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시라노> 후기
‘시라노’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 있는가. 다수가 영화 <시라노 연애조작단>을 떠올릴 것 같다. 영화 속 ‘시라노 에이전시’은 연애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성공적으로 연애를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연애조작단이다. 어느 날 시라노 에이전시를 찾아온 상용(최다니엘)은 희중(이민정)과의 연애를 이루어줄 것을 의뢰한다. 문제는 희중이 에이전시의 대표 병훈(엄태웅)의 전 연인이었다는 점에서 발생한다. 영화 <시라노 연애조작단>은 ‘시라노 에이전시’의 대표로서의 책임과 한 여자를 사랑했던 남자로서 느끼는 감정 사이에서 내적 갈등을 겪는 병훈에 대한 이야기이다.
왜 하필 ‘시라노 에이전시’일까. 에드몽 로스탕의 「시라노」는 영국에서의 「햄릿」, 스페인에서의 「돈키호테」에 버금가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희곡이다. 「시라노」의 주인공인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는 흉하게 큰 코로 인한 콤플렉스 때문에 록산을 사랑함에도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지 못한다. 오히려 뛰어난 외모를 가졌지만 글솜씨와 말솜씨가 뒤떨어지는 크리스티앙을 도와 ‘완벽한 연인(Perfect Lover)’이 되어 록산과의 사랑을 성사시킨다.
뮤지컬 <시라노>는 에드몽 로스탕의 희곡 「시라노」를 원작으로 한다. 시라노라는 인물은 투철한 정의감에 재치까지 겸비하여 독자 및 관객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거인과 기꺼이 맞서 싸울 정도의 용기와 패기를 가진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는 한없이 여려지는 모습이 답답하게 느껴지면서도 괜히 그의 사랑을 응원하게 된다. 재미있는 점은, 록산을 사랑하는 다른 남자들이 밉지 않다는 사실이다. 크리스티앙도 드기슈 백작도, 그 누구도 이 극 안에서는 비난의 대상이 아니다.
사실 <시라노> 안에서의 악역은 관객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오만함, 위선, 편견, 비겁함 등 시라노가 죽어가는 순간까지 맞서 싸운 것들이 이 뮤지컬 안에서의 악역이다. 눈에 보이는 악역과의 싸움은 아니지만 대의를 위해 두려움을 무릅쓰면서까지 일당백의 기세를 보여주는 모습은 영락없이 이상주의에 물든 인물이다. 하지만 시라노는 허무하게도 하찮은 하인에게 공격당해 생을 마감하고 만다. 시라노의 기백에 비해 허무한 결말은 관객들을 맥 빠지게 만든다.
열린책들에서 출판된 「시라노」를 번역한 이상해 씨는 역자 해설에서 이 희곡이 모순으로 범벅되어 있음을 지적하며 희곡 속 아이러니의 예를 몇 가지 들고 있다.
우선, 아름다운 정신을 추구하는 록산이 크리스티앙의 잘생긴 외모에 반하고, 정작 그것을 가진 시라노는 추한 외모 때문에 속내를 털어놓지 못하는 상황이 아이로니컬 하다. 이런 상황에서 록산이 시라노에게 크리스티앙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것도, 시라노에게 그를 보호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아이로니컬 하다. 시라노의 낙담이 록산과 크리스티앙 사이의 로맨스를 가능케 하는 것 역시 아이러니고, 크리스티앙이 혼자 구애를 시도하다 무참하게 실패하는 것도, 그가 시라노의 힘을 빌려 록산과 결혼하는 것도 아이러니다. 또한 백 명의 괴한을 물리친 시라노가 하인이 내려친 장작에 맞아 허무하게 죽는 것도 아이러니고, 록산이 평생 오직 한 사람만 사랑해 놓고 그를 두 번씩이나 잃는 것 역시 아이러니다.
-「시라노」 역자 해설 中
한 남자의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 안에 숨어있던 모순은 독자와 관객에게 그 모습을 드러내면서 진실을 보여준다. 거인을 데려 오라던 시라노 마저도 사랑 앞에서는 겁 많고 나약한 남자이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한없이 대담하고 무모해지기도 한다. 품위를 상징하던 시라노의 큰 코는 록산 앞에서는 사랑의 장애물일 뿐이다. 이처럼 사랑 앞에서는 모두가 모순 덩어리가 된다.
원작과는 다른 뮤지컬 <시라노>만의 매력을 묻는다면 주저 없이 희곡은 가질 수 없는 ‘음악’을 꼽을 수 있다. 넘버는 시나리오를 기반으로 하는 다양한 예술 장르 중에서 뮤지컬만이 가지는 요소이다. 단 한 넘버 때문에 표값을 지불하고 극장을 찾아도 무방할 정도로 뮤지컬에서의 작곡은 그 비중이 지대하다. 뮤지컬 <시라노>의 작곡의 완성도는 의심할 필요도 없다. 프랭크 와일드혼의 작곡을 의심해서 무엇하겠는가.
뮤지컬 작곡에 능한 프랭크 와일드혼답게 이번에도 중독성 있는 리듬과 멜로디를 기반으로 음악을 서사에 완전히 녹여버렸다. 넘버만 들어도 씬이 생각나고 음악이 흐르지 않는 <시라노>를 상상도 할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개인적으로 프랭크 와일드혼의 작곡을 선호하기도 하지만, 그의 손을 거친 수많은 작품들 중에서도 <시라노>는 첫 관람부터 내 마음속 Top 3을 당당히 차지해 버렸다.
거인을 데려와(Bring Me Giants), 나 홀로(Alone) 등 주인공 시라노를 대표하는 넘버들도 많이 사랑받았지만, 대극장 뮤지컬만의 묘미인 앙상블들과 함께하는 합창 넘버들도 좋은 곡들이 많다. 패스트리와 시(Pastry and Poetry)나 달에서 떨어진 나(I Fell from the Moon) 등의 유쾌한 넘버들은 눈과 귀가 동시에 즐거웠고, 가스콘 용병대(The Gascons)는 같은 가사와 멜로디로 1막과 2막에 각각 다르게 쓰여 감동을 배가시켰다.
뮤지컬 넘버가 작곡만 좋으면 쓰나, 노랫말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존재이다. 원작이 불어, 뮤지컬의 원어는 영어인 만큼 극장을 찾기 전까지는 번역에 대한 걱정이 컸다. 하지만 결과물은 꽤 놀라웠다. 무게감을 지녀야 하는 넘버에서는 서사를 해치지 않는 신중한 단어 선택이 돋보였고, 시라노의 입담이나 라임이 돋보여야 하는 넘버에서도 그 느낌이 유지되었다.
뮤지컬 안에서 넘버는 극본의 일부인만큼, 넘버의 번역이 잘 이루어졌다는 것은 극본의 번역 자체가 양질임을 의미한다. 대사보다는 넘버 위주의 씬이 월등히 많은 송쓰루 뮤지컬이지만, 스쳐 지나가는 대사 하나하나도 허투루 번역하지 않았다. 다른 뮤지컬들에 비해 특히 연극적 성격이 많이 드러나는 <시라노>의 대본이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것은 흠잡을 데 없는 번역 덕분이었다. 시라노의 재치와 아름다운 말솜씨를 한국어로도 즐길 수 있었기에 관객으로서 시라노의 매력에 흠뻑 빠질 수 있었다.
너무 칭찬만 늘어놓은 것 같으니 몇 가지 옥에 티들을 꼽아 보겠다. 첫째, 가스콘 부대의 깃발을 대신하는 록산의 손수건이 흔히 항복으로 해석되는 하얀색이라는 점이다. 극을 보면서 설마 저 손수건을 그대로 쓰지 않겠지 싶었는데, 핏자국 하나 내지 않고 그대로 전장으로 갖고 나가는 것을 보고 좀 당황했다. 둘째, 17세기에 삼색기가 웬 말인가. 삼색기는 18세기 프랑스 혁명 때 등장했다. 자유, 평등, 박애를 부르짖으려면 최소 백 년은 더 흘러야 한다. 마지막으로 라그노의 피자를 지적하고 싶은데, 이 정도는 애교로 넘어가 줘도 괜찮을 것 같기도 하다. 라그노의 센스라면 피자도 창의적으로 만들 수 있겠지. 이미 극장가를 떠난 뮤지컬 <시라노>가 다시 돌아올 때에는 최소 두 가지는 꼭 수정해야 한다.
몇 가지 옥에 티들이 눈에 띄었음에도 불구하고 뮤지컬 <시라노>의 초연은 성공적이었다. 원작을 읽지 않고도 충분히 극을 이해하고 즐길 수 있을 만큼 각색과 번역이 훌륭했다. 원작의 길이 자체가 약 150분의 러닝타임으로 각색되기에 좋았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생략된 장면도 없었고, 극을 루즈하게 만들 정도로 늘어진 장면도 없었다. 여기에 더해진 프랭크 와일드혼의 작곡과 오케스트라의 힘찬 연주, 극에 걸맞은 연출과 눈을 즐겁게 만드는 군무는 극을 더욱 드라마틱하게 만들었다. 뮤지컬 <시라노>는 높은 퀄리티를 자랑하면서도 중독성까지 유발하는, 관객으로서는 기립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는 극이었다.
왜 우리는 영웅에 열광할까. 영웅은 한때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등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되기도 하였지만, 지금의 영웅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더 이상 영웅이 실존한다고 믿지 않는다. 하지만 영웅이 나타나길 바라는 인류의 소망은 사라지지 않았고, 대중의 소비로 드러난다. 모든 이야기는 일정 부분 현실을 반영하면서도, 어떤 부분에서는 현실을 초월하여야 한다. 초월적인 힘으로 위험에 빠진 세상과 인류를 구하는 마블 코믹스 속 주인공들은 대중들에게 익숙한 영웅의 이미지가 되어 버렸다. 시라노는 영웅일 수 없을까. 거인들과 맞서 싸운 시라노는 그저 이상주의에 젖어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인물로만 남겨져야 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정녕 거인들과 싸울 용기를 가졌는가.