경외와 함께 진정한 학문의 길이 무엇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하지만 주류 사학의 대표 학자로 구성된 필진이 주최한 스승의 정년기념 논문집 출판 모임에 그는 초대받지 못했다.


 그는 빛바랜 논문을 보며 삼십여 년 전 그 논문을 쓰지 않았다면 학문과 인생의 길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생각한다. 준엄한 학문의 세계에서 자신의  연구결과를 스스로 버리는 것은 학문의 자유와 양심을 버리는 것이다. 그는  소수 학설 주장자로 남게 되는 단초가 된 그 논문을 보며, 그 논문이 인생의 나침반이자 주홍글씨였다고 생각한다. 그 최초 논문은 고조선 역사 연구의 망망대해를 항행할 때는 나침반이었고, 스승의 연구를 비판할 때는 주홍글씨였다. 흐릿해진 안경 너머에서 석양의 햇빛을 받은 논문의 글씨가 잠시 출렁이더니 주홍색 나침반으로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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