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사장의 회상
15층 창밖으로 쏟아지는 맑은 햇살을 바라보며 그는 설레는 마음으로 지난 시간을 돌아본다. 한 기업의 사장의 자리에 오른 오늘, 시골에서 자라 이웃 도시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 다녀온 뒤 바로 취직한 지금의 회사에서 근무한 지 27년, 그가 이 자리에 서기까지 수많은 일들이 지나갔다. 그는 자신이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한다. 뛰어난 머리도 능력도 배경도 인간관계 기술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남다른 창의력, 예지력, 신기술 개발력, 판매능력, 사내 정치력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직 있다면 일에 대한 뛰어난 몰입과 집중의 힘일 것이다.
그에게는 어떤 일을 할 때 늘 떠올리는 사람이 있다. 해야 할 일이 있음에도 그 일에 온전히 몰입하지 못할 때면 그는 군대에서 만난 한 미국 장교를 떠올리고 다시 일의 고삐를 잡고 매진한다. 미군과 연합해 근무하는 사무실의 행정병이었던 그는 행정장교였던 폴란드계 미국인 소령을 만났다. ROTC 출신인 소령은 한국과 미국의 장교들로 구성된 사무실 업무를 기획 조정하는 복잡한 행정업무를 일사불란하게 처리했다.
PC가 사무기기로 등장하기 전이던 그 시절, 모든 기안은 종이에 해야 했다. 그 행정장교가 하루에 직접 기안해 전동 타자를 치는 전문비서에게 넘기는 문서의 양은 하루 A4 리걸 패드 10장 이상이었다. 그는 일단 자리에 앉아 기획안을 잡고 기안문을 써 내려가기 시작하면 그 일을 끝낼 때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지금의 집중근무라는 업무수행개념을 실천한 것이다. 그가 수행하는 업무의 양은 다른 장교들의 2배를 뛰어넘었다.
한국과 미국 장교들이 합동으로 임무를 수행하는 전 과정을 관리 통제 조정하는 행정장교의 업무는 전략전술지식과 함께 인적 물적 자원의 효율적 배분관리가 핵심으로 조직의 목표 달성의 구심점이라 할 수 있었다. 사무실의 모든 장교들이 그가 만들어낸 일정과 직무 설계도를 바탕으로 연구 작업을 했기 때문이다. 그 복잡한 일을 그는 마치 쌓인 눈을 불도저가 밀어가듯 거침없이 해치웠다.
언젠가 그는 소령에게 어떻게 그렇게 많은 일을 한 치의 착오도 없이 처리하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소령은 그에게 일할 때는 한순간에 한 가지 일만 하고 그 한 가지 일을 끝낼 때까지 물고 늘어진다고 말했다. 그리고 책상 위에 당장 해야 할 일 이외의 어떤 파일도 두지 않는다고 말했다. 소령의 책상 위에는 전화기, 노트, 펜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눈앞이 단순 명쾌해야 사고도 명쾌하고 질서 정연하게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소령의 글 또한 질서 정연한 논리체계로 구성되어 있었다.
소령은 백지 한 장을 책상에 놓고 거기에 여러 도형을 그리고 지워가며 생각하는 방법을 그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는 그것이 바로 마인드맵에 해당하는 사고법이라는 것을 후에 알게 된다. 하나의 새로운 문제 상황이 발생할 때 그것이 기존의 생각이나 행동의 틀 안에서 해결 가능한 것인지를 판단한 후 틀에서 벗어난 문제인 경우 백지 위에 도형을 그려가며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그의 문제 해결 방식은 전적으로 여기에서 출발하였다. 그는 체계적 사고의 기초과정을 그때 익혔다.
그는 행정장교의 일 처리 능력과 시스템적 사고에 경탄하곤 했다. 행정장교와의 근무에서 마치 테스크포스(Taskforce)의 일원으로 함께 일한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고 매 순간 그의 업무처리방식을 배우고 실천하려 힘썼다. 그가 행정장교가 생산해낸 문건을 시간을 들여 보고 또 보며 시스템적 사고와 몰입의 자세를 배운 것은 군대생활에서 최고의 훈련이었다.
얼마 후 그가 미국으로 가고 후임 행정장교가 와서 업무를 하는 것을 보고, 이전의 그 소령이 얼마나 뛰어난 행정능력을 가진 장교였는지 그는 새삼 깨닫게 된다. 새로 온 장교의 관리능력이나 논리적 의사결정 능력은 정말 형편없었다. 미국 육사를 나온 장교임에도 전략전술이나 행정에 관해 아는 게 거의 없었고 업무는 다른 장교들의 연구성과를 집적하는 수준에 그쳤다. 타자를 맡은 미군 여자 군속 행정비서는 새로 온 장교는 전임 장교가 가진 능력의 30%도 갖지 못했다고 말하며 그 덕분에 할 일이 이전의 3분의 1도 되지 않아서 오히려 자기는 편하다고 그에게 말한 적이 있다.
사무실의 전체 업무는 이전의 소령이 있을 때와 다름없이 흘러갔다. 하지만 일사불란하게 연구결과를 생산해내던 장교들의 업무긴장이 풀려버렸다는 것을 그는 알게 된다. 장교들의 일의 강도가 낮아짐과 함께 업무 활력은 전에 비해 현저히 떨어졌고 생산해내는 연구성과도 절반 이하로 줄어버렸다. 연구활동을 추동하는 시스템이 사라져 버리자 생산성이 급격히 떨어져 버린 것이다. 이를 보며 그는 일의 방향을 기획 관리하는 추진동력이 조직의 목표 달성에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된다.
군대에서 제대한 뒤 그는 지금의 회사에 들어와 소령으로부터 배운 업무처리방식을 바탕으로 발군의 능력을 발휘했다. 실제로 그가 회사에서 동료와 상사들이 일하는 것을 보니 이건 마치 노는지 일하는지 구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업무강도가 느슨해서 그 부서가 하루하루 돌아가는 것 자체가 신기하기까지 했다. 그의 진가는 수습기간을 보낸 뒤 바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부서의 문서 배치와 보관 시스템을 2주의 작업으로 완벽히 바꿔버렸고, 입사 후 8개월 만에 협력사와 연관된 부품 재고관리 시스템을 새롭게 설계해 업무 효율성을 획기적으로 높였다. 20여 개 부품사가 매일 들여오는 수많은 부품 재고와 입출고 내용을 몇 가지 표와 양식으로 완벽히 파악할 수 있도록 한 그의 재고통제시스템은 나중에 컴퓨터가 도입된 이후에도 회사의 재고관리 표준 매뉴얼이 되었다.
평소 하루 동안 그에게 부여되는 일은 오전 한나절 3시간이면 다 처리할 수 있는 수준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옆의 동료가 기안문서 하나를 잡고 하루 종일 뭉그적거리며 씨름할 때 그는 오전 시간에 2-3건의 기안 문서를 작성해 해치웠다. 그에게 일을 맡긴 대리는 그에게 업무를 주고 뒤돌아서면 얼마 되지 않아 완벽한 기안문이 올라오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이 쌓여가자 그의 업무처리능력의 뛰어남은 부서에서 공인되었고 입사 후 1년도 안된 그에게 다른 직원의 2배 이상의 업무가 부여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군대에서 소령에게서 배운 업무방식을 활용해 일을 능란하게 해치웠다.
그가 그렇게 빠르게 업무를 정복한 배경은 수습기간 동안 부서의 업무파일 수 백 건을 모두 읽고 그 패턴과 프로세스를 완벽히 익혀둔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소령에게서 배운 시스템적 사고와 일에 몰입하는 자세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해야 할 일을 체계적으로 분석한 뒤 행동단계마다 마치 해치워야 할 적군을 보듯 초절 집중과 분할 정복으로 진군해 갔기 때문이다.
회사 업무에 특별한 창의력을 요하는 사안은 별로 많지 않았다. 일의 80% 이상은 기존 절차나 관례를 따라 처리하면 되는 일이고 나머지 20% 정도가 새로운 접근 방법이나 문제 해결 능력이 필요한 것이었다. 그는 80%의 정형화된 일은 거의 공식으로 매뉴얼화해 처리하고, 나머지 20%의 문제 해결 능력이 필요한 일에 에너지와 시간을 집중하였다. 그는 80%의 루틴(Routine)화된 일에 40%의 업무시간을, 나머지 20%의 비 정형화된 일에 60%의 업무시간을 의식적으로 배분하였다. 이러한 효율성 지향의 시간관리 개념에 기초한 업무처리로 그는 남보다 더 높은 업무성과를 달성하였다. 또한 회사 내에서 중요한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적정한 문제 해결 방법을 제시하여 단기간에 관리자의 위치에 설 수 있었다. 그런 과정의 축적의 결과 그는 오늘 사장에 오르게 된 것이다.
그는 소령과의 만남이 없었다면 오늘 여기에 그가 서 있을 수 있었을까 생각한다. 그는 소령에게서 선물로 받아 지금까지 쓰고 있는 스테이플러를 집어 들고 상상의 28년 전으로 걸어 들어가 세미나를 준비하던 그 날의 사무실에서 소령과 마주 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