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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i Dante Mar 09. 2020

배신의 오후

"야, 뭐하냐? 얼른 따르지 않고."     


"언니, 어떻게 된 건지 얘기부터 하는 게 순서 아녀?"     


"야가 시방 뭔 잡소리여.  손 부끄럽다. 얼른 따라야."    

 

"알았어. 차고 넘치게 따라부께.  근데 방금 몸 풀고 나온 사람이 그새   땡기는겨? 그건 술로 푸는 게 아니잖어?"     


"미친년. 내가 지금 제대로 푼 품세로 보이냐? 요새 사내놈들은 하나같이 배짱도 없고 돛대에 힘도 없어. 주둥아리 하나 밑천 삼아서 한몫 꺾어볼까 하는 놈뿐이여. 너는 어째 사내놈을 갖다 대도 한결같이 비리비리한 놈이냐? 옛날의 빛나던 눈썰미는 다 어데 갖다 버려 부렀냐?"      


"그 사람 실하게 보이던디 보기하고 다른 가베? 말빨 좋고 거푸집도 대단허잖어?"

    

"야, 그따위로 생겨먹은 놈 다시는 내게 붙이지 마라. 재수 옴 붙는다더니 오늘 본 놈이 딱 그런 놈이다. 아 시발놈이 밑도 끝도 없이 다짜고짜로 돈타령부터 하더니 정작 본 게임 들어가서는 돛대 제대로 세우지도 못 하더라고. 쪽팔려서 나 같으면 그냥 줄행랑 놓겠더구만 끝까지 앵겨붙어갖고 돈타령이여. 지가 있으면 얼마나 있다고 돈 얘기여 그 상황에. 하도 같잖아서 왼쪽 발 걸어서 구석 데기에 패댕기 치고 나온 길이다. 그러고본께 오랜만에 처녀 적에 동네 오빠 따라다님서 배운 씨름판 밭다리 기술을 오늘 써먹을 줄을 누가 알았?"

        

"긍께 시방 언니 얘기로는 내가 애써서 전원주택 분양지 지주 휘어잡아서 언니한테 한몫 같이 해보자고 작업 부탁했더니만 돛대 힘없다고 그 사내를 차 버렸다 이 말이여 시방. 그게 지금 언니가 나한테 헐 소리여? 언니가 지금 옛적 날고 기던 20대여? 30대여?"    


"아니 그럼 이놈이 그놈이여? 언놈이 언놈인지 확실히 구분해서 말을 제대로 했어야지. 나는 니가 오늘 사내 한번 품어보라고 해서 그냥 나온 거지. 이놈이 그놈인 줄은 몰랐지. 알았으면 밭다리 기술이 아니라 노젓기 기술을 썼지."

     

"아이고. 내가 진짜 언니땜에 미쳐 미쳐. 석 달 걸려서 공사해놨더니만 한 시간도 안돼서 파투냈구만. 차라리 내가 작업을 들어갔어야 했는디 언니 기술 과신한 내가 잘못이여. 딱 보믄 몰라? 굳이 내가 말 안 해줘도 요놈은 삶아야 할 놈인지 즐겨야 할 놈인지 판단이 안서?"

     

"야 이년아, 나도 이제 한물간 나이여. 맨날 총기 만발해서 다 기억하고 모의하면서 살아가기 힘든 나이야 이제는. 사내놈 만나는 것도  체력이 따라줘야 하는  이고. 요새 드는 생각 인디, 인자 그냥 산골에 눌러앉아서 노을 보면서 살고 잡다. 아까 참에  자기 욕정 따라주지 못하는 자신의 무기에 좌절하는 그 사내 보면서 그 인간이 불쌍하기도 하고, 그걸 바라보고 있는 나 자신의 현실과 존재에도 구역질이 나서 나도 모르게 그 사내 자빠트리고 튀어나온거여."      


"현실과 존재? 갑자기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은 뭐여? 대학 다닐  배운 철학개론 한 챕터가 떠오르는가벼. 유식한 말로 실존주의의 도래여?"   

  

"야 이년아, 실존은 무슨 실존이여? 삼류 끄트머리 잡대 철학과 2년 다니다 때려치운 값 하느라고 내가 지금 이 판국에 그따위 단어 놀음을 머릿속에서 가동하겄냐? 어쩌다가 너나가 이렇게 형편없이 풀렸냐? 옛날 운동권 서클 오빠 따라 너나 둘이서 휘젓고 다닐 때 우리가 이따위로 풀릴 것을 생각이나 했냐? 오늘은 나 자신이 너무 비참하다. 술이나 계속 채워 이년아."

     

"언니, 내가 오늘 그 인간을 아니 그 인간이 가진 땅을 꼭 요리해야 할 이유를 말해주까? 그놈 회사까지  사그리 말아먹을 방법을 우리 둘이서 꼭 강구해야 할 이유를 말이여. 자 한잔 더 들이키고 내 얘기 찬찬이 들어."


"그 사설 재미없으면 이 술값 니가 내 이년아."


"오늘 언니가 만난 그놈이 바로 오빠 밀고해서 깜방가게 한 놈이여. 그놈이 바로 뿌락치로 우리 학교 다닐 때 창진 선배, 율전 선배, 진구 선배 모두 하룻밤에 잡아가게 한 놈이라고."

     

"그게 참말이여? 그놈이 우리 서클 넘긴 놈이여. 아녀. 내가 알기로는 그때 오빠 잡혀갈 때 경찰서 같이 따라갔더니 경찰이 그랬어. 선배 아버지가 자식 장래 생각해서 미리 검사하고 쇼부친 거라고. 그래서 선배들 전부 6개월 만에 다 나온 거 아니여? 안 그러면 3년은 기본이라고 그랬어."      


"나도 그런 줄 알았제. 그런디 그때 우리 서클 선배들보다 훨씬 극렬하게 선동하고 데모하고 삐라도 더 뿌리고 칼 막스 책까지 가지고 있다가 압수당한 다른 서클 성태 선배가 3개월도 안돼서 나온 걸 보고 나도 좀 이상하다 생각이 들더라고. 하지만 그 사실 확인하기도 전에 선배들 군대 끌려가불고 우리 모두 흩어져버린지. 언니 애인 율전 선배 군대서 사고 치고 영창 가고 헉헉대다가 어떻게 어떻게 제대하고 얼마 안 있다가 언니한테 말 한마디 없이 이 나라 떠버리니까 나도 그 생각은 더 이상 물고 늘어져서 따져볼 수가 없었제."


"그래도 그때 얘기를 했어야지. 이년아."

       

"언니는 율전 선배 배신에 치떨었지만 생각해보면 율전 선배 이 땅에 정 붙이고 살기가 싫어져분거여.  율전 선배가 배관공 훈련받고 자격증 따면서도 언니한테 속마음 털어놓지 않은 것도 다 마음에 상처가 너무 커서 그런거제. 그러고 언니 아버지가 자기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것도 잘 알고 있었고."


 "다 지나간 얘기 되새김해서 뭐하냐?"


"그런데 사실은 내가 알고 있던 게 전부가 아니란 걸 최근에 알게 된 거라고. 얼마 전에 이 작자하고 동업하는 사람하고 셋이서 노래방에서 술 먹다가 무심코 떠드는 얘기를 실마리로 유추해보니까 바로 이 작자가 우리 서클 폭파시킨 놈이더라고."   


"확인되지 않은 사실로 사람 때려잡는 거 아니다."

   

"그 사실 확인 사살하기 위해서 내가 진구 선배 찾아서 이번에 시골에 내려갔어. 진구 선배 소식 모르지? 진구 선배 완전히 딴사람 되어부렀어. 사업가로 완전히 변신해서 시의원에 부동산 개발업자에 완전히 우리하고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이 돼있더라고. 내가 진구 선배한테 묻기도 전에 먼저 말해불드만. 언젠가는 나나 언니가 자기를 찾아와서 율전 선배 얘기를 물을 줄 알았다고. 언니도 진구 선배 잘 알잖아"


"나 사실 진구 선배 별로 선배 취급 안 해서 잘 몰라."  

   

"말하자면 일의 시작은 진구 선배였던 거야. 진구 선배가 자랑삼아 시골집 동네 사랑방에서 자기가 우리 서클에서 하는 일을 나발 불었고, 진구 선배 집에서 머슴살이하던 애비를 둔 그 작자, 방금 전에 언니가 밭다리로 후리치기 한 그 작자가 듣고 있다가 진구 선배 서클에서 하던 일을 꿰맞춰서 면 지서의 순경한테 하나부터 열까지 다 불어버린 거야. 검사는 그걸로 선배들 잡아다 오무락달싹 못하게 엮어버린거라고. 그때 그 작자는 진구 선배 아버지가 돈대줘서 대학도 같이 다니고 있었음에도 지 비 한을 주인집 아들놈한테 풀어버린 거지.  배은망덕, 배신의 끝판이지."


"그럼, 진구 선배는 알고도 우리한테 숨겨왔다는 거야?

      

"진구 선배도 몇 년 전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된 거야. 그것도 진구 선배가 이 작자하고 부동산 개발업 동업하겠다고 나서자 진구 선배 아버지가 그 작자하고 동업은 절대 안 된다면서 그동안 말 안했던 진실을 알려주신거야. 진구 선배 아버지도 자기 집에서 부리던 머슴의 아들놈이 자기 자식 신세 망치게 밀고한 걸 알고 나서 치를 떨었겠지. 그래서 한번 배신 때린 놈은 언젠가는 반드시 또 배신 때린다면서 동업을 반대한 거지. 그런데 세상은 요지경이라 그 배신자가 부동산 개발 붐에 올라타서 졸부가 된 거야."


"그래서 니 말인즉슨 배신자 이 작자가 가진 전원주택 분양지를 요리하는 것을 시작으로 나중에는 그놈 회사까지 분해시켜버리자는 거냐? 지금."


"당연하지. 언니는 이 작자를 그냥 놔둘 거야? 언니 인생 흩트려놓은 이 작자를 앞에 두고 모르는 척 그냥 놔둘 거냐고? 잘 생각해봐. 길게 잡고 딱 2년이면 게임 끝나."


"야, 싫다. 나 이제 다 싫다. 내가 이 나이에 내 청춘의 남자 인생 조진 놈, 내 인생의 출발을 흐려놓은 놈을 되갚아 조진다고 뭐가 달라지냐? 지나간 배신에 매달려 또 인생 헛살고 싶지 않다. 나 이제 재작년에 지리산 아래 마을에 사놓은 그 땅에 집 짓고 세상 잊고 살 거다. 더 이상 그 어떤 인간에게도 그 어떤 일로도 내 시간 베어주며 살고 싶지 않다. 너도 마음잡고 지난번에 너 좋다고 달라붙던 시장통 참기름집 홍씨하고 살림 차려서 옹골차게 한번 참기름 냄새 풍기면서 살아봐 이년아. 인생 별거없어. 내 보기엔 홍씨 너 배신 때릴 사내는 아닌 것 같으니까."


"언니, 시방 그깟 맥주 취한겨? 언니도 시력검사 한번 제대로 받아봐야 한다는 건 알고 있제? 나 좋다고 쫓아다니던 그 홍가, 옆골목 푸줏간 마누라하고 눈 맞아서 둘이서 이 바닥 뜬 지가 언젠데 지금 그 소리여? 푸줏간 마 씨가 홍가하고 마누라 잡아서 아작 내겠다고 장사 때려치우고 온 세상 뒤집고 다닌 지 석 달이 넘었다고. 그 통에 노난건 떡집 옆 푸줏간 최 씨 할아버지 길건너 늦들에 참기름집 "


"그놈도 그런 놈이었냐?, 오늘은 맑은 정신으로 저무는 해 보기 렵겠. 술이나 더 푸자. 어이 총각! 여기 맥주 한 짝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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